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직업병인가. 대검 중수부가 1년 4개월 만에 다시 칼을 뽑아 들었다고 했을 때 잠시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명성이 예전 같진 않아도 사정(司正)의 핵인 중수부의 '몸풀기'는, 잠재적 피의자들에겐 공포지만, 이해관계가 없는 이들로선 큰 이벤트의 관객이나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서부지검이 한화에 이어 태광그룹 사무실을 급습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중수부가 행동에 나선 점이 무엇보다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이미 와해된 C&그룹이라니, 설렘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언론은 해당 기업의 어쩌면 뻔한 비리 레퍼토리를 쏟아내고 있지만, 더 이상 감흥은 없다. C&그룹의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과거 정권 인사들이 로비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늘 그렇듯, 기업이든 정치인이든 죽은 권력에 대한 수사는 하수처리 작업처럼 냄새는 진동하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서부지검의 태광그룹 수사가 훨씬 흥미롭다. 재계순위 40위라지만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할 만큼 알짜 기업인 데다, 편법 상속ㆍ증여, 수천억원대의 비자금, 정ㆍ관계 로비 등 의혹도 다양하다. 상속을 둘러싼 오너 일가의 갈등설까지 더해져 흥행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건 모두 언론 보도가 검찰 수사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C&그룹이야 망한 기업이니 물 빠진 뒤 쓰레기더미가 드러나듯 비리가 불거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겉보기엔 별 문제가 없었던 태광그룹에서도 봇물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비리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적(敵)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검찰로선 쏟아지는 의혹들 앞에서 수사결과에 부담을 느낄 것도 같다.
경험상 이번 수사도 종착점은 정ㆍ관계 로비 의혹이 될 것이다. 특히 C&그룹의 경우 인수ㆍ합병을 통해 빠르게 기업을 확장하고, 생존의 위기에 몰려 돈을 끌어대려니 줄 닿는 곳이면 무슨 권력이든 동원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나라 기업의 생존 방식이 그래왔고, C&그룹은 그 방식을 너무도 충실히 답습해온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역시 정치적 논란이다. 벌써 야당은 검찰 수사에 반발하고 있다. C&그룹이 파국을 맞은 게 현 정권이 들어 선 뒤라 막판 로비가 여권에 집중됐을 거라는 분석도 있지만, C&그룹의 성장 배경을 보면 야당의 우려를 과잉 반응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
지난 봄 후배 결혼식에서 만난 검찰 간부는 현 정권 들어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만 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매우 억울해 했다. 그러면서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수사하는데, 국민이 알아 주지 않는다는 항변인 셈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는 누구도 입을 잘 열지 않으니 수사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정치권의 주장도 때론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불신을 받아온 것을 그런 이유만으로 변명할 수는 없다.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거나, 똑같은 사안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댄 예를 일일이 들 필요는 없겠다. 오랜 휴지기 뒤에 다시 시작된 이번 수사가 또다시 정치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길 바란다. 잘 하는 것처럼 보이라는 게 아니라, 정말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상철 사회부장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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