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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문예 - 소설] 윤지완, '당신의 아름다운 세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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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신춘문예 - 소설] 윤지완, '당신의 아름다운 세탁소'

입력
2012.12.3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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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에서 막 꺼낸 세탁물들에서 옅은 솔벤트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심호흡을 했다. 콧속으로 흡입된 유기용제 냄새가 남자에게 묻어있던 졸음을 단번에 쫓아냈다. 남자는 세탁물이 든 바구니를 들어 행거 옆으로 옮겼다. 바구니 안에 쌓여 있는 옷을 하나씩 끄집어내 허공에 턴 뒤 빠른 손놀림으로 옷걸이에 걸었다. 푸른 실크 블라우스를 제외한 모든 세탁물들이 차례로 행거에 걸렸다. 남자는 출입구 쪽으로 행거를 이동시켰다. 바람이 통하는 입구에 반나절은 세워두어야 직물에 남은 솔벤트를 마저 휘발시켜버릴 수 있었다. 다림질을 하는 것은 그 이후였다.

남자는 스팀다리미 스위치를 켜고 예열을 시작했다. 바구니 안에 남아있던 푸른 실크 블라우스를 집어 들고 블라우스 앞섶과 오른쪽 소매를 면밀하게 살폈다. 얼룩은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는 옷가지를 다리미대 위에 펼치고 벽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시간은 넉넉했다. 블라우스의 주인은 어젯밤 열 시가 다 된 시각에 세탁소를 찾아왔다. 올리브유를 엎질렀어요. 남자는 여자가 건넨 옷가지를 팔뚝에 걸치고 한손으로 펼쳐보았다. 매끄러운 실크 위에 검은 기름얼룩이 커다랗게 져 있었다. 내일 이 옷을 꼭 입어야만 해요. 여자는 울상이었다. 남자는 기름 범벅이 된 블라우스를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잠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클리닝기에 넣어야 할 세탁물이 덜 모인 채로 기기를 돌리면 값비싼 세제 비용 때문에 손해는 좀 보겠지만 남자는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세탁소의 단골 고객이었다.

예열 된 다리미에 불이 들어왔다. 남자는 다리미를 손에 쥐고 스팀 버튼을 눌렀다. 다리미가 쉭쉭 소리를 내며 하얀 증기를 뿜어냈다. 드라이클리닝을 한 옷감은 구김이 많지 않았다. 남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블라우스 소매부터 다리기 시작했다. 들어와 식사해요. 살림방 안쪽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알았다고 짧게 대꾸하고 블라우스를 계속 다려나갔다. 등판을 마저 다린 후 프릴에도 꼼꼼히 스팀을 쏘여주었다. 남자는 다림질을 끝낸 블라우스를 옷걸이에 걸고 소형 선풍기를 그 앞에 가져다 놓았다. 솔벤트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빼내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출구로 걸어가 반쯤 올려놓았던 셔터를 마저 올렸다. 이른 아침의 투명한 햇빛이 세탁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는 출입구의 유리문을 활짝 열어 고정시키고 가게 안쪽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둥근 밥상에 마주앉은 아내와 딸아이는 숟가락을 막 내려놓는 참이었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 아내와 딸 사이에 앉았다. 이부자리는 어느새 말끔하게 개어져 서랍장 위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비좁은 살림방이었다. 아내가 식은 국 대신 따듯한 국을 새로 내왔다. 남자는 밥을 덜어 국에 말았다. 클리닝기를 벌써 돌렸어요? 아내가 딸아이를 앞에 앉혀놓고 머리를 빗기며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국에 만 밥만 묵묵히 퍼먹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딸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가방을 멨다. 그럼 갔다 올게요. 아내가 나갈 채비를 했다. 아내는 스쿠터 뒷자리에 아이를 태워 학교 정문까지 바래다주고 난 뒤 아파트 단지 내를 돌며 세탁물을 수거해올 것이다. 운전 조심해. 남자는 신발을 신는 아내의 등 뒤에 대고 한마디 했다. 남자는 아내가 스쿠터를 타야 할 때마다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내는 남자의 일손을 덜기 위해 일 년 전 원동기 면허를 땄다. 세탁일 뿐만 아니라 수거와 배달까지 남자 혼자 도맡는 것이 아무래도 버거웠다. 아내가 배달과 수거를 돕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이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스쿠터를 탈 수 있게 되면서부터 아내는 더 많은 일감을 끌어왔다. 교차로에 새로 들어선 찜질방의 타월 세탁을 맡게 된 것도 아내 덕분이었다. 아내는 싹싹하고 사교성이 좋았다. 대량의 세탁물 처리가 가능한 설비를 갖췄더라면 가운과 대여복 세탁까지 전부 맡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스쿠터를 탈 때마다 불안했다. 오토바이 사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한 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은 야식 배달을 가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홍을 치고 달아난 가해자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멀어지는 스쿠터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서둘러 밥그릇을 비웠다. 개수대에 빈 식기를 집어넣고 서둘러 가게로 나왔다. 세탁소 안은 환했다. 남자는 롤 블라인드를 내려 볕을 가렸다. 블라인드로 스민 햇빛은 오늘도 무더운 하루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 아직 유월이었지만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가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세탁소 내부는 보일러와 스팀의 열기로 후텁지근했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켜두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남자는 선풍기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블라우스를 살폈다. 옷감에 선명하고 매끄러운 광택이 돌았다. 솔벤트 냄새는 거의 날아가 있었다.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채우고 선반에서 포장 비닐을 꺼냈다. 서로 흡착되어 있는 양면을 손으로 비벼 떼어낸 뒤 재빨리 블라우스 위에 비닐을 씌웠다. 남자는 세탁을 마친 청결한 의류에 바스락거리는 얇은 폴리프로필렌 비닐을 덧씌워 포장하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비닐조차도 구겨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포장을 마치고 나면 남자는 비로소 성취감을 느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한여름의 한증막 같은 세탁소는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자는 이 일만은 아내에게 맡기지 않았다.

