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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23> 유하 '말죽거리 잔혹사'의 양재역 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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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23> 유하 '말죽거리 잔혹사'의 양재역 사거리

입력
2012.07.0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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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도시화 소용돌이속 수컷의 거친 본능이 분출하던…

파란 불이 켜지자마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자동차들이 내달렸다. 사람들은 아스팔트 위로 내리 꽂히는 6월 중순의 태양에 얼굴을 살짝 구기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무심한 표정이 도로 위 자동차를 닮았다. 양재전화국 사거리 너머 보이는 위압적인 고층 주상복합이 이 거리의 성격을 웅변하는 듯했다. 대한민국의 부가 응축된 곳 중 하나이면서도 따분함이 가득한 곳, 양재역 사거리는 21세기 한반도 남부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양재역 사거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말죽거리로 즐겨 불렸다. 선하고 어질다는 뜻을 지닌 양재(良才)라는 이름의 근원은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사람들은 말죽거리를 더 많이 입에 올렸다. 아스팔트가 흙 길을 덮치고, 고층빌딩이 경쟁하듯 들어서고, 지하철이 땅 아래를 질주하면서 말죽거리는 금세 잊혀져 갔다. 지방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자신이 타던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은 데서 이름이 생겼든, 조선 인조가 말 위에서 팥죽을 먹어서 연유한 지명이든 '말죽'이란 군내 나는 호칭을 부동산 1번지 강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는 양재역 사거리가 강남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기 이전, 소 똥 냄새가 자동차 매연을 압도하던 말죽거리의 마지막 시절을 그린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청춘의 질풍노도는 지명마저 순식간에 지워버린 혼란의 그 시절을 배경으로 공명을 더한다.

근대화ㆍ도시화의 욕망, 수컷을 깨우다

시인 겸 영화감독 유하는 말죽거리의 최후를 목도한 세대다. 그가 지켜본 말죽거리의 마지막은 그의 학창시절을 삶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었다. 폭력으로 얼룩졌으나 우정이 있었고 첫사랑이 있었던 낭만의 그 시절은 악몽과 추억이란 이율배반적인 단어들이 엉키며 그의 뇌리를 오래도록 사로잡았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평탄하지 않았던 유 감독 청춘의 보고서다.

유 감독의 강남 생활은 답십리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오면서 시작됐다. 당시 강남은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대문 주변에서 머뭇거리던 서울은 한강 이남으로 급속히 몸집을 늘렸고, 땅값은 들썩였다. 압구정동에 첨단으로 불리던 H아파트가 들어섰고, 복부인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중동에서 들어온 오일달러는 강남 개발을 부채질했다. "땅값이 앞으로 엄청 오르리란 생각"에 말죽거리로 이사를 온 '말죽거리의 잔혹사'의 현수(권상우)네는 새로운 이재의 수단인 부동산에 일찌감치 눈을 뜬 강북 중산층 가정 중 하나였다.

영화 속 시공간인 1978년 강남(당시 지명은 영동)은 혼돈에 휩싸여 있었다. 복부인들이 활개를 치는 한편 평생 논밭을 일구던 원주민들 일부도 돈벼락을 맞았다. 근대화를 상징하는 새 아파트 길 건너 편에선 촌부가 여전히 소로 쟁기질을 했고, 거리엔 코스모스가 한들거렸다. 막 들어선 2층 양옥집에서 창문을 열면 들판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이 보였고, 여름엔 메뚜기 천지였다. 유 감독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떠나온 고향 전북 고창의 작은 마을 하나대의 풍경을 강남에서 발견했다.

"(양재역 주변을 가리키며) 여기 주변이 다 밭이었죠. 한강변엔 물새 알이 있던 때죠. 압구정동에 배꽃이 아직 멋들어지게 피던 시절이고요. 저는 당시 역삼동에 살고 있었는데 동네 스피커로 김창완의 노래 '아니 벌써'를 들으며 말죽거리 인근 학교까지 걸어서 등교하기도 했어요. 그 시절 강남은 농경사회가 산업사회에 밀려 몰락하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줬어요. 자연스레 제 고향의 쓰러져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 시집 에 압구정동과 고향이 함께 다뤄졌던 이유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다 역사 속 이야기일 뿐입니다."(유하 감독)

급격한 도시화와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논과 밭에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이 돈을 앞세운 중산층에게 밀려나면서 말죽거리엔 긴장감이 팽배했다. 원주민들은 개발 붐에 밀려 말죽거리의 변두리인 세곡동쪽 옮겨갔고, 그들의 상실감은 아이들의 폭력성을 통해 나타났다.

