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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소설 - 얼음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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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신춘문예/ 소설 - 얼음의 요정

입력
2010.01.0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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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네, 하는 순간 내리꽂힌다.

차갑다. 숨이 가쁘다. 나는 얼음표면 위에 고꾸라져 있다. 얼굴이 바닥을 향해 거꾸로 박혔고 팔다리는 부러진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늘어졌다. 움직일 수가 없다. 한쪽 눈이 얼음파편에 짓눌려 시야가 뿌옇다. 철근파이프와 덤프트럭, 노란색 안전표지판, 눈 쌓인 낭떠러지 앞에 아슬아슬하게 뒹구는 종이티켓 한 장…. 흐릿한 실루엣들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얼음이 녹고 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를 입술로 조금 핥아본다. 물에서는 한겨울 냉랭한 공기의 냄새, 매캐한 먼지의 냄새, 축축한 흙의 냄새가 난다. 코끝이 얼얼하다.

바람이 불어 냄새들을 한데 지우고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 요동치던 심장도, 가쁘게 내쉬던 호흡도 어느새 잦아들었다. 마치 나는 없는 사람 같다. 무게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머리와 가슴이, 배와 무릎과 다리가 물에 번진 물감처럼 흐려져 간다. 시간이 느려진다. 기억이 흩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다. 툭툭. 의식의 끝자락 어딘가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먼 산의 메아리 같기도 하고 몸이 가벼운 여느 짐승의 발짝 같기도 한 소리. 먼 길을 가듯 가만 귀를 기울여본다. 툭, 툭툭.

눈을 뜨니 버스기사가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보고 있다.

D는 한 손에 요정인형을 들었다. 어제 짐정리를 하며 문 앞에 던져두었던 인형이다. 현관에 우뚝 선 나는 신도 벗지 못한 채다. “문을, 그러니까 얘가, 열어주더라고. 응, 얘가.” D는 인형을 흔들며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 나는 뚫어져라 인형을, 그리고 D를 바라본다. 소주 냄새가 풍겨오는 쪽은 분명 D일 것이다. 소주병 몇 개와 빈 과자 껍데기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오래된 선풍기는 삐그덕대며 회전중이다. 신을 벗고 문지방을 넘는다. 양손 가득한 짐을 식탁 위에 부려놓는다. 병원에 두었던 온갖 잡동사니들과 과일, 생선 등 제사거리 한 바구니. 버스에서 깜빡 잠이 든 탓에 한 시간 거리의 종점까지 다녀와야 했다.

창밖은 이미 어스름이 내려 있다. D를 등지고 냉동고의 문을 연다. 얼음 틀을 꺼내어 밑을 탁탁 친다. 사탕을 물듯 얼음 한 조각을 꺼내어 문다. 엉거주춤 옆에 선 D는 연신 인형을 만지작대고 있다. 으득 얼음을 깨물며 D를 똑바로 쳐다본다. 움푹 팬 눈가가 낯설다. 덥수룩한 머리칼이 이마를 가득 덮었고 수염이 뺨 언저리까지 거뭇하게 번져 있다. 계절에 맞지 않는 긴 소매셔츠에는 구김이 많다. 방향감각을 잃은 멍한 행색. 한때는 저 사람을 삼촌이라 부른 적도 있다. “헛소리 좀 하지 마라.” 인형을 휙 뺏어들며 그제야 나는 뇌까린다. 열쇠를 가지고 있었거나 수리공을 불렀거나 했을 테지. 얼음알갱이가 입속을 구른다. 나는 훌쩍 가방을 추켜 메고 방으로 들어간다.

녹이 슨 경첩에서 껄끄러운 소리가 난다. 후줄근한 옷가지들이 발치에서 거치적댄다. 빈 포장박스며 청색 테이프, 망가진 옷걸이가 방에 너저분하다. 손에 든 인형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저 난데없는 물건은 엄마가 얼마 전 국제택배로 보내온 것이다. 그게 그래 뵈도 얼음의 요정이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가 으스대며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웃었다. 발작 같던 웃음이 완전히 그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아니, 요정은 무슨. 게다가 얼음의 요정이라니. 솜뭉치 몇 개를 대강 이어붙인 듯한 둥그런 몸통, 지그재그 모양의 찢어진 눈, 만사가 귀찮다는 듯 헤 벌어진 입까지. 귀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심란한 생김새다. 딴에는 머리 귀퉁이에 열쇠고리까지 달아 놓았는데 삐져나온 실밥이며 보풀이 일어난 천이 어설프기는 매한가지다.

엄마는 매년 이맘때 손수 만든 자수나 그릇, 비누 같은 것을 부쳐온다. 그것들은 빈 집의 어딘가를 애매하게 떠돌다 결국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지곤 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어 앉는다. 가방 지퍼를 열고 돈 봉투와 항공티켓, 여행 팸플릿을 집는다. 봉투에서 이국의 지폐 십여 장을 꺼내어 만져본다. 은행 폐점시간 전에 간신히 도착해 환전해 온 돈. 빳빳한, 새 것의 감촉이다. 한 쪽에 세워두었던 트렁크 주머니에 봉투와 티켓을 넣는다. 챙겨두었던 여권과 여행사에서 받아온 팸플릿도 마저 집어넣는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다. 요정인형이 뚱한 얼굴을 하고 멋대로 누워있다.