남자는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눈을 떴다.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로 나오자마자 보일러 스위치를 켰고, 배관 파이프를 타고 지나가는 스팀 소리를 들으며 바닥과 작업대 위를 청소했다. 드라이클리닝기를 가동하기 전 공회전을 시켜 보일러 내부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빼냈으며, 세탁물을 분류하여 물세탁부터 시작했다. 영업시간이 되기 전에 세탁소 셔터를 올렸고, 아내와 딸아이와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했다.

그 손님이 찾아온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아내는 세탁물을 배달하러 나갔고, 남자 혼자 가게에 남아 건조가 끝난 타월들을 개어 플라스틱 바구니에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리문에 설치한 도어벨이 울렸다. 젊은 여자 하나가 가게 안으로 막 들어오는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조건반사처럼 인사말을 내뱉었다.

세탁소 안으로 들어선 여자는 문 앞에 멈춰 서서 말없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는 천천히 작업대 앞으로 다가왔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짧은 동안 남자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도 고객의 얼굴과 주소지를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남자는 기억력이 좋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낯설었다. 여자는 청약서 뭉치를 들고 종종 찾아오는 보험설계사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두툼한 가방도 없이 민소매 셔츠 차림으로 맨발에 슬리퍼를 꿰신고 다니는 보험설계사가 존재할 리 없었다.

옷을 찾으러 왔어요.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타월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작업대 위에 쌓여있는 타월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남자가 재차 물었다. 맡긴 지 좀 오래됐거든요. 여자는 다른 대답을 했다. 언제 맡기셨지요? 여자는 3년쯤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3년 전이라면 세탁소를 인수한 해였다. 아내가 원동기 면허증을 따기도 전이었고, 회수건조기도 설치하지 못했을 때였다. 당시에는 일거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는 개업 초부터 방문하기 시작한 고객들의 면면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어떤 옷인지를 물었다. 투피스, 아이보리 컬러의 투피스예요. 여자가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여자를 세워두고 의류가 빼곡하게 걸려있는 삼단 행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래 전 맡겨두고 찾아가지 않는 옷이라면 우선 행거의 가장 위쪽 구석부터 훑어보아야 했다.

옷을 맡겨두고 찾으러 오지 않는 고객들이 더러 있었다. 맡겨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계절이 한 바퀴 돌 무렵이면 그 사실을 비로소 기억해내고 뒤늦게 세탁소를 찾아왔다. 일 년이 지나도 찾으러 오지 않는 사람들은 심각한 건망증 환자들이거나 죽은 사람들이었다. 남자는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103동 901호에 살던 노인을 떠올렸다. 노인은 홀로 살고 있었고 한밤중에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남자는 그 소식을 일 년이 지난 뒤에야 전해 들었다. 그 후로도 노인의 캐시미어 코트는 반년이 더 지날 때까지 남자의 세탁소 한 구석에 걸려 있었다. 혹시라도 노인의 가족들이 찾으러 올지 몰랐으므로 함부로 처분해버릴 수 없었다. 누군가 노인 대신 찾으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남자는 포장 비닐에 감싸인 옷을 행거 한쪽에 잘 걸어두었다. 그러나 유품이 되어버린 노인의 코트를 찾으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해 연말, 남자는 코트를 노숙인 복지시설에 기증했다.

