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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1> 울릉도에 둥지 튼 이장희·조원익의 노래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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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1> 울릉도에 둥지 튼 이장희·조원익의 노래와 삶

입력
2011.03.23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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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위로 피어나는 '동방의 빛'… 어른아이들의 꿈도 다시 피어난다

울릉도 북쪽 평리엔 높이 350m의 석봉이 하나 우뚝 솟아 있다. 동네에서는 ‘남근 바위’라고 하는 석봉이다. 산 허리 가운데에서 바위가 뾰족 솟아오른 탓이다. 그 바로 옆 약 4만6,280㎡의 너른 들에 가수 이장희(64)가 산다. 파란 집(132㎡)을 지어 ‘울릉 천국’이라 이름 붙이고 12년째 살고 있다. 이 천국에 있는 건 남자와 악기, 그리고 노래다. 1970년대 음악의 동지였던 베이시스트 조원익(64)이 3년째 동거 중이다. 집안 거실에는 클래식 기타와 스피커, 전자 건반, 편곡 기계, 악보 등이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 겨울 울릉도에 눈이 허리만큼이나 쌓였을 때 이장희는 조원익과 집안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곤 했다. 들어 주는 이는 없었지만 이장희는 “노래면 충분한데, 뭘”이라고 했다.

20일 강릉항에서 난생 처음 큰 배를 탔다. 그리곤 인간을 압도하는 엄청난 크기의 바다. 신비로웠다. 3시간쯤 바다에 취해 있으니 벌써 울릉도 저동항이었다. 지중해 어떤 항구를 떠올리게 하는 곱디 고운 항구였다. 여기서 다시 차로 1시간을 달려 평리에 닿았다. 저동항 북쪽에 위치해 울릉도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이장희는 80년대 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로 국민 가수가 됐다. 하지만 이후 홀연히 음악 활동을 그만두더니 80년대 중반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를 세웠다. 그러다 2003년에는 자신이 피땀 흘려 키운 방송국 대표마저도 그만두고 아예 울릉도에 둥지를 틀었다. 누군가가 들으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싶으련만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울릉도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었다”는 말뿐이다.

집 창밖 하늘은 어두웠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있었다. 북쪽 시베리아에서 울릉도로 불어닥치는 샛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 이장희는 “이런 날은 술이 그립지 않냐”며 와인 몇 병을 꺼내 들었다. 옆방에 있던 조원익과 강근식(65)이 술 냄새를 맡았는지 거실로 미적미적 들어오더니 자리를 잡았다. 70년대 이장희와 밴드 동방의빛으로 활동하며 젊은 날을 함께 했던 이들이다. 빈 술병이 쌓여 갈수록 울릉도의 밤도 깊어 갔다.

“우리 집 앞 우물가 근처에 한 할머니가 살았어. 내가 만날 졸래졸래 쫓아다녔거든.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별로 슬프지 않은 거야. 그때는 그게 그냥 이상했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나니까 무서운 거야.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인생이 뭐가 남는 게 아니구나.’ 그런 거 말이야. 방송국을 접을 때도 그런 생각이 나더라고.”

술기운에 얼굴이 붉게 물든 이장희가 방송국을 끊어 낸 속마음을 조금 더 털어놨다. “일생에서 아주 조금 명예나 부를 가져 봤어. 그런데 그 성취감이 한 2, 3초면 사르르 없어지는 거야. 그게 한 30분이라도 막 감동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명예란 게 남이 보는 건데 그건 정말 허망한 거거든.”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 뒤도 안 돌아보고 선택한 게 바로 울릉도행이었다.

이장희의 뜻에 100% 동의한 조원익도 서울에서 하던 일을 다 접고 3년 전 이곳에 둥지를 내렸다. “장희 따라 이곳에 왔는데 너무 좋아 아예 주민등록지를 이곳으로 옮겼어. 지난 3년 간 울릉도 밖을 나간 적이 없어.” 그에게도 울릉도가 고향이 된 것이다. 그는 현재 울릉도 천부초교에서 아이들에게 기타 리코더 플롯 등을 가리키고 있다. “우연히 이 동네 사람들하고 술 먹고 노래방에 갔는데 초등생들을 가르쳐 보라고 하잖아. 정말 하고 싶더라고. 지금는 1주일에 두 번씩 45명을 가르치고 있는데 올해는 분교 학생들도 가르치려고.”

이장희는 친구의 뜻을 돕기 위해 콜텍문화재단의 대표로 있는 강근식과 뜻을 합쳤다. 기타 25대를 기증받아 학교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이장희는 “울릉도에서도 세계적 음악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어. 좀 있으면 집 앞 연못가에 야외무대를 만들어서 아이들이 공연도 할 수 있게 하고 싶어”라고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동방의빛으로 뭉쳤던 이들이 황혼이 돼 다시 동쪽 끄트머리 울릉도에서 음악으로 새로운 동방의빛을 키워 내고 있었다.

