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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숙 교수의 문학 속 간호이야기]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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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숙 교수의 문학 속 간호이야기]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

입력
2013.06.1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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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관계에도 불구하고 1년 이내에 임신이 되지 못한 경우 불임으로 정의한다. 심리학자 그레일은 불임을 병적인 상태라기보다는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은희경의 소설 는 불임에 대한 스트레스 상황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적 이상 징후를 통해서 삶의 관계들에 내재하는 아픔을 형상화했다.

"당신, 사실은 아이 포기 안 했죠? 우리는 아이에 관한 화제를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더구나 아내가 제 입으로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불임클리닉에 시간을 잘 맞춰 다녔고 거기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아내가 아이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은 나 자신에게조차 심각하게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인생은 필요한 것을 갖춰 나가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소설은 한 부부가 불임클리닉이 있는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신도시로 이사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내가 불임 때문에 겪었던 불행을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남편은 사회의 규범을 충실히 지켜가며 규격품의 인간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아내는 정반대로 사회의 구조와 동떨어진 생각으로 살고 있다. 아내는 자신이 유전되어서는 안 되는, 도태되어야 할 열성인자를 가졌기 때문에 임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병적인 인식은 상식적이고 갑갑한 일상으로부터 외도의 형태로 일탈하게 만들고, 결국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내는 스스로 적자생존 사회에서 도태될 열등한 종자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인식은 옆집 여자의 마른 개에 투영된다. 그녀는 마른 강아지를 증오하는데, 실은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불임이란 낙인은 자아상실감, 역할 실패, 자아 무시, 부적절성, 열등감, 죄의식을 갖게 한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아내의 상자'에는 그녀를 스쳐 지나간 상처들이 담겨 있다. 그녀는 흉터를 지니듯이 방 귀퉁이에 상자를 쌓아갔다. 남편은 TV 마감 뉴스를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고 증권 시황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시사주간지를 탐독하는 전형적인 소시민형 인물처럼 보인다. 남자의 불임에 대한 대처 방식은 침묵 지키기, 혼자 참기, 비밀스럽게 비통해하기, 법적으로 행동하기, 일에 몰두하기, 습관적으로 무관심하게 행동하기 등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조직사회의 일원으로서 규격에 맞춤꼴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소설에서 남편이 불임의 아내에게 진정성을 가지고 위로하는 부분은 없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내까지도"라고 회상한다. 상자를 열어주기를 기대하는 아내에게 아내는 그냥 편안하고 익숙한 사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탈한 아내를 사물 치우듯이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또 다른 상자를 아내가 열어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은희경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인 '똑바로 바라보기'가 삶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점이다.

황효숙 가천대 외래교수, 간호사ㆍ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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