남자는 행거에 걸린 옷들을 샅샅이 살폈다. 상아색의 여성 정장 한 벌을 발견하고 장대로 끌어 내렸다. 그건 제 것이 아니에요. 의류 안쪽에 스테이플러로 찍어놓은 태그를 확인하기도 전에 여자가 말했다. 한눈에 보아도 그 옷은 여자의 것이라기에는 사이즈가 지나치게 커 보였다. 다른 한 벌을 더 꺼내보았지만 그것은 상아색이 아니라 흰색이었고 역시 여자의 옷은 아니었다. 없는 것 같은데요. 혼잣말을 하듯 남자는 중얼거렸다. 남자는 행거에 걸린 옷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았지만 여자가 말한 것과 같은 투피스는 발견할 수 없었다. 죄송한데, 뭔가 착각을 하신 게 아닌가요? 남자는 여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이곳에 맡겼어요, 분명히. 여자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3년은 긴 시간이었다. 아마도 기억에 오류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찾아봐도 없네요, 맡긴 게 확실하다면 저 위쪽 어딘가에 걸려있었을 텐데요. 인수증을 갖고 계신가요? 남자가 물었다. 인수증은 없지만 틀림없이 여기 맡겼어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나중에 다시 올 테니까 잘 찾아봐 주세요.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남자는 다시 타월을 개기 시작했다.

며칠 후 여자는 다시 세탁소를 방문했다. 이전과는 달리 정장 차림에 핸드백을 메고 있었다. 퇴근길에 들른 듯 했다. 여자는 핸드백을 열고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남자 앞에 내밀었다. 접힌 종잇조각이었다. 보세요, 이거. 남자는 다리미를 내려놓고 종잇조각을 받아 펼쳤다. 그것은 세탁물 인수보관증이었다.

보관증에 적힌 글자들은 기우뚱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틀림없이 남자 자신의 필체였다. 남자가 직접 써 준 인수보관증이 틀림없었다. 인수일은 3년 전 11월로 기재되어 있었다. 세탁소를 개업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당시만 해도 남자는 인수보관증을 손으로 직접 작성했었다. 영수증 하단에 남자의 세탁소 상호명이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고객 성명란에 '기나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남자는 당혹스러웠다. 여자는 드문 성씨를 갖고 있었다. 이런 이름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보관증에 이런 이름을 적어놓았다면 재차 확인한 후에 기입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갖고 온 증거 앞에서 남자는 자신의 기억 한 조각이 어디쯤에서 누락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남자는 삼단 행거와 천장에 빽빽하게 걸려있는 옷들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장대를 내려놓고 이마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걸 보니 저희 쪽에서 분실한 것 같습니다. 남자는 사과했다. 그리고 규정에 맞춰 보상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언제 구입하신 옷인가요? 남자가 물었지만 여자는 팔짱을 끼고 서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고 있었지만, 딱히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침묵이 길어지자 남자는 초조해졌다. 분실된 옷이 고가의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을까. 남자는 걱정스러웠다. 구입년도가 4년이 지난 의류라면 세탁 비용의 스무 배를 물어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었지만, 4년이 넘지 않았다면 환산경과일수에 따라 구입비용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보상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맡긴 후 2년 이상 찾아가지 않은 세탁물은 업주가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는 해도 동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규정일 뿐이었다. 여자가 팔짱을 풀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테니 다시 한 번 잘 찾아봐주세요, 꼭 찾아야 되는 옷이니까요. 걱정했던 바와는 다른 내용의 말에 남자는 다소 안심했다. 옷은 의외의 장소에 처박혀있을지도 몰랐다. 차근차근 뒤지면 발견될 수도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면 어디로 연락드릴까요? 남자가 물었다. 먼저 연락주실 필요 없어요, 조만간 다시 올 테니까요. 여자는 보관증을 핸드백에 다시 넣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여자는 고개를 틀어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작업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남자는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규칙적으로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물빨래가 끝난 세탁물들이 드럼 세탁조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세탁 완료를 알리는 소리가 울렸지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다른 생각에 골똘히 사로잡혀 있었다.