“이사 얘기는 안했잖아.” D는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선다. “신문도 안 보는구나.” 나는 소주잔을 할짝이며 되받는다. 아이 때부터 살던 이 빌라촌이 올해 재개발구역으로 선정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다. 공항 부지를 늘리고 도로를 새로 낸다고 한다. 여행을 다녀온 후 바로 짐을 뺄 예정이다. 아아. D는 탄식도 뭣도 아닌 어중간한 대답을 하고 있다. 창밖을 내다본다. 커다란 비행기가 빛을 깜빡이며 하늘을 가로지른다. 굉음에, 난간이며 베란다 바닥이 함부로 떨린다. 공항이 가까운 곳이다. 이정도야 대수인가 싶은데 오랜만에 ?D는 그게 아닌가 보다. 깜짝 위를 올려다보는 품이 새삼스럽다. 엄마가 사거리 부동산 아저씨와 재혼한 후 남기고 간 이 집. 십 년, 아니면 십일 년 전.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비슷한 생김새의 저 비행기를 보며 맘껏 뒹굴었다. 엄마 저기 있겠지. 부동산 아저씨 돈 많으니까 비즈니스 클래스일거야. 너네 엄마가 예쁘긴 했는데. 죽여줄까.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서. 엄마는 아버지가 죽고 반 년 후에 남반구의 Ϣ로 이민을 갔다. 먼 데잖아. 내가 말했을 때, 엄마는 같이 갈래? 다정하게 묻기도 했다. 그게 출국 한 달 전이었다. 좀 적당한 기후의 나라라면 못 이긴 척 따라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Ϣ는 춥기도 몹시 춥고 말도 배우기 어려운 곳이다. 무엇보다 부동산 아저씨의 손을 맞잡은 엄마의 모습이 퍽 들떠 보여서 나는 됐어, 하고 말았다.

“전화가 안 되길래.” 어느새 침착해진 D가 입을 연다. 나는 한손으로 유리창을 제치며 “핸드폰 없앴어.” 말한다. 집 전화는 며칠 전에 해지를 해두었다. 흔들흔들 소주잔을 기울여본다. “나 때문에?” D가 눈을 크게 뜬다. 눈썹을 모으고 잔뜩 진지한 얼굴의 저 모습은 처음 만났을 무렵의 그를 닮았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밑줄을 긋는다는 자세로 살아온 이의 모범적 얼굴. 창밖의 가로등으로 하루살이가 모여든다. “엄마한테 다녀오려고. 아프대.” 손을 뻗어 허공을 휘 젓는다. 벌레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어림없네요, 하며 눈을 어지럽힌다. “비행기를 탄다는 거야?” D의 어조가 높다.

나는 한 번에 술을 털어 넣는다. “어, 내이일. 실은 일도 관뒀어.” 목소리가 조금 늘어진다. 이런 얘기는 왜 하는 걸까. 비행기는 처음이다. 지금껏,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굳이 이유를 갖다 붙이자면… 먼 것과 높은 것, 곧 추락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은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 하늘, 별, 우주 뭐 그렇고 그런 것들. 혼란스러운 눈을 하던 D가 정말이야? 묻는다. 나는 혼자 우스운 기분이 들어 응응, 아무렇게나 답해버린다. 엄마는 Ϣ에서 부동산 아저씨와 헤어졌고, 암이 걸렸고, 내가 보고 싶단다. 그리 엄청난 일도 아니겠지만. “엉망이네.” 숨을 몰아쉬며 저렇게 중얼거리는 D를 보고 있자니 그래, 좀 엉망이라는 생각도 든다. 엉망이라서 자꾸자꾸 술을 마신다.

엄마가 기묘한 생김새의 요정인형을 보내온 날 D의 전화를 받았다. 택배 상자의 포장을 막 풀고 있던 때였다. 몇 번이나 여보세요를 외쳤지만 상대는 아무 답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숨을 못 쉬겠어! 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호흡이 거칠고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였다. 멀뚱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나야, 나. 삼촌! 백 미터 경주를 막 마친 듯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또 귀를 잡아챘다.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내게 삼촌으로 부를만한 이는 없다. 엄마는 외동딸이고 죽은 아버지의 형제도 모두 여자들이다. 그러니까 그 순간 떠오르는 이는 D, 그 사람뿐이었다.

고3 여름 방학 직전. D는 학교에 찾아와 쓰러진 아버지 대신 대학진학 포기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취업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새하얀 명함을 담임에게 내밀며 천연스레 웃던 D를 기억한다. 삼촌이에요. 누님은 지금 경황이 없으셔서요. D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담당의였다. 나는 꽤 뻔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내 진지한 구석이 남아 있는 D의 그 얼굴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밤의 거리에서 교복 입은 친구들을 만날 때, 조무사로 갓 들어간 병원에 D가 콜록거리며 찾아왔을 때, 어깨를 바짝 붙이고 걷다 동네 어귀에서 경비 노인의 눈총을 받을 때. 언제고 D는 삼촌이에요, 라고 말했다. D는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한때는 그것이 부모형제 없이 자란 그의 환경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어쩌면 그것은 그저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6년 전에 헤어졌고, 그 후 3년을 흐지부지 만났고 또 그 이후 몇 년 간 차츰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D는 그 날 이후 종종 전화를 걸어왔다. 대개는 술에 취해 한심한 말투였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였다. 누군가 보고 싶다는 것(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숨을 쉬기 어렵다는 것. 뒤죽박죽인 얘기들을 이리저리 맞춰보니 자그마한 결론 하나를 낼 수 있었다. D는 아마도 집을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내 앞에 이렇게 누워 있다. 젖은 입술과 초점이 사라진 두 동공이 황망히 열려진 채로. 제사상을 차리려고 부엌에 있을 때, 뒤돌아보니 D가 베란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호흡이 옅고 맥박이 더뎠다. 뺨을 때리고 물을 부어도 깨어나지 못했다. 119에 연락하려 했지만 전화기가 없었다. D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으나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바로 D의 겉옷을 제치고, 동네 내과 병원에서는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심폐소생술을 힘을 다해 시도했다. 몇 초, 몇 분이 지났을까. D는 컥컥대며 仄艀?먹었던 음식들을 몽땅 쏟아냈다. D가 콜록대며 기침을 한다. 흐물흐물해진 몸이 오래 삶아 헤진 속옷처럼 형편없다. 내빼듯 앉은 나는 마지막 남은 수건 한 장을 앞으로 던진다. D가 입술을 달싹인다. “괜찮아. 집에 있으면 더… 힘들어서.” 그리 괜찮아 보이지는 않아서, 나는 옆에 있던 물병도 통째로 준다.

