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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5> 신라고승 염거화상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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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5> 신라고승 염거화상 부도

입력
2010.10.2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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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우리나라 이 곳 저 곳에서 옮겨놓은 부도 탑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을 끄는 부도가 바로 염거화상 부도(浮屠)다. 지정된 명칭은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으로 지정번호는 국보 제104호이고 현존 높이 1.7m이다.

이 부도가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각지에서 발견된 부도탑 가운데 만들어진 연대가 가장 오랜 탑지(塔誌)가 발견되었다는 데 있다. 이 탑에서 주인공인 염거화상의 부도임을 증명하는 동판에 새긴 탑지가 발견 되어 탑이 마련된 연대를 알게 된 것이다. 즉 통일신라 문성왕 때인 844년 염거화상이 죽은 후 마련됐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염거화상은 통일신라 때의 유명한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에 선불교를 전파하는데 당시 신라사회의 정신적인 이념이었던 교종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아 신라 중심 사회에 전파하지 못하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여년을 칩거하면서 염거화상에게 전수하고 타계한다. 염거화상은 다시 보조(普照) 체징(體澄)에게 전수하게 된다. 체징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명으로 가지산사(迦智山寺)로 들어가 표교하게 되는데 이 가지산사가 가지산문의 본사가 된 보림사(寶林寺)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도의-염거-보조로 이어져 선종의 원조가 도의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지산문의 선종이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가 되어 한국 불교의 본산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염거화상의 부도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1914년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어떻게 옮겨졌는지, 일본인 호사가에 의해 원래 위치에서 옮겨올 때, 해체되면서 탑지가 발견되어 떠돌다 1919년 총독부박물관에서 이 탑지를 구입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누구를 통해 어떤 경로로 구입된 것인지, 또 어떻게 경복궁내로 옮겨졌다 용산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졌는지 기록이 없다.

이 부도의 형태를 보면 상하 2중의 받침 위에 8각의 몸돌을 마련하고 그 위에 지붕돌(屋蓋石)을 올려 전체적으로 1층의 형태를 띠고, 8각의 지붕돌에 표현된 골기와의 형태와 아울러 서까래에 달아낸 부연(浮椽)의 표현은 분명 목조건물의 기와집을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몸돌의 8면에는 사천왕상과 닫힌 상태의 문(門扉)을 새기고 지붕돌 받침이나 몸돌 받침은 물론 상ㆍ중ㆍ하대석 전면에 사자, 화문, 연꽃, 안상, 비천 등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러한 형태의 부도를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 부르며 아울러 최초의 양식이 되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탑은 3, 5, 7, 9층의 석탑이거나 전탑이고 경우에 따라 다보탑처럼 특수한 형태의 탑도 마련되지만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탑은 한결같이 1층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석탑처럼 높은 탑을 만드는 대신 단층 탑으로 만들어 표면에 전체적으로 문양을 새겨 화려하게 함으로써 차별화가 된 것 같다. 이 염거화상부도가 있던 위치가 확인되어 없어진 하대가 발견된다면 보다 완벽한 형태의 부도가 재탄생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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