여자가 보관증을 들고 찾아왔던 그날 저녁, 남자는 세탁물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여자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아내는 양미간을 모으고 3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글쎄, 기억이 날 듯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러네. 꼭 찾아야 하는 옷이라고 했어. 남자가 말했다. 못 찾아도 하는 수 없지, 그렇게 중요한 옷이라면 진작 찾으러 왔어야지.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세탁소 셔터를 내린 뒤, 남자와 아내는 방안에 있는 옷장 서랍과 쌓아둔 상자 안까지 뒤져보았다. 같은 곳을 두세 번 반복해서 살폈다. 여자의 투피스는 세탁소에 없는 것이 확실했다. 어쩌면 주인이 아닌 엉뚱한 사람에게 옷을 내주었거나, 잘못 배달하는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되찾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세탁물 분실사고는 흔한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남자의 세탁소에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넥타이나 스카프 따위의 작은 세탁물들도 모두 철저하게 분류 보관했다가 주인들에게 돌려보냈던 것이다. 3년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개업 직후의 기억을 더듬다가 남자는 홍을 떠올렸다. 그리고 홍의 장례식이 끝난 뒤 세탁소로 자신을 찾아왔던 홍의 여자에 대해서도. 한 달 사이 ㈏愍?배는 팽팽하게 불러 있었다. 해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세탁소 근처의 카페에 마주앉았을 때, 여자는 남자 앞에 홍의 수첩을 내밀었다. 귀퉁이가 해진 검정색 수첩이었다.

뭐하고 있어요, 당신? 방에서 나온 아내가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남자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 돌아간 거 같은데 안 널어요? 아내가 세탁기 쪽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놓고 세탁기 도어를 열었다. 허리를 굽히고 세탁물들을 끄집어내던 남자가 갑자기 벌컥 짜증을 냈다. 왜 그래요? 재봉틀에 앉아 수선할 청바지의 바짓단을 매만지던 아내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뭐야, 이게? 남자는 세탁조에서 꺼낸 빨래들을 아내 쪽에 대고 흔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내는 남편에게로 다가가 세탁물을 받아들었다. 옷감 여기저기에 짙은 얼룩이 져있었다. 초콜릿 얼룩이었다. 아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주머니 확인을 한 거야 만 거야? 남자는 언성을 높였다. 다 확인하고 넣었는데……. 아내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남자는 허둥대는 아내에게서 세탁물을 낚아챘다. 아내는 무안하고 황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이 이렇게 역정을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는 드라이클리닝기의 도어를 열고 세탁기에서 갓 빼낸 옷들을 처넣었다. 거칠게 도어를 닫고 조작부를 세팅했다. 멍청한 것 같으니. 남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달싹여 욕설을 내뱉었다. 세탁을 하기 전에 포켓 점검을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또 저지르다니. 개업 직후에 아내는 비슷한 사고를 친 전력이 있었다. 주머니에 휴지 뭉치가 들어있던 바지를 점검도 하지 않고 넣어버리는 바람에 함께 세탁했던 의류들까지 엉망이 되었던 것이다. 남자와 아내는 수십 점의 의류에 잔뜩 들러붙은 자디잔 휴지조각들을 밤새도록 떼어내야 했다. 여자의 투피스를 분실한 것도 보나마나 아내일 것이다.

남자는 해가 저물 때까지 아내와 말을 섞지 않고 부지런히 손만 놀렸다. 재봉틀 앞에 앉은 아내가 눈치를 살피느라 기웃대는 것을 남자는 모르는 척 했다. 남자가 아내의 말에 대꾸하기 시작한 것은 저녁 밥상에 둘러앉고 나서였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자는 오지 않았다.

그동안 남자는 다림질을 하거나 세탁물을 정리하는 틈틈이 여자가 찾아오면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를 생각했다. 변상할 액수에 대해서도 계산을 해보았다. 분실 의류에 대한 보상은 통상적으로 구입일로부터 경과일수를 따져서 보상가액을 산정하게 되어 있지만 이미 3년 전에 일어난 일이므로 그런 계산법은 무의미했다. 몇 년이나 지난 옷이라면 고가에 고급 소재라 하더라도 옷의 가치는 현격히 낮아진다. 유행도 수시로 뒤바뀌는 세상이었다. 여자가 의류 구입 영수증을 증빙할 수 있다면 몰라도, 세탁비의 스무 배를 보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남자는 생각했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가 되면 다행이지만 여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었다.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하겠다고 나오거나 내용증명 따위를 보내온다면… 갑자기 관자놀이가 지끈거려서 남자는 얼굴을 찡그렸다.

차용증은 없지만 돌려주실 거지요, 맞지요? 홍의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말투에 사투리 억양이 묻어났다. 그 사람 아를 위해서라도 꼭 돌려주셔야 합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남자는 펼쳐진 수첩에서 눈을 떼고 카페 창밖으로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만삭의 여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기껏 굳힌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오토바이 사고로 죽기 한 달 전, 홍은 세탁소 개업 때문에 급전이 필요했던 남자에게 삼천만원을 빌려주었다. 고작 한 달인데 우리 사이에 차용증 따위를 굳이 써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던 것은 남자가 아니라 홍이었다. 수첩에 적힌 기록 같은 것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홍과 여자는 아직 혼인신고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여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자, 남자는 영영 여자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보상해야 할 금액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탁소를 나가기 전 남자를 돌아보았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죄어들었다. 옷을 맡겨놓고 3년이 지나도록 찾으러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날 때까지는 찾으러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기대했다.

