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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삶의 남루함·고단함마저 살가운 골목길, 노스탤지어가 서성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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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삶의 남루함·고단함마저 살가운 골목길, 노스탤지어가 서성댄다

입력
2009.04.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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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어진 돌절구를 끼고 돌면 골목이 시작된다. 볕이 귀한 좁다란 길. 양팔을 뻗으면 손바닥에 두 벽이 닿는다. 거멓게 바랜 블록담은 군데군데 헐어 비루먹은 소 옆구리 같다. 자전거가 묶인 장독엔 뭐가 들었는지 시척지근한 냄새가 풍긴다.

사자대가리 모양 손잡이가 달린 녹슨 철제 대문 틈으로 개 한 마리가 코를 박고 킁킁댄다. 햇살이 따가워지는 시간.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왁자지껄 골목으로 들어선다. 한 아주머니가 담벼락에 알뜰히 비낀 햇살에 탁탁 빨래를 펴 넌다. 2009년 4월 9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의 풍경이다.

'송석원길'이라는 예스러운 이름이 붙은 이 골목에는 '47'이라는 지번에 붙임표(-)를 긋고 세 자리 숫자가 더 붙는 주소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엎어지면 이마에 닿을 듯 인왕산이 가깝다. 이십여 분이면 광화문 네거리까지 걸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산의 새소리가 들리게 조용하고 공기도 맑다.

조세희나 김소진의 소설에 나오는 골목길이 세월을 피해 숨은 듯한 곳, 그러나 여기에도 재개발 바람이 들이닥쳤다. 이제 '옥인 제1구역'으로 불리는 이 골목에는 몇 년 안에 '친환경 타운하우스'로 포장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처음 서울에 올 때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는데… 이 동네에 와서는 왠지 고향에 있는 듯 푸근한 마음이 들었어요."

김소연(41ㆍ가명)씨는 1996년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 2,300만원을 주고 얻은 한 칸짜리 전셋방. 이후 집주인은 한 번도 세를 올리지 않았다. 대신 재개발 될 거라는 소문이 돌 때부터 부서지고 고장난 곳은 직접 고쳐 써야 했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외지 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남편을 따라 상경했다. '밟을 흙도, 이웃 인심도, 밤하늘 별빛도 없는 곳'이라고만 들었던 서울. 하지만 이 골목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아이 셋을 낳아 길렀는데, 좁기는 하지만 여기가 좋았어요. 어릴 때 시골에서 한 방에 모여 살던 기억도 나고, 이웃끼리 음식도 나눠 먹고. 재개발이요? 글쎄요, 임대아파트를 준다고는 하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지…."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는 김씨의 남편은 요즘 한 달 벌이가 채 50만원이 못 된다고 했다. 김씨가 세든 집은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었다. 수키와와 막새는 거의 떨어져 나가 시멘트로 구멍을 메웠다.

흙이 수북이 쌓인 암키와에는 민들레와 제비꽃이 뿌리를 내렸다. 산에서 퍼 온 흙에 깻잎과 상추 씨를 뿌린 스티로폼 상자가 김씨의 살림살이를 말해줬다. 그러나 이 골목에서 김씨는 삶의 남루함을 애써 감출 필요가 없는 듯했다.

이정희(51)씨는 1990년 이곳에 처음 집을 샀다. 몇 해 뒤 남양주로 떠났다가 이내 다시 돌아왔다. 널찍한 아파트가 잠깐은 살기 편했지만 공기 좋고 살가운 이웃이 있는 옥인동 골목을 잊지 못했다.

이씨는 "도시가스가 안 들어와서 겨울엔 기름을 두 드럼씩 넣고, 밥도 한 통에 3만6,000원이나 하는 LPG로 짓는다"고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도 "되도록 오래 이곳에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얘기를 나누는데 이웃집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렸다.

어른 둘이 나란히 지나치기 힘든 이 골목에서도 아이들은 공을 차고 놀았다. 이승규(11)군은 "여기선 소리를 지르고 놀아도 어른들이 뭐라고 그러지 않는다"며 지난 겨울 쓰레기봉투를 깔고 골목에서 눈썰매를 타다 생긴 상처를 보여줬다.

동네에서 뭐가 제일 좋냐는 물음에 김지은(11)양은 "유진이!"라며 곁에 있던 장유진(11)양을 끌어 안았다. 학원에는 안 가느냐는 질문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폐타이어와 차량용 천막을 잘라 바람막이를 두른 양지바른 곳에 두 평 남짓한 평상이 놓여 있다. 오랜 세월 이 골목의 사랑방 역할을 해 온 듯 반질반질 표면에 윤이 났다. 머지않아 포클레인에 찍혀 부서질 평상이다.

