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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허공에 달을 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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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허공에 달을 굴리다

입력
2010.07.0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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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가 있는 덕숭산 동편 산마루 바로 아래에는 아담한 오두막이 하나 있다. 이 오두막은 이름도 그렇고 정면에 걸려있는 현판도 무척 특이하고 예쁘다. 바나나 잎 모양의 나무판에 전월사(轉月舍)라고 단정하게 새겼는데, 잎줄기 부분에 둥글게 선을 그렸다. 나뭇잎의 모양도 살리고 달이 굴러가는 길을 현판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토굴은 1941년 만공(滿空)스님이 지은 것으로 허공(虛空)의 둥근 달을 굴린다(轉月)는 뜻으로 전월사라고 하였다. 스님은 1946년 입적하실 때까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셨다. 원래 초막으로 지었지만 중간에 훼손이 심해서 시멘트로 벽을 바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올렸다. 최근에 목조로 기와를 올려 고쳐 짓고 담장을 새로 둘러서 반듯한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20여 년 전, 수덕사에 갓 출가한 시절 우리 도반 몇몇은 거의 비어있던 전월사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외딴 곳에 위치한 전월사는 산중에 사는 스님들만 찾는 무척 한가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염불을 중얼거리거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토굴 바로 옆에 만공스님께서 앉아서 수도 정진하던 바위에 앉아 큰스님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두둥실 달이 떠올라 동에서 서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던 큰스님의 체취와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수시로 그 곳을 찾던 어느 날, 문득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특별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월사 입구에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그 샘 옆에 무릎높이 정도의 네모난 작은 돌기둥 두 개가 서있었다. 전월사 출입문 역할을 하는 경계석으로 세워놓은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샘물로 목을 축이던 어느 하루, 그 작은 경계석에 글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양편에 각각 入此門內(입차문내), 莫存知解(막존지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문안에 들어오면, 기존의 알음알이는 막아버려라'는 뜻으로 흔히 큰 절의 일주문이나 그 주변에 새겨놓는 글이다. 산사(山寺)는 세상을 떠난 수도인들이 사는 곳이라 세상의 기준과 안목으로 알거나 이해하려고 하면 알 수 없으니 마음을 비우라는 당부의 말이다.

만공스님께서 계시던 전월사는 수덕사에서도 한참을 올라가 정혜사 선원을 지나서 산중의 가장 깊은 위치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미 산사에 들어오면서 한 번 마음을 비우고, 큰스님 계신 토굴로 오르며 한 꺼풀 더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맑혔다. 그런데 일주문 입구에서 만났던 글을 다시 또 만나니 예사롭지가 않았다. 문득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하여도 또 한 걸음 나아가라는 것이다. 선방에서 수행할 때에는 천길 벼랑 끝에서 발을 내디뎌 목숨을 버릴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세상 사람이 들어올 일이 없는 외진 토굴 입구에 작은 돌기둥을 세우고, 혹시라도 처음 마음을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후학들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침을 내리신 것이다. 또한 방심하고 마음을 놓아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엄중한 경고가 아닌가 싶다.

산사에 들어와서도 세상사에 바삐 쫓기다 보면 하늘에 달이 뜬 줄도 모르고 지내기도 하는데, 당신은 턱 하니 작은 오두막을 지어서 뜻대로 달을 운전하고 사셨으니 도인이 괜히 도인이 아닌 것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주경 서산 부석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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