여자가 세탁소를 다시 방문한 것은 두 번째 방문이 있은 뒤로 꼭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불볕더위가 한창이었지만 그날 저녁부터는 굵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팀다리미를 들고 와이셔츠를 다리고 있을 때 도어벨이 울렸다. 남자는 입버릇처럼 인사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세탁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들고 있던 다리미를 떨어蔘빰옳杉? 여자는 우산 대신에 빗물로 번들거리는 짙은 감색 우비를 입고 있었다. 여자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찾으셨나요? 여자가 용건만 간단히 하자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비에 젖은 우비의 후드를 벗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아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다리미에서 하얗고 뜨거운 증기가 칙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리미 버튼을 눌러 껐다. 받침대 위에 다리미를 내려놓는 남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남자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옷 한 벌을 분실했을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가슴이 두근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게 안과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에는 찾아낼 수 없었다고 남자는 말했다.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의류 구입가가 얼마였지요?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옷이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그 옷을 찾아야만 해요. 여자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에 맡기신 거라서… 누군가에게 잘못 배달되었다면 이제 와서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남자는 머뭇거리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남자의 말은 거의 애원처럼 들렸다. 불가능하다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어떡해요, 정말로 찾아보시기는 한 건가요? 여자가 재차 물었다. 수도 없이 뒤져보았다고 남자는 대답했다.

