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요한 하위징아 지음ㆍ이종인 옮김/연암서가 발행ㆍ776쪽ㆍ3만원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1872~1945)가 쓴, 서양 중세 문화사 연구의 고전이다. <호모 루덴스> 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1919년 처음 나왔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필독서로 통한다. 한국어로는 1988년과 2010년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나, 번역이 매끄럽지 않거나 내용이 더러 빠졌다. 이번에 나온 것은 하위징아가 직접 손질한 1921년 수정 2판의 영역본을 옮겼다. 네덜란드어 원서는 개정 5판까지 있는데, 1921년의 수정 2판이 정본으로 통한다. 호모>
'중세의 가을'이라는 제목은 서양 중세 1000년의 끝자락인 14, 15세기를 가리킨다. 중세가 전성기를 지나 저물어가던 이 시기를, 조락의 계절이면서 동시에 수확의 계절인 가을에 비유한 것이다. 중세를 역사의 암흑기로 보던 당시 통념과 달리, 하위징아는 거기서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중세의 어둠을 걷어낸 르네상스도 실은 중세의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씨앗은 중세 후기 문화에서 싹 튼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알다시피 서양 중세는 봉건제와 로마가톨릭 교회가 지배한 시대다. 교회는 금욕을 강조해 세속적 쾌락을 죄악시했다. 우울하고 칙칙할 것만 같은 그런 환경에서도, 중세인의 삶은 치열하고 다채로웠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중세인들도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고, 이를 위해 "삶을 화려한 색깔로 채색하고 빛나는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이데아의 황홀 속에서 현실의 가혹함을 망각"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중세는 '대조'의 시대다. 빈자와 부자, 도시와 시골, 빛과 어둠 같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들이 공존했고, 중세인들은 정서적으로 양극단을 오갔다. 경건한 신앙과 신성모독, 고상한 의전과 야비한 난장, 감상적인 동정과 잔인한 형벌, 엄숙한 도덕과 무절제한 방탕이 순식간에 서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는 일상의 긴장에 중세인들은 무절제한 열정과 변덕스러움으로 대응했다. 덕분에 "중세의 생활은 너무나 강렬하고 다채로웠기 때문에 피 냄새와 장미 냄새의 뒤섞임을 견딜 수 있었다."
한국의 일반 독자에게 서양 중세는 매우 낯설다. 중세인의 삶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이 책은 서양 중세인의 정신세계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중세의 풍경을 생생하게 체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격절감에도 불구하고, 하위징아의 문학적 글쓰기를 따라가는 즐거움은 각별하다. 옮긴이는 책에 나오는 주요 인물과 용어 풀이를 따로 붙이고, 작품 해설도 써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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