삶의 터전이 급속한 사회 변동에 뒤흔들리면서 예민한 청춘의 감성도 동요했다. 주먹이 주먹을 부르는 폭력의 연쇄고리가 서울 그 어느 곳보다 말죽거리 인근 청춘들을 옥죄는 형국이었다. 자본의 욕망을 에너지로 세력 확장을 해나가던 도시화와 근대화가 수컷들의 본능을 자극했던 것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 음악을 신청하던 여성스러운 현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싸우기 싫어… 해본 적도 없고"라며 말꼬리를 감추곤 하던 그도 쌍절곤을 휘두르며 학교 옥상을 피로 물들이게 된다.

끝나지 않은 외침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고 해"

시골에서 도시로 급변하던 지역적 특수성에 군사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라는 당대의 보편적 상황이 겹쳐지면서 말죽거리 까까머리들의 폭력성은 증폭된다. 현수가 다니던 정문고 교문 상단을 장식한 구호 '구국의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와 동급생 선도부원에게 '충성'을 외치며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 등은 억압적 사회 현실을 은유한다.

당연하게도 학교는 학생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지 못했다. 되레 외부와 담장을 높게 쌓으며 학생들의 폭력성을 부추겼다. 군 장성의 아들이 폭행을 당하고 업혀 나가자 화를 참지 못한 교장이 담당 교사의 뺨을 다짜고짜 때리며 던지는 한마디는 폭력에 물든 교정의 실상을 함축한다. "이게 깡패지 학생이야?"

"비포장도로에 유일하게 다니던 288번 버스에서 남학생끼리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어요. 제 경우 말죽거리 사거리에서 '자연보호' 푯말에 얻어 맞아 머리가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주변에선 항상 저에게 남성성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자신을 방어해야 하니 자연스레 폭력적이 되고 일탈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아마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으면 제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유하 감독)

말죽거리의 특수성은 학교 안을 더욱 숨막히게 했다. 영화 속 모델이 된 S고교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원래 중산층이 몰려 들면서 연합고사를 치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었던 S고교에도 우수 중학생들이 배정됐고, 재학생을 일류 대학에 대거 진학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교사들을 짓눌렸다. 교사들은 될 성 부른 학생들에 전력을 다했고, 공부와 거리가 먼 학생들은 잉여인간이 되어 학교와 주변을 떠돌았다. 유 감독은 "야구 방망이로 때리면서 공부를 시키던 때였다. 공부하는 학생과 안 하는 학생에 대한 대우의 차이가 아주 심했다"고 되돌아 본다.

영화는 폭력에 분연히 폭력으로 맞선 현수의 한마디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학교를 대신해 학생들을 억압하던 선도부원들을 제압한 뒤 그가 외치는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고 해"는 유감스럽게도 시대를 관통하는 명대사다.

"현수의 그런 모습이 과거의 한 풍경이 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개봉 당시 인터뷰 할 때 '교육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심한 듯해요. 요즘 애들은 또 어찌나 극악스러운지… 저희 때는 작정하고 누구를 왕따 시키거나 하진 않았거든요."(유하 감독)