아내가 가게로 나온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같은 말을 세 번째로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내는 남편과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남편은 아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누구인가를 비로소 알아차린 아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손님, 저희 쪽 실수이기 때문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규정대로 보상을 해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겠어요. 아내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남자가 이미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보상해달라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돈이 있어도 다시 그 옷을 구할 수는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옷을 꼭 찾아주셔야 해요. 여자는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단념하고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차분한 말투와는 대조적으로 말의 내용은 막무가내였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남자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속이 울렁거렸다. 여자는 옷을 찾으러 온 고객이 아니었다.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나 빨간 딱지를 붙이러 온 집달리처럼 여겨졌다. 남자는 이마를 감싸 쥐고 작업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내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 것을 보고 흠칫했다. 그렇게 중요한 옷이라면 어째서 제때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 아내는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여자의 목소리에도 이제 언짢은 기색이 섞여 있었다. 여자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옷을 제대로 보관하고 있었다면 찾아가라고 전화라도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재봉틀 노루발대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박음질을 하고 있던 아내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내리박히던 재봉틀 바늘이 부러져 튕겨나갔기 때문이었다. 리듬이 흐트러진 탓이라고 아내는 생각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재봉틀이 멎자 세탁소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여유분의 바늘을 찾기 위해 재봉틀 앞에서 일어난 아내는, 다리미를 손에 쥔 채 작업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다리미와 작업대 사이에는 회색 리넨 재킷이 펼쳐져 있었다. 왜 그래요, 당신? 남자는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아내를 돌아보았다. 스팀다리미 물통이 비어있다는 것도 남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그날 이후 남자는 전에 없던 행동을 했다.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아침에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못해 흔들어 깨워야 했다. 밥을 먹다가 국그릇을 엎거나 숟가락을 놓치기도 했다. 건강 검진이라도 받아보자고 아내가 말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내는 남자의 불안한 변화들이 그 여자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내는 끝내 여자가 옷을 단념하도록 만들지 못했다. 여자는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들 부부는 한 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좋아요, 시간을 더 드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찾아보세요. 그 어떤 손님에게도 상냥하고 친절했던 아내의 입에서 기어이 큰 소리가 나왔다. 이봐요, 아가씨. 아무리 시간을 줘도 못 찾는 건 못 찾는 거예요. 여자는 아내의 말을 잘랐다. 제 옷이라면 이러지 않아요, 빌린 옷이라 주인에게 꼭 돌려줘야 한단 말이에요. 여자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폭우 속으로 걸어 나갔다. 남자는 여자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었다. 빌린 거니까 돌려줘야한다… 홍의 여자도 그런 말을 했었다. 남자는 홍의 수첩을 덮어 여자 쪽으로 밀었다. 이런 걸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거예요. 여자가 행여 녹음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 남자는 주의 깊게 말을 골랐다. 분유 값에라도 보태세요. 남자는 백만 원이 든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 이후 홍의 여자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여자가 나간 뒤,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꼼짝 않고 앉아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야. 남자가 힘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아내가 반박했다. 그게 왜 당신 잘못이에요? 한참 전에 맡긴 걸 이제야 찾으러 온 저 여자 잘못이지. 있지도 않은 옷을 도대체 어떻게 찾아내라는 거야? 남자는 세탁물을 분류하기 시작하는 아내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홍에게 빌린 삼천만 원에 대해 아내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아내는 손에 들린 다리미를 빼앗아 받침대에 내려놓고 의자에 남자를 앉혔다. 또 머리 아파요? 아내의 물음에 남자는 힘없이 응, 대답했다. 아내는 진통제를 찾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우울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반쯤 내려둔 롤 블라인드 아래로 정오의 뜨거운 햇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차양막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일어설 기력이 없었다. 남자는 막막한 기분이었다. 여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그들 부부는 정말로 잘 해왔다. 망한 세탁소를 인수하여 단골을 확보하고 만기가 다 되어가는 적금 통장을 세 개나 갖게 된 것은 남자와 아내 모두 부지런하고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세탁소를 시작하고부터 남자는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 본 일이 없었다.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나 울리지도 않은 시계의 알람 버튼을 눌러 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숨 막힐 듯한 폭염이 계속되는 날 세탁소 안에 종일 갇혀있으면서도 남자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불평 따위를 늘어놓을 틈은 없었다. 먹고 살아야 했다. 남자는 책임감 있는 가장, 모범적인 세탁소 주인이 되고자 안간힘을 썼다. 사지육신 멀쩡한 젊은 시절에 수고와 고생을 한 대가로 언젠가는 반드시 남들만큼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날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나날이 착실하게 불어나는 통장의 액수가 그들 부부에게 내일을 낙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내년에는 솔벤트 회수기를 설치하고, 내후년쯤에는 대출을 받아 살림집도 따로 낼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핑크색 도배지로 방을 꾸미고 예쁜 침대를 사주겠다고 남자는 딸아이에게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들이 이제 실현 불가능하거나 헛된 망상처럼 여겨졌다. 고작 한 벌의 옷을 분실했을 뿐인데, 그 한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내가 진통제와 물 컵을 들고 가게로 나왔을 때 남자는 작업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뒤지고 있었다. 뭘 찾아요? 아내가 물었다. 가게 장부들 어디다 뒀지? 남자가 아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3년 전 11월 전후로 옷 맡겼던 사람들, 그 사람들부터 하나씩 조사해봐야겠어. 남자가 작업대 밑에 쌓아둔 물건들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아내의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내는 진통제와 물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남자 곁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없앴잖아, 그거. 컴퓨터 들여오고 난 뒤에 당신이 다 정리해서 버렸잖아요. 아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동작을 멈추었다. 버렸다고, 내가? 기억나지 않았다. 컴퓨터 전산처리 프로그램을 이용해 보관인수증을 발급하기 시작한 것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고작 1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내는 말하는 것인가.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남자는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수시로 아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며칠 째 남자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느릿느릿 가게로 나왔고, 마지못해 다림질을 하다가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를 대신해 셔터를 올리고, 드라이클리닝기를 작동시키고, 세탁물을 정리해 포장하는 것은 아내였다. 스쿠터를 타고 하루에 두 차례씩 세탁물 수거와 배달을 하러 다녔던 아내는 이제 한 번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배달은 끊임없이 밀렸고, 누적된 피로 탓에 아내의 눈가는 거뭇해졌다.

저물녘이 되면 남자는 옷들이 걸려있는 천장과 행거를 헤집었다. 소용없다고 아내가 말렸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남편은 옷을 맡기기 위해 세탁소를 찾아온 손님들을 위아래로 유심히 훑어보며 물었다. 혹시 맡기지 않은 옷을 찾아간 적 없습니까? 그런 일이 없었다는 답변을 듣고도 남자는 취조하듯 집요하?캐물었다. 없다고 했잖아요, 지금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아파트 부녀회장인 302호 여자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내는 들고 왔던 옷을 도로 들고 나가버린 302호 여자를 쫓아가 남편 대신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302호 여자는 두 번 다시 세탁소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업소 평판이 나빠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날 밤 남자와 아내는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아내는 제발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집기와 옷들을 바닥에 팽개쳤다. 철제 옷걸이의 뾰족한 부분이 아내의 종아리를 할퀴고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세탁소 안을 서성대다가 아내를 향해 돌아섰다. 어디에 숨겼어? 한껏 낮춘 목소리로 남자가 물었다. 아내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숨기다니, 무엇을? 남자가 아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아내는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 옷 당신이 숨긴 거 아냐? 아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해 봐, 혹시 누구 만날 때 입으려고 감춰둔 거야? 충격을 받은 아내는 말을 더듬었다. 온종일 가게에 당신이랑 붙어 있는 내가 만나길 누구를 만나요? 아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언제 온종일 나랑 가게에 붙어 있었어? 스쿠터 타고 항상 나돌아 다니잖아. 아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방 안에서 어린 딸아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으면 남자는 전날 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을 아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면 세탁소 구석구석을 뒤지다가 다시 아내를 추궁했다. 세탁물 배달을 받지 못한 고객들이 걸어온 전화에다 대고 시비를 걸었고,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자기도 했다. 아내는 스쿠터를 타고 배달과 수거를 하러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 아이는 데려다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학교에 갔다. 정상적인 영업은 불가능했다. 늦은 밤 셔터를 내리고 돌아서면서 아내는 생각했다. 저기 앉아있는 저 남자는 누굴까.