주변을 둘러보던 D가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라고도 말하는 것 같다. 내가 한참을 쥐고 흔들던 후줄근한 셔츠의 솔기에 눈이 간다. 실오라기 하나가 뱅글뱅글 풀려있다. 가슴부근을 헐겁게 여미고 있는 단추는 왜인지 반 토막이 나 있다. 나는 슥슥 얼굴을 문지른다. 몸을 벌떡 일으키며 “오느르은 늦었으니까아 우선 자자아.” 혀 꼬인 소리를 낸다. 술기운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니 꽤 그럴듯해 보여서, 몸도 괜히 비틀거리며 걷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시야가 몽롱하고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피곤한데도 정신만은 또렷하다. 방문 옆, 벽에 세워둔 트렁크 지퍼를 연다. Ϣ의 관광 팸플릿을 꺼내어 본다.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오른 만년설과 그 곳에서 흘러내린 듯 투명한 폭포. 호수와 빙하의 나라. 매년 이맘때 극야(極夜)로 유명한 Ϣ. 정말 가는 것일까. 부동산 아저씨네 모친 임종 때 다녀간 후로 엄마를 보는 것은 삼 년만이다. 그간은 엄마가 오라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해와도 글쎄, 하며 건성으로 넘겨왔었다.

요정인형을 받은 이튿날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을 앞뒀다는 사람치고 엄마의 목소리는 퍽 밝기도 했고 말기는 아니라는 얘기에 내심 안도한 면도 있을 것이다. 정작 한 번 가봐야 하나, 생각이 든 것은 그곳의 빙하지구에서 열린다는 축제에 관해 듣게 된 후부터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나라 말로 ‘밤의 여행’라고 부르는 그것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지는 은밀한 풍습 같은 것인데, 간단히 말해 해가 뜨지 않는 오십 여일의 기간 동안 사람들이 해안가에 나와 눈을 감고 누워있는 것이란다. 국교가 없는 Ϣ에서 ‘밤의 여행’은 매우 성스럽고 귀하게 여겨져,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 누구도 말을 하거나 웃지 않고, 고요한 밤의 기운을 내려 받는 것에 그저 감사해한다고 했다. 듣는 것으로만 치면 참 싱거운 일이다. 마냥 눕고, 눈을 감는 것. 그 정도는 집에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게 실은, 요정을 기다리는 거야.” 엄마는 소녀 같은 말투로 그게 다냐는 내 질문에 답을 대신했다.

‘밤의 여행’의 정점은 바로 그 요정들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요정은 본래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지역 종은 유난히 낯빛이 창백하며 이목구비가 험상궂다고 한다. 키는 보통의 인간보다 네 뼘 정도 작고, 머리칼은 무척이나 검고 억세서 얼핏 불에 탄 숯처럼 보인다. 빙하지구인 탓에 흔히 얼음의 요정이라고들 부르는데 실제로 몸이 얼음인 것은 아니다. 외양에 비해 성격은 온순한 편이어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인간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단다. 빙하지구는 과거 그들의 주거지였으나 지난 세기 업자들의 대량살상 이후로(곰의 웅담 같은 것이 있다고 소문이 잘못 퍼졌다)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밤의 여행’은 아마도 그때 사라진 요정들을 위한 제의의 의미도 가지는 듯하다. 그렇다고, 한다.

“병이 낫는다고 해. 요정에게 선택받은 사람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자신을 찾아준 인간에 대한 요정의 선물이라고. 이제 몇 남지 않은 후대의 요정들은 누워 있는 병자들 사이를 수줍게 거닐며 메마른 그 손을 잡아주는 것으로 삶의 기쁨을 얻는지 모른다고. “요정의 손은 말도 못하게 부드럽대. 영혼의 동반자랄까. 새로운 삶인 거야.” 엄마의 목소리는 지극히 맑고 또 은근하게 들렸다.

