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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 신화 피터 브룩 '11 그리고 12' 한국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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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 신화 피터 브룩 '11 그리고 12' 한국 공연

입력
2010.05.2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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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너무 늦게 왔다. 1968년 현대 연극의 성서로 불리는 '빈 공간(The Empty Space)'을 저술, 연극의 비의를 들춰 보인 피터 브룩(85)은 모든 연극학도의 스승이었다. 어쩌면 그는 가장 적절한 때 왔다. 세계화라는 또 다른 패권주의로 지구가 열병을 앓고 있는 이 마당에, 영감으로 무르익은 대안적 무대를 들고 온 것이다. 다만 고령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육체 탓에 내한 약속을 접고, 파리에 있는 자신의 극장 '뷔페 드 노르' 소속 배우들만 온다.

아프리카 작가 아마도우 함파데파의 소설을 각색해 무대화한 '11 그리고 12'는 브룩의 무대가 한국과 첫 조우하는 자리다. 그 풍경은 매우 극적이다. 그의 연출 노트에 의하면 "카페트 한 장만을 펼쳐 놓은 단순한 무대에 영국, 미국,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말리 등 출신 배우 7명"이 출연진의 전부다. 해설자의 설명 아래 때로 일본의 전통 악기가 라이브 음악을 펼친다.

지난해 파리에서 초연, 바비칸 센터 등 영국 무대를 거친 후 한국을 밟게 되는 그의 새 작품은 매우 영적이다. 1930년대에 살았던 아프리카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지도자 티에르노 보카의 삶을 연극적으로 재현해 '티에르노 보카'라는 제목으로 첫선을 보였던 2004년 무대를 보다 다듬은 결과다. 자신의 존엄함을 유지하면서도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얻게 되는 평온,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면서 그들과의 화해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는 관용을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스승님, 기도문 낭송을 열두 번 할까요? 열한 번 할까요?" 일견 사소해 보이는 제자의 질문은 연극의 출발점이자, 사물들 간의 '차이'를 근원적으로 상징한다. 무대의 언어는 단순하되 심오하다. 브룩은 이번 무대 역시 거의 빈 공간에 배우들의 움직임만으로 메워 간다. 장치라고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나 볼 법한 헐벗은 나무에다 모래 몇 움큼이 전부다.

브룩은 이 작품을 두고 "처절한 대량 학살을 이끌어낼 수도 있는 신학적 논쟁을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때로 그는 해결 방법을 섬광처럼 제시하기도 한다. "세상엔 세 가지 진리가 있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 그리고 진짜 진리, … 나의 진리는, 너의 진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진리의 작은 파편일 뿐이야." 프랑스 관리 일을 그만 두고 자신의 학당으로 찾아온 제자에게 티에르노가 일러주는 화합의 방법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설파하던 그는 결국 가난하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 연극은 슬픔에 잠기고 번민하는 영혼들을 위해 진리는 어디 있는가라는 물음표를 관객에게 던져둔다. 이 작품 공연 후, 커다란 카펫 위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무대는 브룩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을 정도로 필생의 작업으로 알려진 무대다.

현대에 공연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극들은 모두 브룩의 신세를 지고 있다. 겨우 21세이던 1946년 '사랑의 헛수고'로 셰익스피어 연출의 길에 들어선 그는 전형성을 깨는 일련의 작업으로 각종 연극상은 물론 영국 왕실 기사 작위, 프랑스 문학예술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다. 베트남전 반대를 명백히 내건 'US' 등의 무대는 브레히트 식 배우 훈련, 베트남 스님들의 수행법 등을 동원해 당대의 주류 연극 어법에 반발하며 낡은 연극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연출자 브룩의 연극 인생은 그의 무대만큼이나 극적이고 때로 파격적이다. 성공의 정점에 선 그는 파리로 건너가 1971년 국제연극연구소를 설립, 국제적인 배우들과 함께 신화 등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연극적으로 천착했다. 이번 무대는 1985년 그가 프랑스의 채석장에서 격렬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며 공연했던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뒤를 잇는 것이기도 하다. 6월 17~20일, LG아트센터. (02)2005-0114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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