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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칼럼/10월 8일] 가상소설, 함부로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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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칼럼/10월 8일] 가상소설, 함부로 쓰지 마라

입력
2013.10.07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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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대학가 축제프로그램 중에 '역사상 인물 가상재판'이라는 게 있었다. 히틀러든 황진이든 피고석에 불러내 오늘의 역사의식과 법률로 공과를 재단하는 모의법정이었다. 죄명은 기발했고, 선고는 특이했다. 언론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 당했던 제3공화국 시절에 아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대산문화재단의 계간 는 10년 전부터 '가상 인터뷰'라는 연재물을 내보내고 있다. 작가들이 소설 속 인물이나 고인이 된 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명작의 작품세계와 오늘의 현실, 문학의 과제를 천착하는 기획이다. 이들은 다양한 형식을 통해 독창적 서평과 해설, 소개를 하고 있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의 작가 최인훈의 연작 가상소설 (1967년)는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우리나라를 떠나지 않고 식민지 복원을 위해 암약 중인 총독의 비밀 방송 형식을 통해 한반도의 뒤틀린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왜 이렇게 가상에 의지하는 것일까? 실제 현실에서는 만남이나 접촉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 해도 제대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해 발언하기 위한 기제나 장치가 가상이다. 상상의 자유로움, 표현의 분방함이 '가상'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는 일과 문학작품의 생명이며 특징일 것이다.

가상작품은 판타지작품이나 미래공상과학소설과 다르다. 현재든 과거든 그 시기에 관해 정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필연이나 개연의 사건을 현실감 있게 묘사·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는 한반도의 당시 상황은 물론 조선총독부 시절 일본인들의 생각에 정통하지 못하면 쓸 수 없는 작품이다. 가상이라지만 읽는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가상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진실에 부합하면서 공공선을 모색하는 자세와 내용이다. 대중을 설득하거나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데 가상이라는 형식은 아주 효과적이다. 최인훈의 소설에서 조선총독은 후일을 기약하며 이 땅에 남은 이유에 대해 일인들을 웃으며 보내준 반도인들의 온정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대목을 의미 있는 가상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요즘 문제가 된 두 건의 가상 글을 생각해본다. 동아일보 최영해 논설위원의 '채동욱 아버지 전상서'와 최성령이라는 사람이 쓴 '채동욱 아내의 호소문(가상)'이다. 최 위원의 글은 '채 전 총장의 혼외아들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엄마의 말을 듣고 자라온 아이의 입장에서 쓴 창작물'이다. 칼럼이 아니라 소설인 것이다. 최성령 씨의 글도 창작물인데, 그는 가상이라는 말을 빼고 퍼 나른 사람들 때문에 채 전 총장의 부인이 쓴 것처럼 오해를 사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글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쓰는 것일까? 글재주와 상상력을 자랑한 것밖에 없다. 정확한 사실에 관해 이해를 돕거나 오해를 푸는 데 기여하려는 선의는 보이지 않고 해당자들의 인권을 짓밟고 불행에 소금을 뿌리는 악의만 읽힌다. 입을 닫고 있느니만 못한 글 장난이다.

큰 뉴스가 생길 때마다 되풀이되는 것은 무분별한 신상 털기와 반성 없는 퍼 나르기다. 이번에도 채 전 총장의 여인과 아들이라는 사람들의 사진이 떠돌았다. 이런 것들보다 가상이라는 너울을 쓴 글깨나 쓰는 자들의 일탈과 방종이 더 문제다. 최 위원의 글은 같은 신문사의 논설위원이 그런 뻘글 쓰지 말라고 페이스북에 촉구할 정도였다. 같은 언론인으로서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다들 가상소설 함부로 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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