나는 이후로 문득문득 ‘밤의 여행’을 눈앞에 그려보곤 했다. 캄캄한 어둠 속 여기저기 시체처럼 뻗은 병자들, 저 홀로 차근차근 녹아드는 빙하의 조각들, 귓전으로 쏟아지는 새하얀 폭포의 추락들. 그리고 그 안에서 대대로 물려 내려온, 영문 모를 자신의 슬픔을 이해할 누군가를 고르느라 한껏 미간을 좁힐 요정들. 이상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그 장면들은 먼 옛날, 내가 매일 꾸곤 했던 어떤 꿈을 연상케 했다. 잠복했던 바이러스마냥 오래 숨죽여 있다 돌연 출현한 그것. 추락하고 내리꽂히고 결국은 서서히 사라지는 꿈이었다. 그것은 잠들어있던 내 기억의 단면이기도 했다. 자주 입이 말랐다. 까닭 없이 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요정 같은 것이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동반자니 새로운 삶이니 하며 들뜨는 엄마의 취향도 역시 그랬다. 다만 잊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혹시나 내 삶의 어딘가 어긋나 있는 거라면,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고 떠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않던 꿈과 같은 과거. 나는 어쩌면 그 먼 곳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방 한구석에 던져진 인형을 집어 든다. 트렁크 주머니에 열쇠고리를 매달아본다. 엉성한 그 생김을 가만 쳐다보는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난다.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연다. D가 눈앞에 서 있다. “음, 그… 베개라도 있으면 해서.” 해쓱한 얼굴이 담담한 표정을 만든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바닥에 뒹구는 베개와 담요를 대충 들어 건넨다. D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머뭇머뭇 입을 뗀다. 나는 머리를 긁는다. 피곤하다, 얼버무리며 금세 문을 닫아버린다. 맨 바닥에 늘어지듯 눕는다. 천장이 높다. 방이 휑하게 느껴진다. 그만, 눈을 감는다.

밤새 잠을 설쳤다. 요정인형이 뛰어다니며 온 집안을 어지럽히는 꿈 탓이었다. 나는 인형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다. 인형은 가끔 멈춰 서서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비행기 지나는 소리 가 너무 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형은 창밖으로 내달린다. 비행기의 굉음 소리도 잦아들지 않는다. 문득 고개를 드니 비행기만큼이나 커진 인형이 하늘에 높이 떠 있다. 나는 팔을 뻗는다. 뭐라는 거야? 되물으며 밖으로 목을 내민다. 찬바람이 몸을 띄운다. 발을 차며 허우적거린다. 한순간 인형과 가까워진 나는 이내 빙글, 떨어지고 만다. 점점 가까워지는 아래는 빛나는 얼음바닥이다. 온통 차갑고 투명한 얼음의 늪. 다행인 것일까. 바닥에 완전히 몸이 닿기 전에 눈을 떴다. 방이다. 트렁크 쪽을 보니 요정인형이 거기, 그대로 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연다. D가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집의 구석구석마다 반질하게 윤이 난다. D의 토사물로 얼룩졌던 베란다도 말끔하고 주방의 개수대도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주춤대며 서 있던 D는 또 다시 청소기를 민다. 머리가 울린다. 귀가 들쑤신다. “안 해도 돼 그런 거.” 나는 소파에 벌렁 누워 귀찮다는 투로 말한다. D가 멀거니 내 쪽을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밋밋한 표정. 나는 언성을 높이며 시끄러워 죽겠다, 어차피 부서질 집이니 유난떨 필요는 없다고 내쳐 말한다. 오전의 볕이 곧바로 몸에 내리꽂힌다. 한 팔을 눈가에 올린다. 굉음의 비행기 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워진다. 이것은 현실의 소리. 소파며 발이 닿아있는 바닥에까지 굉장한 진동이 느껴진다.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곳은 소음의 도시가 맞다. 소음과 숙취와 피로의 도시. 나는 또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근데 있잖아 왜 나야? 왜 하필 여길 온 거야? 도둑놈처럼 문까지 따고 말이야. 거기 집 좋잖아. 부인이랑 싸웠으면 대강 눈치 봐서 들어가는 거지.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사람 번거롭게 구는 거냐고.”

D는 6년 전 같은 병원의 동료의사와 결혼했다. 병원장의 조카라는 그 여자를 나는 몇 번 본 적도 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D는 나를 소개하며 원의 동생이야, 했다. 원이라는 것은 병원이 아니라 그가 어린아이 때부터 자란 보육 시설을 뜻했다. 황당한 말이었다. 지구 저 편에나마 엄마라고 부를 이가 엄연히 생존해 있는 나는 무슨 소리,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그래도 곧장 불쌍한 표정을 만들며(그러나 이제와 큰 문제는 아니라는 듯) 외롭게 컸어요, 라고 말하긴 했다. D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래, 그랬지 했고. 뭔가 바보 콤비가 된 기분이어서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진짜 바보처럼 웃었는데. 말없이 선 그 여자는 내 머리칼을 어루만져주었다. 두 눈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익숙하게. 그때 내가 얼굴을 찌푸렸는지 멍청하게 계속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그녀가 뒤늦게 딸을 낳은 이후로 더 이상 우리가 함께 만날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린 딸을, 그 딸이 되는 상상을 잠시 해본다. D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곰곰이 무언가를 헤아리던 얼굴이 한순간 고통스레 흐려지고 있다. “아니, 아닌데… 그런 거는.” D의 어깨가 무겁게 오르내린다. 고통의 자취가 채 가시지 않은 눈빛이 공간의 한 점을 오래 응시한다. 나도 그 곳을 바라본다. 언제나 더 먼 곳, 더 높은 곳을 바라보던 D를 떠올린다. 입가에서 맴돌던 어떤 질문들과 빛을 보지 못한 언젠가의 진심을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 누군가에게 가 닿기엔 이미 너무나 낡아버린 마음에 대해. 몸을 일으킨다. 비행기가 멋없이 구름을 가르고 창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서랍장 위로 손을 뻗자 해묵은 먼지가 풀썩이며 흩어진다. 누런 신문지로 덮싸인 액자를 꺼낸다. 먼지를 털고 신문을 벗긴다. 새파란 배경에 도드라지게 부각된 둥근 얼굴선, 외따로 웃는 눈과 입. 액자 속의 아버지는 늘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인상이다. 탁자에 액자를 세워놓고 부엌으로 간다. 음식을 옮겨 담던 D가 하는 김에 해장국도 만들까, 묻는다. 나는 양 손 가득 그릇을 겹쳐든다. 술 마시느라 아버지 기일도 거른 주제에 꼬박 밥 챙겨먹을 마음은 안 난다. 더구나 이 집에서는 마지막이 될 제사다. 아냐, 답하며 탁자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다. 불을 피우고 잔에 술을 담는다. 밥에 수저를 꽂고 절을 한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D가 나도 할까, 눈으로 물어온다. 오래 전 언젠가는 둘이서 이렇게 아버지 제사를 올리기도 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D의 머리맡에서 부서지는 햇볕은 유난히 환하다. 샛노란 볕이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던 열여덟의 어느 날, 그 날도 이랬던가. 아버지가 공중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넓이뛰기 중이었다. 하나, 둘, 셋 하며 뛰어오르다가 목표지점을 코앞에 두고 엎어진 것도 나였다. 담임이 숨이 차게 달려오며 아버지가 다치셨다! 를 우렁차게도 외쳤기 때문이다. 열 맞춰 앉은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고 체육 선생은 넘어질 듯 달려와 몸을 일으켜주었다. 따가운 모래가 얼굴에 들러붙었다. 다리가 삐끗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의 종합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를 처음 보았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D. 뭔가 대단해 보이는, 가운 포켓에 비뚜름하게 새겨진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지갑에 있는 내 등록금 고지서를 보고 연락했다고 했다. D는 물을 한 컵 내밀었다. 체육 했나 보네요, 말하며 내 머리칼에 붙어있는 모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딜 봐도 엄마는 없었고 순식간에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 굳은 얼굴을 한 채였다. 온통 울상인 이삿짐센터 동료에 의하면 아버지는 5층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옆에 선 D는 아버지가 지병이 있던 모양이라고, 평소 검진을 받아본 적이 있으시냐고 물어왔다.

