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은 여러 모로 눈길을 끈다. 그 동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내외 소송에서 일본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한 것만도 역사적이다. 나아가 그 동안 국내법원의 적극적 판단을 가로막아온 '일본법원 판결의 기판력', '청구권 협정의 적용 범위', '소멸시효 완성' 등의 법리를 하나하나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그제 대법원은 이근목(86)씨 등 5인과 여운택(89)씨 등 4인이 신닛테쓰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각각 제기한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에 대한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의 패소 판결을 파기해 원심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제헌 헌법과 현행 헌법 전문에 근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불법적 강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사인식을 분명히 함으로써 원심이 인정한 일본 판결의 기판력을 배제했다.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한 판결 이유를 일부 담아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가치와 정면충돌하는 일본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1965년 청구권협정의 기본 성격이나 협상 경과에 비추어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즉 청구권협정의 효력을 확대 해석하더라도 기껏해야 국민이 일본에서 청구권을 행사할 때 국가가 행하는 외교적 보호권의 포기일 수는 있어도,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소멸시효 진행의 중단에 대한 판단도 주목된다. 재판부는 65년 국교수립까지의 외교 단절,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해결됐다는 국내의 일반적 분위기, 강제동원 당시의 옛 기업과 현재 기업의 피고 동일성에 의문을 부른 일본의 법적 조치 등을 들어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존재했다고 보았다.
주심인 김능환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이라고 밝힌 데서도 보듯, 이번 판결은 재판부의 '역사 의지'를 반영한 곳이 여럿이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사법부의 자세 변화도 뚜렷이 확인할 만하다. 다만 바로 그 때문에 역사적 판결이 상징성에 그칠 우려도 남는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의 반응도 떨떠름하다. 전문가들 사이의 법리 논쟁 움직임도 있다. 그만큼 원고들의 손해배상 등 청구가 최종 실현되기까지 넘어야 고비가 많아 사회의 따스한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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