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책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책 광고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는가?
출판 광고는 언제나 있어왔고, 전체 광고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꽤 높았다. 몇 년 전부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출판 광고는 주로 신문 하단에 실렸었는데, 갑자기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전면 광고가 대세가 되었다. 한 출판사가 여러 권의 책을 함께 묶어 소개하는 전면 광고는 그나마 이해할 만 한데, 책 하나로 한 면을 통째로 도배하는 전면 광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사람들은 그 광고의 폭력성을 잘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광고를 믿고 책을 구매하곤 한다.
베스트셀러 키우는 전면 광고
홀로 전면 광고가 나간 책은 예외가 없을 정도로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10만 권 정도는 기본이고, 100만 권을 돌파하는 밀리언 셀러에 오른 것도 적지 않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와 베르베르의 <신> (전 6권)이 이미 100만 권을 넘어섰고, 하루키의 <1Q 84>는 1·2권만으로도 일곱 자리 숫자를 돌파할 예상이다. 이 책들이 오로지 광고 덕택에 베스트셀러가 된 건 아니고, 책마다 작품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다를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키운 것은, 8할은 몰라도 5할 이상은, 광고가 아닐까? 신> 엄마를>
나는 문학이 일정하게 문화 산업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데 반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여기는 편이다. 다만 오늘의 비평가는 소설 등의 작품 내용만을 해석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이 텍스트와 상품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까지 분석해야 한다. 문화비평은 문화 산업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가능하면 그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도록 행동하는 과제를 떠맡아야 한다.
문학 작품의 내용만을 해석하는 전통적 비평은 줄어들거나 심지어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만 말해도 부족하다. 꽤 오래 전부터 문학 비평은 작품에 대해 빈말과 헛소리를 하는 경향이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 ‘주례사 비평’이란 비판을 들었지만, 어찌 보면 그 표현도 점잖다. 출판사의 상업적 메커니즘을 위해 호객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비평은 삐끼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문학 텍스트를 오직 작품성만으로 평가해야 한다거나, 문화산업적 개입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글 쓰는 일, 그리고 글을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이 최소한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요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상품으로서의 책과 다른 일반적 상품 사이에 그래도 조금 차이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화적 허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 마음조차 문화적 허영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무서운 순간이다. 소설 등 책 하나로 전면 광고를 때리는 일, 같은 광고 지면에서 잘 팔리는 작가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잘 팔리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좋은 작가는 머저리처럼 들러리를 서는 모습, 허세를 부리고 뻥을 치는 책 광고들을 볼 때, 그런 무서운 순간이다. 다른 일상적 상품은 통 광고를 한다고 해서 슬쩍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힘들다. 문학과 출판에서는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비평 사라진 '광고와 창작'시대
상품으로서 문학과 책은 ‘보이지 않는 손’, 아니 ‘잘 보이는 손’인 광고에 농락당할 위험이 크다. 문학만 그런 게 아니라, 출판 전체가 그렇다. 출판이 광고를 남용할 때, 글은 더럽고 뻔뻔해진다! 돈보다 더 더러워진다. 돈은 최소한 자신이 깨끗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깨끗한 척하면서 더러운 짓을 뻔뻔하게 하는 글이란!
‘창작과 비평’이라는 기준이 조금은 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문학 및 출판 광고가 뻔뻔해지면서‘창작과 광고’의 시대가 왔다. 아니, 전면 광고가 작품의 태반을 만든다면 ‘광고와 창작’의 시대이리라.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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