지옥 같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청춘에 대한 송가

진저리처지는 폭력으로 스크린은 얼룩지지만 관객들은 '잔혹'을 자처하는 영화에서 시대의 낭만을 읽는다. 지나고 나면 어떤 과거든 낭만으로 채색되고 아름답다고 인식되기 마련일까. 창문으로 버스를 올라타거나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남학생들의 짓궂은 행태, 홍콩 가수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과 브라질 가수 모리스 알버트의 'Feeling' 등은 어쩔 수 없이 386세대의 추억을 호출한다. 식용유를 들이킨 듯 느끼한 목소리로 음악을 전하던 신당동 떡볶이집의 DJ, 가발 쓴 고교생들이 즐겨 찾던 고고장 풍경 등도 검은 교복과 교모로 10대 후반을 소진했던 대중들에게 과거를 들추게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특정 연령대의 감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론 완성을 이루었으나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청춘의 떨림을 묘사하며 대중들의 공감대를 넓힌다. 버스 안에서 마주친 어여쁜 여고생과 청순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뭇 남성들이 한때나마 품는 판타지다. 분식집 아주머니와 잠자리를 갖게 되는 현수의 사연은 전국 여느 고교 주변을 떠도는 여러 성적(性的) 괴담들과 뿌리를 함께 한다. 폭력 속에서도 우정을 모색하고, 첫사랑을 좇는 주인공 현수의 순정에도 관객들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지옥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답다고 언젠가 제가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학창시절이 정말 지옥이었지만 그때가 또 청춘이었으니까 그리워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은 제가 직접 골랐는데 소풍 가서 부르던 노래에요. '말죽거리잔혹사' 상영이 끝난 뒤 진추하가 내한공연 했는데, 저는 초청 받고도 안 갔어요. 환상이 깨질까 봐요. 추억은 그런 것 아닌가요?"(유하 감독)

■ 유하 "고교시절 불쾌했던 기억 잊게 해준, 살풀이 같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311만 관객을 모으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동명 시집을 밑그림으로 만든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간다'로 1993년 데뷔식을 치른 유하 감독은 처음으로 흥행의 단맛을 봤다. 상업적 능력을 인정 받은 유 감독은 '비열한 거리'(2006)와 '쌍화점'(2008), '하울링'(2012)을 잇달아 만들며 충무로의 중견으로 자리를 잡았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감독 유하'의 디딤돌 역할을 한 셈이다.

유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그의 이력을 넘어선 "살풀이 같은" 작품으로 여긴다. 중년이 되어서도 악몽으로 나타났던 고교 시절의 불쾌한 기억들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든 뒤 망각의 강을 건넜다. 유 감독은 "상업영화를 만들었는데 뜻하지 않게 내겐 치유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감독이든 한번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드는 영화가 한편씩 있는데 내겐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런 영화"라고도 했다.

대중들의 반응도 좋았고, 평단으로부터도 꽤 후한 점수를 받았으나 '말죽거리 잔혹사'의 제작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품행제로' 등 관객의 추억을 자극하는 학원물들은 이미 철 지난 유행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제작자의 강한 반대에도 유 감독은 "너무나 만들고 싶은 마음"에 '말죽거리 잔혹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1년 넘게 영화 제작은 제자리 걸음이었고, 유 감독은 통음으로 공전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유 감독은 "우리 고교시절 '진짜 진짜 좋아해'나 '얄개' 같은 영화가 유행했는데 당시 학교 생활을 제대로 못 보여줬다. 난 그 시절을 정확히 보여주는 게 창작자의 책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흥행성 강한 스타 배우를 잡는 게 결국 유일한 해답이었다. 유 감독은 당시 청춘 스타로 떠오르던 권상우를 세 번 설득한 끝에 극적으로 캐스팅에 성공했다. 유 감독은 "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에 출연한 권상우가 학원물이라 처음에 거부했는데 리샤오룽(李小龍)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듯하다"고 회고했다.

권상우가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잡게 되면서 액션 장면은 더욱 화려하게 꾸미게 됐다. 현수가 쌍절곤을 휘두르며 8명과 맞서는 옥상 장면은 권상우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만들어졌다. 유 감독은 "당초 시나리오는 현수가 선도부장의 뒤통수만 때리는 내용이었는데 권상우가 너무 단순하다고 해 바뀌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가 개봉한 뒤 "현실과 다르게 지나치게 폭력적이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유 감독의 동창 등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실제보다 너무나 순화시켜 그렸다"는 것. 유 감독은 "한 선생님이 전화를 해 학교의 구체적인 비리 등을 다루지 않았다는 말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유 감독이 겪은 말죽거리의 고교시절이 얼마나 유난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에피소드들이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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