새벽 6시, 자명종 울리는 소리에 아내는 눈을 떴다. 알람을 끄고 보니 이부자리 위에 남편이 없었다. 아내는 딸아이가 걷어찬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급히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내가 본 것은 반쯤 올라가 있는 셔터였다. 어딜 간 걸까. 아내는 망설이다가 남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 벨소리는 방에서 들려왔다. 남편이 갔을 만한 곳이 짐작되지 않았다. 밤 9시가 넘어서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아내는 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뒤졌다. 남자의 옷과 소지품, 세 개의 적금통장과 인감도장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사라진 것은 남자뿐이었다. 아내는 서랍장 위에 개어둔 이불을 펼쳐서 하나씩 털어보았다. 혹시 남자가 적어놓은 쪽지 같은 것이라도 발견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무 것도 없었다. 사흘이 지나도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경찰서로 가서 실종 신고를 했다. 남자는 마치 솔벤트처럼 대기 중으로 휘발되어 버린 듯 했다. 여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사라진 남자도,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간 여자도, 세탁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세탁기와 드라이클리닝기가 나란히 돌아가고 있었다. 익숙한 소음으로 가득한 세탁소 안에 아내 홀로 앉아 있었다. 코트 수선을 맡기기 위해 오전 중 노인이 한 명 다녀간 이후 아무도 세탁소를 방문하지 않았다. 아내는 날카로운 재단 가위를 들고 초크로 표시해놓은 선을 따라 모직코트의 밑단을 잘라냈다. 잘라낸 밑단에 오버로크를 치고 시접을 넣어 다린 뒤 커버스티치로 마무리했다.

모직 코트의 수선을 끝낸 후 아내는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한 시간 후면 학원에 간 딸아이가 돌아올 것이다. 그 전에 세탁물 배달을 끝내야 했다. 아내는 포장 비닐로 감싼 옷들을 운송용 바구니에 넣어 가게 밖으로 나왔다. 스쿠터 뒤에 바구니를 고정시키고 세탁소 문을 잠갔다.

아내는 코트 두 벌을 들고 오피스텔 건물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10층에 오래 머물러있던 엘리베이터가 더딘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멎고 문이 열렸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 여자가 내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던 아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내린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무엇을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아내는 여자를 쫓아갔다. 팔뚝을 잡아 돌려세웠을 때, 여자는 추행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다시 온다더니 왜 안 왔어요? 아내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앞뒤를 자른 아내의 질문에 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보리색 투피스, 찾으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제야 여자는 아내를 알아보고 표정을 풀었다. 아, 하고 여자는 입을 열었다. 전화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바빠서 깜박 잊고 있었네요. 여자는 조금 곤혹스러워하면서 덧붙였다. 죄송해요, 그 옷은 다른 곳에서 찾았어요. 보관증이 저한테 남아있던 바람에 세탁소에서 찾아오지 않은 줄로만 알았지 뭐예요. 여자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피스텔 출입구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아내는 오피스텔 로비 유리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코트를 감싼 얇은 폴리프로필렌 포장 비닐이 아내의 팔 안에서 희미하게 바스락 소리를 냈다.

인터뷰

"첫 소설의 상처로 밀고 온듯"

"신춘문예 당선됐다고 하니, 대학원 선배가 물어보데요. 혹시 한국일보 아니냐고. 며칠 전 제가 한국일보로 등단하는 꿈 꿨다고."

