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동안거 중 만난 설정 덕숭총림 방장스님 "고르게 잘사는 게 정치…헐벗은 이들 돌보시라"
알림

동안거 중 만난 설정 덕숭총림 방장스님 "고르게 잘사는 게 정치…헐벗은 이들 돌보시라"

입력
2010.01.11 01:12
0 0

1955년 겨울. 14살 철부지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덕숭산 산문을 들어서던 날도 올해처럼 서설이 푸지게 내렸던가 보다. 은사 원담(1926~2008) 스님은 소년에게 설정(雪靖)이라는 법명을 내린다.

불가에서 눈은 무(無)와 깨침을 상징하고, '정'은 어지러운 것들을 지긋이 눌러 편안하게 안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펄펄 날리는 눈길 같은 생을 자박자박 지려 밟듯 걸어 지난해 그 소년이 덕숭총림의 방장(方丈)이 됐고, 깨달음의 경지를 따져 종정 다음 품계인 대종사가 됐다.

새해 덕담을 청하러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을 찾던 날 동안거 정진 중인 선방 마당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설정(69) 방장 스님의 눈(眼)빛은 눈(雪)빛처럼 푸근했다.

-방장 하시니 좋으신가요.

"방장이란 완전한 자리여야 합니다. 사부대중에게 희망이 되고, 그 분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야 하고 잘못되지 않도록 지도해야 하고 힘든 이들 편안케 해야 하고…,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야 하는 자리지요. 나는 아직 거기까지 못 갔습니다. 그래서 난 스스로에게 늘 방장행자라고 일깨웁니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영원한 행자이고, 행자여야 합니다."

-하면 요즘도 밭 갈고 김 매세요.

"눈밭 가는 사람도 있나. (웃음) 지금은 안거 중이라 안 하지만 농사철에는 너나없이 하지요. 우리 절집 가풍이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거든요."

-손 좀 만져봐도 될까요.(웃음)

"허허~"웃으며 손을 내주었지만, 스님은 속으로 '뭐 이런 무작스러운 X이 있나'하셨을 것이다. 손은 꺼칠꺼칠했다. 농사 제대로 배워 제대로 짓겠다며 20대 초반 독학으로 공부해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던 스님이다.

-안거는 어떤 의미인가요.

"알다시피 겨울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합니다. 객도 웬만해선 들이지 않고요. 안거 중엔 최대한 오감을 차단합니다. 안 보고 안 듣고 덜 먹고…, 인연을 끊고 안으로 충실해지는 공부를 합니다. 마음의 눈을 닦고 맑혀, 그 빛으로 세상이 보다 밝고 편안해지도록 하는 공부죠. 그게 결국엔 세상을 밝히는 방도입니다. 여름 감자 하나가 병에 걸리면 주변 전체가 썩지만, 흐린 물에 수정주 하나 넣어두면 맑아지죠. 세상에도 정의롭고 도덕적이고 맑고 깨끗한 이들이 많이 포진하면 좋은 국가, 아름다운 나라, 희망찬 세상이 됩니다. 그게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세상이 어때 보이십니까.

"나름대로 자기 역할 하면서 사시는 분들이 많죠. 하지만 점점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인간을 재화가치, 이용가치, 상품가치로 평가합니다. 욕심은 본능에 닿아있고, 끝이 없지요. 그 욕심에 끄달려 살면 욕생(欲生)이 되는 거고, 그걸 넘어서면 원생(原生)이 됩니다. 이타적이고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삶이죠. 욕생이 득세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욕심 없이 자족하는 삶과는 다른 얘긴 듯합니다.

"부처님은 나태와 방일을 가장 경계하셨어요. 이 생은 두 번 살 수 없는 것이니 늘 정진하라셨지요. 불교를 어설프게 안 사람들이 흔히 무상병(無常病)에 걸려 염세주의자가 되기도 하는데 그건 잘못이죠. 개인의 오욕에 탐착하는 삶을 버리고 더 큰 세상 더 많은 이웃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원생입니다."

-어디가 특히 안 좋아 보이십니까.

"정치하는 분들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이끄는 사람들이죠. 세상은 업(業)의 영향을 받는 곳이기 때문에 완전 평등 세상은 안 되죠. 그래도 최대한 고르게 잘 살게 하는 게 정치요, 정치인의 역할이죠. 정의롭고 정직하고 덕스러워야 하고, 내 이익 우리 패거리 이익을 넘어서는 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니 국민의 신뢰를 잃는 거고요. 또 언젠가부터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중시하는 세상이 됐어요. 그러다 보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가 판을 치는 거고…. 근사한 사회가 되려면 신의 있는 사람이 국가 일을 봐야 합니다."

-방장 스님, '반(反)정부'세요?

"(크게 웃으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선진미(盡善盡美)라는 말이 있어요.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이죠. 과정이 정당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결과만 좋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세상살이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덕담 한 말씀.

"용기를 잃지 말고 근면 성실해야 합니다. 삶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죠.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합니다. 그건 당사자들이 들을 말이고…, 정부와 권세 있는 사람들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차 몇 대씩 있고, 집 몇 채씩 있는 사람들은 헐벗은 이들의 애환을 모릅니다. 그걸 알아야 하고, 끝없는 배려의 정책을 펴야 합니다. 그게 정치가 할 일이고, 지도층이 할 일이죠. 그러지 못하면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능인선원 향적당(香積堂) 마당 가 감나무에는 이름 모를 겨울 새들이 수십 마리나 모여 앉아, 수행 중인 스님들 사정이야 어떻든, 시끌벅적 저들끼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