안전망에 떨어져 외상은 크지 않지만 뇌출혈이 문제라는 거였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주 머리가 어지럽다던 아버지였다.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머리는 누구라도 자주 아팠고 피곤하다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 번도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적은 없었다. 나는 호흡기를 낀 아버지를 거기 두고 D를 따라 다녔다. 처음에는 얼이 빠진 황망한 눈으로, 차츰 애타는 눈으로, 그러다 이내 담담해져서.

아버지는 일 년 동안 꾸준히 망가져갔다. 반년이 지나자 몸의 반쪽이 마비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띄엄띄엄 잇던 말까지 멈춰버렸다. 간병인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밤마다 아버지에게 가야 했다. 그래도 가끔은 뛰쳐나가고 싶었고,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깊은 밤이면 머리를 뒤채며 횡설수설대기도 했다. “아아 아버지 그냥 좀 죽어요.” 죽어, 죽여줘, 죽어버려. 그건 달리 의미심장하지도 않은 내 말버릇이었는데.

이듬해 여름, 아버지는 정말로 숨을 거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이 길밖에는 없지 않느냐는 고요한 표정을 하고. 정체모를 업소의 일을 뛰며 병원비를 메꾸던 엄마도, 병실의 긴 밤을 쪽잠으로 떼우던 나도 그제야 평온해졌다. 빈소에 선 엄마와 나는 서로의 눈을 외면했다. 그것이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저 우리는 피곤했을 뿐인지도.

요정인형이 흔들리며 손등에 부딪힌다. D는 얼음 틀과 복숭아가 든 쟁반을 가져와 탁자에 내려놓는다. 트렁크를 옆에 세운 나는 손을 뻗어 얼음 한 조각을 빼내 문다. 얼음을 깨물면 머릿속이 쩡, 하고 깨지는 느낌이 든다. 자리에 앉아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출국까지 세 시간 정도가 남았다. “신기한 얘기 하나 해줄까.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얼음을 으득 깨물며 내가 말한다. 눈앞의 과일을 뒤적이던 D가 슬쩍 이쪽을 건너본다. “꼬맹이 하나가 있어. 열 살쯤 되려나. 밤이고, 밖에서 놀다 들어오니 집이 비어 있는 거야. 배가 고파서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뭐 라면 하나 찾을 수가 없어. 그러다 식탁 위에서 뭔가를 발견해. ‘내일 기차역으로 와라.’ 이렇게 쓰여 있는 종이.” D는 문가의 선풍기를 바짝 당겨와 회전모드로 바꾼다. “엄마 글씨야. 그게 뒤를 보면 기차 티켓이거든. 그 애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으니까.

그때 마침 자기 아버지가 맞은편 동 아파트 재개발 현장에 있다는 걸 기억해 내. 그 근방에서 제일 먼저 생긴 고층 아파트지. 티켓을 아무렇게나 구겨 쥐고 집을 나서. 돈이라도 받아낼 심산인거야. 계속 걸어. 가는 길이 빙판 투성이라 자꾸만 헛발질을 해. 횡한 철거촌이 꽤 무서워서 돌아갈까 말까 열 번쯤 고민하는데, 다행히 공사장이 나타나. 아버지는 공중에 있어. 3층쯤….” 사각사각. 과육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D는 눈을 내리깔고 남은 과일을 먹고 있다. 나도 물컹해진 복숭아 한 쪽을 집어먹는다. 입안에 퍼지는 과즙은 미적지근하고 텁텁한 맛이 난다.