'옥인 1구역 재개발 급물살'이라는 신문 기사가 동네 부동산에 붙어 있다. 옥인동 골목길은 사라지고 이곳 사람들의 기억도 잊혀져갈 것이다.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래왔듯이.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세월 피해 숨은 도심속 골목… 옛벗 만난듯 정겹기만

어린시절 골목길은 집 주변 어디에나 있었다. 차라고는 다닐 수 없고 기껏해야 리어커가 드나들만한 공간. 요란하고 복잡한 요즘 놀이터보다 훨씬 신나는 일이 종일 벌어지는 곳이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가득한 서울 시내에 그 시절 골목길의 정취가 남아있는 곳을 소개한다.

▲ 부암동 능금나무길

광화문 정부청사를 지나 자하문터널을 통과하면 뒤편에 언덕이 보인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면 커피 잘 뽑기로 소문난 '클럽 에스프레소'가 있고 거기서부터 발길 닿는 대로 걷기만 하면 부암동 골목길 여행이 시작된다.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택들이 부암동사무소를 지나 인왕산길로 이어진다.

직접 손으로 반죽해 떡을 뽑아내는 '동양 방앗간'과 구식 이발소 간판, 철물점은 시골풍경 같다. 환기미술관 이정표를 따라 샛길로 들어서면 오밀조밀한 골목이 펼쳐진다. 폭과 높이가 제각각인 돌계단, 불규칙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정겹다. 낮은 담장 너머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한남동 남계천길

서울의 심장부에 위치한 한남동 남계천길은 남산을 병풍 삼아, 한강을 풍경 삼아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형성됐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별쌍장군, 월명암선녀, 선녀집 등 이름만 들어도 재미있는 점집들이 즐비하다.

골목은 한남동 봉우리 정상부로 올라가는 큰길이 방사선 방향으로 갈라지며 시작된다. 일곱 갈래의 방사선 길은 마치 미로게임을 연상케 한다. 관건은 막혔느냐 뚫렸느냐. 이 가운데 꼭대기까지 뚫린 곳은 세 갈래 뿐이다. 운이 좋으면 뚫린 길이고 여차하면 막힌 길이다. 다행히 막다른 길이 비교적 초입에 막히기 때문에 멀리 돌아 나오는 수고를 피할 수 있다.

▲ 이태원 솔마루길

한남동에서 조금 위쪽 동네로 올라가보자. 화려한 유흥업소와 외국인 동네로 알려진 이태원에도 정겨운 골목들이 숨겨져 있다. 제일기획 건물에서 한강을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봉우리가 나온다. 이 봉우리의 동남쪽 내리막 경사에 이태원의 주요 골목 솔마루길이 펼쳐진다.

붉은 벽돌의 주택들이 늘어선 뼈대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불규칙한 길 구도를 이룬다. 구불구불한 길, 일직선길, 계단길, 막다른 길도 여럿 생긴다. 갈림길도 있고 살짝 어긋난 길도 있다. 이곳의 가파른 계단길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살인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참조 임석재 지음 <서울, 골목길 풍경>

정영명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3)

■ 골목은 불편해도 삶의 향기 밴 공간…보존·개발 병행 '가치' 찾아야

골목이라 불리는 곳은 사실상 현대인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간일 수 있다. 하늘에 닿을 것 같이 높은 계단은 날씨가 추워 얼어붙기라도 하면 길의 역할을 포기해야 하며,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폭은 소방차나 구급차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 위급상황이 벌어져도 발만 동동 구르게 만든다.

좁은 골목 안에서 집들은 다닥다닥 붙기 마련이어서 사생활도 이웃과 나누게 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골목은 근린환경으로서 유지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옛것에 대한 향수만으로 골목을 우리 주변에 붙잡아 두자는 게 아니라 골목의 장점을 살려 재개발하고, 현대적인 주거환경으로 개선하자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골목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잘만 활용하면 사진첩 속의 풍경에 그치지 않고 실제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공간인 골목은 연인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하고, 아이들이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놀이터가 되기도 하는 훌륭한 공간"이라며 "재개발을 할 때 이 같은 특징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게 바람직한데, 예를 들어 골목과 같은 길을 건물 안으로 내부화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프랑스는 19세기부터 골목 보존 지침을 만들어 마차가 지나가지 못하는 길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세계 곳곳에서 골목의 현대적 가치 유지에 힘을 모으고 있다"고 덧붙였다.

