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인가 시국선언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선언문을 작성하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으고 목소리를 높여 그것을 읽고, 그랬던 적은 없었고, 대개 그 반대의 경우였다. 아는 누군가가 '이번에 어떤어떤 일들에 대해서 의견 표명을 할 생각인데 너도 함께 할래?' 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지, 뭐' 하는 수준.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그리고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이 드러났을 때도 모두 비슷한 절차와 만남을 거쳐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무작정 시국선언에 함께 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개인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내 윤리와 양심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었고, 또 반대로 그 어떤 우쭐거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부턴 어쩐지 그것이 내 부끄러움과 우쭐거림의 소산은 아니었을까, 단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알리바이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 저편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용산 참사 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선언문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용산을 찾아가보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에 분개한 것은 맞지만, 월급을 주는 직장에 충실히 출근했고, 퇴근하면 아이들과 함께 외식을 하곤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그랬고,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도 그랬다(나는 이번 시국선언에 동참한 후, 바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피서를 떠났다). 무언가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고, 그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그것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내 가족이 그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것을 마음 한편 감사하게 여긴다. 그렇다고 그 고통에 눈감고 모른 척하는 것도 마음에 부담이 된다. 적당히 분개도 하고, 울분도 쌓인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시국선언 얘기를 꺼내면 '그러지, 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만다. 부끄러움도 지울 수 있고, 또 무언가 함께 하고 있다는,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스스로의 만족도 손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고, 내 삶의 변화도 없이 그렇게 의견 표명을 해왔다. 시국선언을 한다 해도 아무런 손해도,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지금 우리들의 시국선언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내가 알고 있는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시국선언들은 모두 어떤 희생들을 전제로 발표된 것들이었다. 나는 '교육지표 사건'도, '윤석양 이병'의 일도 잘 알고 있다. 거기에 함께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시국선언문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임을 빤히 알면서도, 그로 인해 자신들의 가족이 고통의 세월을 함께 짊어질 것을 잘 알면서도 뚜벅뚜벅 그 길로 걸어 들어갔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시국선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타격과 울림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시국선언은 지나치게 안전하다. 권력자들은 대놓고 시국선언을 폄훼하거나 눈과 귀를 닫아버렸고, 언론들 또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그들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무관심으로 일관해 시국선언을 하는 사람들도, 시국선언을 접하는 사람들도 모두 무감각해지고 무덤덤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래서 다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것. 어찌해야 하나? 그렇다고 상식 밖의 일들에 대해서 그저 묵묵히 침묵해야만 하는가? 서명 한 번 한 후, 모든 것에서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문장을 문장으로 바라보지 않는 삶. 문장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 그것이 반복을 피할 수 있는 길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우리들의 고통, 우리들의 희생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기호 소설가ㆍ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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