“아버지는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 중이야.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희미한 가로등 빛만이 현장의 일부를 비추고 있어. 그 애는 노란색 안전표지판을 지나 나무계단을 더듬더듬 올라. 아버지는 좀 놀란 얼굴을 하는데 곧 그 애를 위로 잡아끌어. 고작 3층인데도 지대가 높아서 거긴 꼭 옥상처럼 느껴져. 철제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면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지. 깜빡이는 거리의 빛이며 점처럼 붙박인 하늘의 별 같은 것들을 넋 빼고 보는 동안 시간이 꽤 흘러.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에 물기가 스미고, 아버지는 유령처럼 말이 없고, 그 애는 어느 순간 자신이 왜 그 곳에 갔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아.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이상하게 귀가 멍해지는 느낌도 들어서, 자꾸만 발을 구르는데.” 어금니 한쪽에 실처럼 남아있는 복숭아 과육을 훑어낸다. D는 과일을 만진 손을 휴지에 닦아내고 있다. “우리도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었단다.

갑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웅웅대며 한참을 이어져…. 아무 것도 들리지가 않아. 그즈음일거야. 그 애가 텅 빈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은. 말 그대로야. 목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이 없어. 아버지가 사라지고 있어. 머리카락부터 얼굴, 얼굴에서 몸통까지, 몽땅, 없어져버리고 마는 거라고. 결국 남은 건 다리뿐이야. 아버지의 한 쪽 다리가 난간의 허공을 향해 위태롭게 뻗어 있어. 그 다리는 마치 저만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간절하게,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려는 중인거야. 엄청난 바람이 뺨을 때려. 그 애는 총격이나 당한 것처럼 허리를 잽싸게 굽혀. 흙먼지가 일어.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기차 티켓이 어디론가 날아가. 하늘은 더 캄캄해지고, 그 애는 자신이 서 있던 그곳이 하늘과 별과 우주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고 느껴. 몸이 순식간에, 엄청난 쇳덩이나 되는 듯 무거워지고 있거든.” “….”

“이해해? 그건 말이야. 난생 처음 느껴보는 괴상한 기분이라서, 그 애는 좀 억울해지고 만 거라고.” 숨을 들이쉰다. 폐부 깊이 밀려드는 공기가 후텁지근하다. D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다. 피로한 얼굴. 이윽고 입이 열린다. “그래서, 그 애는 바닥으로 떨어지잖아. 발을 헛디딘 건지 아닌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고 해. 어쨌거나 그 애는 추락한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갈비뼈가 부러져 한 달을 꼬박 입원한 것만큼은 사실이야. 덕분에 그 아버지는 또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잖아. 어머니도 며칠 후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셨고 말이지. 이것 보라고, 다들 뭐하는 짓들이냐고 그때 그 애는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딸 앞에서, 딸에게… 그러지는 않아.” 느리게 갈라지는 목소리. 딸, 에서 자꾸 멈칫한다. 나는 요정인형을 바라본다. 그리고 문득 D의 딸 이름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몇 년 전인가 D와 함께 있는 그의 딸을 본 적이 있다. 단 한 번이었다.

나는 아장아장 걷던 그 어린 애의 볼은 만져주었으나 끝내 이름을 묻지는 않았었다. 유난히 보드랍던 뺨의 그 아이라면 저 인형을 좋아해줄까. D는 말을 잇는다. “아버지는 숨을 쉬고 싶었던 거야. 높은 곳은 숨이 차니까. 그래, 숨이 차면 괴롭고 괴로움은 누군가를 슬픔으로 몰아넣고, 슬픔은 때로 스스로를 속절없이 녹아버리게도 하니까. 나락으로 떨어지게도 하니까….” 나직한 목소리, 그 여운에 어딘지 쓸쓸한 기운이 담겨 있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만다. 뭔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괴로움과 슬픔과 나락. 어느 순간 사라진 누군가의 얼굴…. 묵직한 공기만이 정적을 틈 없이 채우고 있다. D가 밥 먹고 갈래, 느닷없이 묻는다. 나는 여전히 요정인형에 시선을 둔다. 인형은 말이 없다. 아무렇게나 엉킨 머리칼이 선풍기 바람에 더욱 흐트러질 뿐이다. . . D.

평일의 거리는 한산하다. 상점의 반은 셔터가 닫혔고 이삿짐센터 벽보가 즐비하게 붙은 전봇대들만이 휑한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D가 앞서 걷는다. 나도 터덜터덜 뒤를 따른다. 이가 빠진 아스팔트 블록에 트렁크 바퀴가 걸려 이따금 팔에 힘을 주며 걷는다. 차례로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D는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느라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있다. 초등학생 두 명이 어디선가 달려와 횡단보도를 뛴다. 칠이 벗겨진 흰 선을 밟고 폴짝폴짝 멀어져 간다. 초록불이 깜빡인다. “잘 가.” 머무적대던 나는 D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댄다. 가늘게 접히는 검은 눈과 잠시 마주친다. “아픈 거, 병원에 먼저 가 봐. 잘 알 거 아니야.” 불쑥 덧붙이자 D가 목으로 웃는 소리를 낸다. 클랙슨이 울린다. D가 느릿느릿 발을 내딛는다. 마르게 굽은 어깨가 내리쬐는 햇볕에 점점 투명해져 보인다.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 가. 건너편에서, 그렇게 빈손을 흔드는 D를 본 듯도 하다.