동방의빛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강근식은 이장희와의 첫 만남이 아직도 뚜렸하다. “홍익대 다닐 때 DJ 이상벽이 음악 하는 사람이라며 장희를 소개해 줬어. 나를 보고 하는 첫 마디가 ‘돈 있냐. 짜장면 먹자’였어.” 당시 강근식은 이촌동에 살고, 이장희는 석관동에 살았는데 이후 서로의 집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 음악에만 빠져 살았다. 결국 이장희는 첫 음반인 ‘그대와 나랑은’을 강근식과 녹음했다. 강근식은 기타리스트들의 영웅으로 통할 만큼 뛰어난 연주 실력을 자랑한다. 얼마 전 방송 ‘놀러 와’에 이장희와 함께 나가 멋진 기타 연주를 선보였다. 이장희는 “근식이가 대학 시절 재즈 페스티벌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실력파”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뗄坪痼?하늘이 낸 일꾼이다. 이장희와 함께 매일 집 앞 들판에 꽃을 심거나 잔디밭을 만들거나 돌길을 내는데 지친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저 이렇게 나무나 꽃을 가꾸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잘 몰라. 실직자에게는 참 좋은 거지. 봄에는 튤립, 여름에는 캘리포니아종인 와일드플라워,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국화가 피는데 예술이지.” 이장희는 아예 포크레인을 빌려와 연못을 파고, 산길로 향하는 작은 산책길을 냈다. 길을 따라 산으로 5분만 올라가면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인다. 이장희는 “여기 이렇게 마당에 앉아 있으면 동해 한 가운데에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낭만에 푹 젖어. 미국 알래스카까지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이만한 풍광을 가진 곳을 보지 못했어”라며 자기 집 자랑에 여념이 없다.

그의 집 앞에는 배나무와 벗꽃나무가 딱 한 그루씩 있다. 그는 그곳에 1m가 조금 넘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마당에 앉아 가만히 바람이 빚어내는 신비의 음향을 들으면 온 마음의 평온해.”

하지만 최근 그의 삶에도 조금 변화가 생겼다. 얼마 전 방송에 출연해 유명세를 타면서 울릉도를 찾는 방문객들이 이장희의 집을 관광지처럼 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자고 있으면 누군가가 창문을 벌컥벌컥 열어서 깜짝 놀라. 사람의 온정으로 온다는 건 알지만 나한테 이런 건 재앙에 가까운 일이지.” 요즘 편지도 많이 오는데 이것도 그에게는 골칫거리다. “편지 중 4분의 1 정도가 채무계약서를 보내서 이것 좀 갚아 달라고 하는 거야. 내가 울릉도에 산다고 해서 부자는 아닌데.”

21일 오전 11시께 천부초교에서 기타 증정식이 열렸다. 이장희 조원익 강근식 세 사람이 몇 달 전부터 준비해 온 행사였다. 강근식도 이 때문에 울릉도에 온 것이다.

어느새 학교 강당 1층에는 학부형들과 함께 온 초등생 20여명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조원익이 제자 안지원(15)양이 먼저 나서더니 스페인 민요 ‘말라게니아’를 기타로 쳤다. 이어 12명의 학생들이 6명씩 두 줄로 강당 앞에 서더니 리코더로 ‘작은별 변주곡’과 ‘도레미송’을 연주했다. 서툰 실력이었지만 리코더 위에서 조그만 손들이 움직일 때마다 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조원익은 아이들을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떼지 못했다. 아이들 연주가 끝나자 강근식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기타로 연주하며 답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나의 마음 상태, 나의 꿈 같은 것들을 음악에 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담는 곡도 만들고 싶은데 올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원년이 됐으면 좋겠네.” 이장희는 어느새 새로운 꿈을 하나 심고 있었다.

울릉=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 밴드 동방의 빛

밴드 동방의빛은 1973년 이장희가 조직한 국내 최초의 세션밴드다. 뚝섬 스튜디오에서 세션 활동을 하던 유영수(드럼) 이호준(키보드) 조원익(베이스) 강근식(기타)이 멤버로 참여했다.

밴드 이름 동방의빛은 이들이 지은 것이 아니다. 이장희는 “당시 주간한국에 있던 한 기자가 녹음실에 찾아와 우리가 연습하는 것에 감동을 받아 타고르의 동방의 빛이 되라고 표현했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문 세션밴드인 동방의빛은 영화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등의 사운드트랙 반주를 맡으며 그 위상을 높였고, 특히 송창식 김세환 윤지영 등 1970년대 유명 가수들의 세션도 주로 담당했다. 동방의빛의 공식 공연은 74년 초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이장희의 리사이틀 공연이다. 이후 이장희가 진행하던 방송 등에 모습을 보였다.

이장희는 당시 동방의빛에 대해 “누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이 음악을 만들어 가는 밴드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녹음실에서 기타를 튕기며 곡을 짓다 보면 어느새 베이스와 드럼 등이 치고 들어오며 같이 연주했다”며 “2, 3시간 서로 이게 좋다, 저게 나쁘다 얘기를 나누면서 밤늦게까지 연주하다 보면 하나의 작품이 나왔다”고 말했다. 동방의빛은 크리스마스캐롤 앨범과 연주 음반 등의 두 장의 앨범을 따로 냈다.

이장희는 “몇 년 전 미국 내쉬빌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녹음실에 갔다가 프레슬리도 동방의빛처럼 같이 연주하며 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음악은 국적이 없다는 사실이 감동에 겨워 동방의빛 친구들에게 모두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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