2002년부터 10년간 신춘문예에 투고해온 당선자 윤지완(40ㆍ본명 윤선영)씨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윤씨는 "대선에서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때 당선통보 전화를 받아 그냥 어리둥절했다"며"너무 나이가 들어버려 그런지 10년 전에 전화를 받았다면 매우 기뻤을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학창시절 만화가를 꿈꿨던 윤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만화가의 문하에 들어갔지만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나와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책 읽기가 유일한 취미라 글을 잘 읽고 싶어"들어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는 시를 주로 썼다. 황병승, 강성은 등 2000년대 국내 시단에서 화제를 일으킨 시인들이 동기동창들이다.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처음 써본 단편소설이 교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한데 누군가 윤씨의 이 작품을 제목만 바꿔 모 식품회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에 투고해 당선이 됐단다. 몇 달 후 이 사실이 밝혀져 당선은 취소됐지만, 수상 작품집은 그 도용자의 이름을 달고 출간됐다.

상처를 받았지만 가능성을 발견한 윤 씨는 졸업 후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도 박기동 작가가 운영하는 합평 모임에 참석하며 일년에 2, 3편씩 소설을 써왔다. 하성란, 강영숙, 윤성희 등 어느덧 중견이 된 소설가들이 이 모임에서 배출한 문인들이다. 신춘문예 심사위원 중 대학 스승, 동기, 선후배가 많은 탓에 2년 전부터 필명으로 투고해왔다.

"한동안 소설을 안 써보려고 다른 일에 몰두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게임 중독에 빠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게 두렵더라고요. 그래서 3년 전 대학원에 들어갔죠." 윤씨는 투고를 시작한 해부터 기른 고양이'지완'을 필명으로 삼은 2년 전부터 각종 공모전 최종심 후보에 많이 거론됐다며 멋쩍게 웃었다.

"철들고 유일하게 꾸준히 했던 일이 소설쓰기에요. 많이 쓰지 못하지만 진득하게 쓰겠습니다."

▦ 1972년 서울출생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중

당선소감

"글쓰기만이 유일하게 버틴 일"

여태까지의 내 삶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미미하도다'. 더 짧게 줄일 수도 있다. '용두사미' 혹은 '작심삼일'.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을 시작하든 끝까지 해낸 적도 없다. 인내와 끈기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게 생겨먹은 내가 십여 년간 지속해온 유일한 일은 소설쓰기밖에 없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지,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달변가가 될 수 있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더러 하기는 했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써왔는가 묻는다면 역시 부끄럽지만, 평생 달변가는 될 수 없을 것이므로 글쓰기도 지속될 것이다, 아마도. 글쓰기가 나를 조금쯤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호명하지는 않기로 한다. 다만, 먼 길을 오랫동안 나와 함께 걸어주신 박기동 선생님께는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마지막으로, 십여 년 전 나의 첫 번째 소설을 도용해 잠시나마 당선의 기쁨을 맛보았을 생면부지의 당신에게도 비로소 고마움을 전한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여기까지 걸어오게도 만들었을 것이다.

심사평

"과거가 현재에 부과하는 윤리적 모티프의 강렬함에 끌렸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9편의 응모작들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끈 작품은 네 편이었다.'카미고치에서의 하룻밤'은 아내의 유품을 찾으러 일본에 간 주인공이 얻게 된 삶에 대한 성찰과 아들과의 화해의 과정을 섬세한 문장에 잘 담아냈다. '루어 낚시꾼'은 미완일 수밖에 없는 일탈에의 꿈을 한 낚시꾼을 통해 보여주는데 허황된 캐릭터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쓸쓸한 정조가 작품 전체에 잘 녹아들어 있다. '원 포인트'는 일제 시대 경성을 배경으로 삶의 조건에 얽매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좌절과 허무,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한 판의 탁구 경기를 통해 보여준다. 서로를 알아보는 두 인물의 심리가 아름답게 그려졌고, 거침없는 서술과 긴장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다.'당신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오래 전에 맡긴 옷을 찾으러 온 고객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과거의 어떤 기억 때문에 전락해가는 세탁소 남자의 이야기를 차분한 문장에 담아냈는데, 디테일이 충분하고 심리의 포착도 믿을만하고 주제도 잘 구현되었다.

우리는 각 작품이 가진 매력과 아쉬운 점에 대해 충분히 의견을 교환했다. 그 과정에서 '카미코치에서의 하룻밤'은 수기를 연상시키는 단조로움과 소품이라는 인상이, '루어 낚시꾼'은 긴장감이 떨어지는 문장과 예측 가능한 스토리 전개가, '원 포인트'는 만화적 발상과 군데군데 보이는 추상적 표현들이, '당신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주제 부각을 위해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자연스러움과 다소 실망스런 마무리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우리는 '원 포인트'와 '당신의 아름다움 세탁소'사이에서 고민했다. '당신의 아름다운 세탁소'가 당선작이 된 것은 무엇보다 과거의 채권자가 현재의 인물에게 부과하는, 저 카뮈의 소설 '전락'을 연상시키는 윤리적 모티프의 강렬함 때문이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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