이삿짐 트럭 한 대가 다가와 눈을 가린다. 나는 마지막으로 번쩍 손을 올리려다 만다. 몸을 돌려 택시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걷는다. 속이 더부룩하다. 발걸음을 뗄수록 가슴이 묵직해져온다. 숙취가 가시지 않은 채로 눈앞의 음식을 마구 해치워서일 거다. 공항이요. 팔을 휘저어 아무 택시나 잡는다. 기사가 트렁크를 옮기는 동안 바로 앞 약국에 들러 소화제와 숙취음료를 산다. 들이붓듯 약을 삼킨? 문을 열고 택시 뒷좌석에 앉는다. 오래된 타이어 냄새와 구석구석 밴 담배 냄새에 몸이 나른해진다.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너른 잔디밭과 노래하듯 뿜어지는 분수대의 물 계단을 지나 공항에 도착한다. 건물은 새 것의 냄새로 가득하다. 반원형의 높다란 천장이며 대리석의 바닥까지 모두 희게 번쩍거린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공항 직원들이 바쁘게 오간다. 울긋불긋한 차림새의 여행객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계를 들여다본다. 1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트렁크를 끌고 뛰듯이 에스컬레이터를 오른다. 티케팅 하는 곳은 위층 로비에 있다. 사람들이 카운터 뒤로 늘어서 있다. 탑승을 재촉하는 스피커 소리가 들려온다.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이 티켓을 흔들며 탑승구로 빨려 들어간다. 열 사람, 다섯 사람, 두 사람. 나는 트렁크의 앞지퍼를 연다. 한 사람이 마저 사라진다.

티켓 보여 주시겠습니까? 낭랑한 목소리의 여직원이 코앞에 있다. 얼굴이 급격히 굳어져가는 자신을, 나는 느낀다. 티켓이 없다. 여권이며 환전한 돈이 들어있던 봉투도 없다. 트렁크에 매달아 두었던 요정인형이 사라졌다는 것도 그제야 안다. 가방을 뒤엎는다.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손을 휘젓는다. 비어 있다. 옷가지 외에 남은 것이라고는 주머니 깊은 곳에 구겨진 Ϣ의 팸플릿뿐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여직원의 눈썹이 꿈틀댄다. 뒷사람이 몸을 제치고 보란 듯 앞에 선다. 언제 잃어버렸을까. 어디로 간 것일까. 맨송맨송 앞을 바라보던 나는 창구 저 편의 공중전화로 뛴다. 공중전화에서 물음표 팻말의 안내 부스로, 안내 부스에서 에스컬레이터로, 지나온 동선 그대로 허겁지겁 내달린다.

분수대의 물을 받아 마신다. 차갑다. 숨이 가쁘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온다. 그대로 잔디밭에 눕는다. 아이들이 수런대는 소리, 랜딩기어를 올린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 분수대의 물이 치솟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끝이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여행사 담당자는 분실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며 티켓은 재발급이 가능하지만 며칠을 기다리셔야 한다고 말했다. 도로 어디에도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은, 요정인형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늘 그래왔던 것처럼. 끝이잖아. 이번엔 입술로 중얼거린다. 나는 Ϣ를 떠올려본다. 쏟아지는 폭포와 여기저기 누운 무수한 병자들, 그 안에서 나긋나긋 거닐며 자신을 가장 닮은 이를 고르느라 고심하고 있을 얼음의 요정들을. 맥박이 불규칙하다. 툭툭. 얼음이 깨지는 소리, 빙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가깝다.

열 살 무렵의 그 겨울밤, 내가 공사장 바닥에 떨어지기 전. 오래 침묵하던 아버지는 신문에서 봤다는 웬 기사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극해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냉동인간을 어느 저명한 과학자가 소생시켰고, 모처에서 비밀리에 생활 중이던 그 냉동인간이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나직한 떨림 같은 소리. 그것은 딱히 나에게 하는 말도 아닌, 혼잣말처럼 스스로 작아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몸을 바짝 움츠렸고,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었다. 잊고 있던 엄마의 기차티켓이 손에 잡혔다. 바스락대는 감촉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바람이 들이쳤다. 귀가 멍했고 일순 눈앞이 어두워졌다.

나는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냉동인간이 외로웠나 봐요. 배가 무척 고팠거나 얼음 속에 두고 온 자기 친구들을 찾으러 간 것일 수도 있어. 갔다가 다시 올 수도 있는 거잖아. 아빠, 응? 빛바랜 시간 위로 트렁크의 요정인형이 어렴풋 지나간다. 나는 생각해 본다. 그 못 생긴 요정은 정말로 냉동인간처럼, 제 집을, 제 그리운 친구들을 찾기 위해 Ϣ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요정은 티켓을 들고 휘청휘청 비행기에 오른다. 아무리 착해도 눈은 있으니까 대체 왜 이 모양인거야 이 몸은, 투덜대기도 한다. 그래도 여권이 있고 여비도 두둑하니 쉽게 길을 잃지는 않는다. 냉동인간이 아닌 얼음의 요정이라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눈을 감은 나는 내 것이 아닌 것들, 잠시 곁에 머물렀다 가버린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점점 녹아 없어지는 것들, 물큰한 흔적만 남기고 홀연 사라져버리는 것들에 대해. 그들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얼음알갱이만한 크기의 사소함으로, 딱 그만한 크기의 가벼움으로 나를 떠올릴지 모른다. 먼 훗날 잔디밭에 누운 내가 미묘한 공기로 휩싸인 그 허공의 침묵을 기억해내듯. 멈춰버린 시간 속, 얼음한복판에 떨어진 어린 날의 내가 몸 안으로 번지던 그 날카로운 저릿함을 잊지 못하듯. 명치끝이 저려온다. 갑자기 가슴이 타는 듯 메스껍다. 배를 움켜쥔다.