조정구 구가도시건축 대표는 "골목 주변의 사람들은 골목이 집의 연장선이라 생각하기에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길가에 화분을 내놓는 등 생활을 공유하게 된다"며 "넓은 땅을 모아서 지형을 바꿔가며 재개발을 하면 이 같은 골목의 장점을 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되도록 지형을 원형대로 보존하는 재개발을 하고 건물을 작게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의 경우 가파른 계단이 많은 거주지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서까지 골목과 같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가 골목 등 자연발생적 거주 주변 공간을 보존해가며 재개발을 진행하는 경우는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북촌의 한옥과 골목 정비사업을 지원하고 재개발에 들어갈 때 시에서 경관건축가 집단을 구성해 참여하도록 하는 정도이다.

시 관계자는 "3,700억여원을 들여 전통가옥이나 가옥 주변 골목에 대한 보존사업을 진행하는 중"이라며 "경복궁 서측 지역 한옥 골목을 살리자는 여론이 일어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일도 있듯이 전통 골목을 훼손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서울역사박물관의 기억 채집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달동네. 한 할머니가 폐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밀며 가파른 내리막길을 아슬아슬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할머니의 손수레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때 몸을 굽혀 쏟아진 책들을 담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이고 고마워, 또 왔구먼."

서울역사박물관의 학예연구사 권혁희씨와 4명의 연구원들은 지난 3월부터 매일같이 이곳의 꾸불꾸불한 골목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뉴타운 사업으로 곧 사라져버릴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를 위해서다.

지역 주민들을 면담해서 그들의 생활상과 풍속을 조사하고, 건축물과 길의 모습을 실측해 도면을 작성한다. 이곳의 경관을 사진에 담고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7년 보광동, 2008년 가재울 지역을 조사해 민속지를 펴낸 데 이어 올해는 북아현동과 왕십리, 길음, 돈의문 등 네 곳의 뉴타운 예정지를 조사하고 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소리없이 사라져가던 골목길의 이야기가 조금씩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있는 것이다.

권 연구사는 이런 작업에 대해 "과거의 모습들을 부수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남긴 길과 건물, 물건을 통해 서울의 지난 100년을 총정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6, 70년대 개발을 하면서 이전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금의 모습만 기록하는 게 아니라 개발 이전의 모습까지 재구성하고 있죠. 다행히 아직은 예전 기억을 갖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시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몰라요. 이번에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지난 100년의 시간을 놓치게 될 겁니다."

갑자기 찾아온 봄 더위 덕분일까. 골목 한쪽으로 접어드니 할머니들이 그늘진 곳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그 주위에 의자를 놓고 고스톱 치는 모습을 구경하는 할머니에게 연구원 백민영씨가 다가간다.

"할머니는 왜 안 치세요?" "난 허리가 아파서 못해." "원래 고향이 여기세요?" "아녀. 난 전주 출신이여."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렸을 적 인력거 탔던 이야기부터 큰 아들을 따라 서울로 올 때의 사연까지 한참을 이어진다.

백씨는 "생애사를 조사할 때 개인적인 이야기는 숨기려는 경우가 많아 시간을 두고 친밀해져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면서도 "친해지면 딸이나 손녀 대하듯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해 주시고, 과일을 깎아 주시기도 한다.

혼자 사는 분들은 외로움 때문인지 특히 반겨주신다"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전 이곳의 풍경이 눈에 펼쳐지는 것 같다. 개인의 파편적인 기억이긴 하지만 이것이 정말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건축사를 담당하는 이효진씨는 A4용지 20장을 붙여 만든 북아현동의 지적도를 들고 다니며 꼼꼼히 기록을 해나가고 있다. 이씨는 "집과 길의 모양 하나하나에도 삶과 시간이 스며들어 있어 재미있다"고 했다.

"원래 산이었던 이곳에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천막을 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계획에 의해서 지은 집들이 아니라 살면서 필요에 따라 보수하고 덧지어나간 형태들이죠. 특별한 양식도 없고 그저 비바람을 막고 채광과 환기를 위한 기본적인 공간이에요.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실제 문화는 이곳에 있는 것 같아요."

몇 년만 지나면 책과 영화 속 풍경으로만 남을 이곳을 기록하면서 이들은 어떤 감정을 갖고 있을까. 권 연구사는 "많은 사람들이 골목길에서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지만, 골목길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거대 도시에서 구조적으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공간"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세입자와 개발업자 사이에 조금이라도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목길을 아련한 추억이나 아쉬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남겨둘 수는 없어요. 대신 그 아쉬움을 덜려면 기록을 해야죠. 기록을 남겨서 후세들이 꺼내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기록마저 하지 않은 채 과거의 모습을 부숴버리는 것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거니까요."

김지원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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