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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시대에도 해외파병 문제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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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시대에도 해외파병 문제로 고민했다

입력
2009.11.1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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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지음/푸른역사 발생ㆍ376쪽ㆍ2만원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문제를 놓고 우리 사회에 또 다시 긴장이 예상된다. 해외파병은 정치외교적, 경제적 이해 득실과 더불어 그 명분 또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념적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이미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적잖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해외파병을 놓고 사회적 몸살을 앓기는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지배층의 중국 인식'을 부제로 한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는 명, 청의 파병 요구에 대한 조선의 대응 양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계승범(49)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 엘리트들이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미래를 어떻게 어느 정도 예측하고 살았는지, 그 인식과 예측이 해외파병이라는 당면한 문제를 놓고 어떻게 현실로 나타났는지를 분석한다. "조선의 역사 전개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역할의 중요성은 대한민국의 역사 전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중요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에서 이 책이 다루는 주제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명, 청이 조선에 병력 파견을 요청한 것은 모두 열다섯 차례. 처음 파병을 요청한 것은 1449년(세종 31년)이다. 몽골을 치려고 하니 조선도 병력을 요동에 보내라는 칙서를 보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병력을 파견할 경우 왜와 여진이 치고 들어올 수 있다며 완곡하게 거절했고 명도 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명은 18년 뒤인 1467년 남만주 일대의 건주(建州) 여진을 치겠다며 다시 파병을 요청한다. 세조는 명에 호응, 파병을 결정하면서도 여진의 다른 세력과 관계를 유지하는 등 실용적 자세를 보인다.

1479년 성종 10년에 명은 또 다시 건주 여진을 토벌하겠다며 파병을 요청한다. 성종은 명의 칙사에게 출병은 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시기와 작전 날짜를 꼬투리 삼아 확답을 피했으며 칙서의 내용을 몰라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결국 파병에는 응했지만 건주 여진을 급습, 약간의 성과를 거두자마자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명의 파병 요청에 대해 조선은 국가의 손익을 계산한 뒤 대응했다.

하지만 중종 대에 이르면 대명 사대관에 큰 변화가 온다. 중종은 명의 요구가 없었는데도 지레 파병을 결정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정변 주도세력은 물론 그 반대편에 있던 도학정치론자들로부터도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그는 명과 돈독한 관계를 통해 권위를 세우려 했고 그 때문에 집권 내내 명에 저자세를 보였다. 명과 조선의 관계가 '부자 관계'로 변한 것도 이 즈음이다. 이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천륜적 의리관계이고 이는 이후 조선의 의식 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광해군 대에는 후금 협공 등을 이유로 명으로부터 세 차례의 청병(請兵)이 있었다. 첫 파병 요청에 광해군은 강하게 반대했지만 비변사 등 신료의 절대다수가 부자지간의 천륜을 따르고 임진왜란 당시의 은혜를 갚아야 하다며 즉각 파병을 주장했다. 광해군은 명의 정벌 계획이 실패할 것으로 확신했지만 신료들의 강압에 못 이겨 병력 1만3,000명을 요동에 파견,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 병력에 포위돼 투항했고 조선군 포로 400명이 살해됐다. 광해군은 이후 두 차례 더 파병 요구를 받았지만 그것을 물리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료들과 대립하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다.

후금(청)과 조선의 껄끄러운 관계는 정묘호란을 거쳐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1637년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고 청은 철군을 하면서도 명을 공격하자며 조선에 징병을 요구했다. 인조는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로도 다섯 차례나 파병 요구를 받았다. 명을 아비로 모시던 조선은, 청의 요구에 말로 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과 이념적 공황을 겪었다. 아들(조선)이 원수(청)의 편을 들어 아비(명)를 공격하는 꼴이 된 것이다.

중원을 장악한 청은 다시 조선에 러시아와의 전투에 참가할 것을 요청한다. 청이 중원으로 이동한 틈을 타 러시아가 만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청의 요구에 조선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비록 청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그 정벌 대상이 러시아 즉 또 다른 오랑캐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벌에 대한 인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선 대 오랑캐의 쌍방구도로 바뀌었고 이는 효종의 북벌론과도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조선의 상처 즉 오랑캐(청)에게 굴복한 수치심과, 현실적으로 북벌을 할 수 없었던 자괴감을 러시아 정벌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은 17세기가 넘어가면서도 명을 아비로 섬기면서 청 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스스로 소외됐다. 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은 그것을 거부할 능력이 없었으면서도 존명(尊明)의 의리를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가 남긴 빈자리는 너무 컸다.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채 근대를 맞은 조선의 미래는 그래서 더욱 불투명했다. 이미 망해 없어진 명을 붙들고 상상의 관념세계에 빠져들면서 폐쇄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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