쭈그리듯 몸을 굽혀 앉는다. 밭은기침이 목을 긁는다. 목구멍을 치솟고 올라오는 따가운 것들을 계속, 쉴 새 없이 게워낸다. 땅이 울린다. 머리가 흔들린다. 멀리서 누군가의 鈒恬??들려온다. 먼 산의 메아리 같기도 하고 몸이 가벼운 여느 짐승의 발짝 같기도 한 소리. 툭, 툭툭.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리는 느낌이 있다. 내내 꿈쩍도 않고 코끝을 간질이는 그것이 거치적거려 내치듯 크게 팔을 휘두른다.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올린다. 조금 작고 수줍은 듯한 부드러운 감촉. 나는 공중에 반쯤 몸이 뜬 채로, 잠에서 덜 깬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누구… 세요?

그리고 왈칵 다시 입을 벌린다.

■ 당선소감 "빈 종이 보면 도방가고 싶다가도 다시 돌아와"

빈 종이를 볼 때마다 난감하다. 매번 처음처럼 어렵고 서툴러 막막한 기분이 든다. 때로는 도망이라도 가고 싶어 이깟 게 뭔데, 큰소리도 친다. 지금껏 써 왔던 것이 모두 거짓말은 아닌가. 한낱 부스러기 같은 말들을 모아놓고 장난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냉소하고 바닥으로 내리닫는 이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면 그제야 나는 다시, 딱딱한 의자에 앉곤 했다. 피곤한 일이다, 라고 자주 생각한다. 하지만 갈 곳이 없다, 라고 또 그만큼 생각한다.

소설은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굳이 운명까지는 아니겠으나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민망한 미소로 가만 문을 열면 언제고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는 단 하나였다. 실은 소설을 쓰며 조금은 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늘 불안하고 어지러워 해독하기 어려운 '너'를 인정할 수는 있게 되었다. 결국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떤 감정인지 아직은 모호하게 느껴진다. 잘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모를 수 있을 테지만, 나의 지루한 마음만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곤궁한 마음까지도 마저 헤아리게 되길 바라는 진심은 분명히 있다.

소설이라는 꿈을 꾸게 해주신 분들. 다른 세계의 사람인 듯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던 서울예대의 선생님들, 격려하고 또 혹독하게 자극해 주셨던 박범신 선생님. 부족한 글에 손 내밀어주신 심사위원님들. 함께 글 쓰는 착한 동료들. 그리고 가족. 감사합니다.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요. 오래, 즐겁게 괴로우며, 버티겠습니다.

이지원

■ 인터뷰 "영화보며 착상 얻어… 타인의 고통 끌어안는 소설 쓰고 싶다"

"시작은 어렵지만 어느 고비를 넘기면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쾌감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지원(29)씨의 문학적 출발점은 시였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할 때까지는 과제 때문에 써보기는 했지만 소설 쓰는 일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물며 신춘문예는 "나 같은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일로 생각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글 한 편도 못 썼다는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보며 영화제작자를 꿈꿨다. 하지만 영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를 오래, 그는 불현듯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 쓰는 일밖에 없다"는 자각을 했고, 대학원(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진학을 결정했다. "대학원에서 들은 것들이 도움이 됐어요. 문학지망생들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가족적인 분위기가 나를 소설에 집중하도록 했지요."

이씨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편이다. "영화에서 봤던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게 덩어리가 되고 그 덩어리를 반죽하면서 소설이 나온다. 영상세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당선작은 어두운 공간에 누워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몽상하던 중 착상했다고 한다. 하성란, 천운영, 편혜영씨 같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습작을 했다는 이씨는 소설가 김연수씨를 볼 때마다 "항상 더 나아지는 것 같다. 그래서 부럽다"며 그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씨는 "당선 통보를 받은 후 3시간 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며 웃었다. "아직까지는 문학적으로 어린 것 같다. 지금까지는 나를 파악하고 관찰하며 소설을 썼지만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는 "조급해 하지 않고 오랫동안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왕구기자

■ 심사평

본심에서 만난 작품들의 성향은 다채로웠다. 반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세상이 눈부시게 변하고 있는 데 비해 문장의 갑옷을 입은 문학의 속살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인간의 속성이 쉽사리 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수한 작품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완성도라 하겠다.

'모텔 503호'는 입심이 좋은 반면 마무리가 급하고 해결이 충분치 않다. '그것은 마치'는 잠과 꿈이 더 이상 우리의 위안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위협이 되기까지 한다는 착상은 이해가 가지만 그에 어울리는 실감나는 현실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11½, 이건 너에 관한 말'은 불법체류 중인 동포 여성의 곤고한 위상을 그려내고 있는데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홈 스윗 홈'은 아버지의 불륜으로 파탄에 직면한 가족이라는 정황을 뒤집는 반전이 없는 게 밋밋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지원의 '얼음의 요정'은 문장과 구성이 단단하다. 작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정황을 자신이 잘 쓸 수 있는 문장으로 포착하고 있는 까닭에 구체적이다. 남반구의 얼음 위에 누워 있는 병든 사람들과 그들을 치유하고 위무하는 요정이라는 상상력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부모의 부재 속의 자아 찾기라는 익숙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는 점이 당선작으로 뽑게 했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윤후명(소설가) 성석제(소설가)

이왕구 기자 fab4@hk.co.kr

김주영 기자 wi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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