'요리책은 레시피'라고 아직도 생각한다면 당신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지지 않았는지 한 번쯤 되돌아 보는 게 좋다. 요리책은 물론 좋은 요리,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음식 만들기를 위한 지침서여야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구어만드 요리책 경연대회에서 수상한 요리책들은 심하게 말해 그것이 별로 쓸모 있는 레시피를 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한 권의 훌륭한 예술서적으로 대접 받을 만하다. 요리로 문화와 사회를 짚어보는 것만큼 호소력 강하고 구미 당기는 인문학서가 달리 있을까.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가 이런 요리책의 진화 사정을 들려주는 기고를 보내왔다.
우리 집 서가에는 아주 오래 전에 출판된 황혜성 선생의 네 권짜리 요리책 가 있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제본되어 있다. 가운데 스프링을 넣어 책의 어느 부분을 열어도 반듯하게 펼쳐지도록 해 놓은 것이다. 직접 요리법을 보면서 요리하고자 했던 당시 독자들의 열망을 반영한 듯하다. 당대의 일급 출판사였던 학원사에서는 스프링 제본을 넘어, 아예 한 장씩 떼어내서 부엌에 두고 요리를 따라 해볼 수 있는 제본을 채택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요리책은 '요리법'(레시피)을 전수받는 기능에 충실했다. 당시에 텔레비전은 장안의 유명한 요리 선생을 초빙해서 요리를 하는 방송을 내보내서 크게 히트 쳤다. '갖은 양념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보세요~' 하는 한 요리 선생의 말투는 개그맨들이 따라할 만큼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바야흐로 요리가 '칼로리'를 넘어 '맛'의 단계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요리는 가정주부의 몫이었다. 특히 이 즈음 요리교실이 확산되었는데, 중산층 아파트가 많은 강남을 중심으로 예비신부들과 주부들의 수요가 많았다. 요리책은 이런 수요에 맞춰 공급되었다. 그 후 연예인과 재벌가의 여자들에게 상당한 액수를 받고 요리 기술을 전수하는 '○○동 선생'이라는 별칭의 '프라이빗 레슨 강사'가 뜨기도 했다. 지금도 서점가에는 옥수동이니 방배동이니 하는 선생들의 책이 팔리고 있을 정도다.
요리가 개인의 고급 취미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를 넘어 새 밀레니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이 시기는 인터넷 카페, 블로그의 활성화와 궤를 같이 한다. 요리책은 여러 측면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독신 생활자와 88만원 세대의 등장으로 '몇천원으로 밥상 차리기'류의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요리법을 담은 책이 가정주부와 예비신부의 '규방 수요'를 떠나 새로운 형태의 집단에게 소구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개인의 고급 취미로서 요리를 다룬 책도 인기를 끄는데, 요리가 놀이의 일종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투영한 결과물이었다.
동시에 요리책은 인문의 영역으로 진출했다. 일부 사회학자와 생리학자들이나 거론하던 브라야 사바랭("네가 먹는 것을 말해보라, 그러면 네가 누군지 알려주겠다"고 했던, 지금은 진부해진 발언을 중심으로)이 아무 데서나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유행이었다. 그 후 최근에는 요리 블로거의 폭발적인 증가가 근 십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초기 블로거들의 일부는 요리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변모하는 사회 현상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이들 블로거의 일부는 산업의 영역으로 진출, 부작용으로 법의 심판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커진 사회적 영향력을 실감케도 했다. 동시에 이들이 펴낸 요리책은 '대박'을 불러오는 황금 아이템으로 출판계에 군림했다.
요리가 드디어 본래의 속성인 과학의 영역으로 등장한 것은 가장 최근의 경향이다. 그 상징적 사건(?)이 미국 요리과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해럴드 맥기의 (백년후 발행, 원제 'On food and cooking')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 것이다. 놀랍게도 이 책은 출간 2년 만에 5쇄를 찍었다. 정가 7만8,000원짜리 책의 5쇄는 웬만한 단행본 20쇄를 넘어선다. 더 재미있는 뒷얘기는 이 책의 원저가 출간된 것이 1984년이라는 점이다. 아무도 시장성을 내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간 국내 출판계에서 레시피나 에세이와 달리 과학의 시각으로 편집된 책에 대한 감각이 부족했음을 입증한다. 동시에 국내 시장에서 요리책의 방향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예측해볼 수 있는 단초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서 최근 요리책만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인 '따비'가 선전하고 있고, 기존 출판사에서도 임프린트나 부서를 신설해 요리책을 다각도로 다루고 있다.
음식을 사회사의 일부로 보고,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학자도 늘고 있다. 이미 서양에서는 관련 연구자들이 많은 논문과 저작을 쏟아내고 있는 데 비하면 늦은 편이다. 주강헌, 주영하 두 인문학자의 저작은 내는 즉시 상당한 판매량을 보인다. 황교익, 박상현 같은 재야 전문가들의 책들도 높은 판매량을 보이면서 출판사들이 전속 작가로 대우하고 있을 정도다.
아직 국내 요리책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쪽은 이른바 스타 요리사들의 레시피북이다. 요리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인식되는 요즘 이런 책도 곧 높은 인기를 구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요리책의 인기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 같다. 그 가장 큰 동력은 본디 요리책의 속성이 포르노처럼 자극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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