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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흰 국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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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흰 국숫발

입력
2009.02.1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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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문

슬레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밤 사설 같더니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 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빠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 방

문 여닫히는 소리

한 끼 뚝딱, 도시의 어떤 골목에서 혼자 허기를 떼우는 국수가 아닌 함께 나누어 먹는 국수. 한 공동체의 여신과 같은 동촌할매의 사설같은 국수. 벽을 바라보고 혼자 먹는 국수가 아니라 사람들에 둘러싸여 후루룩, 쩝쩝, 먹던 국수. 평상 위에서 먹던 국수, 밭에서 따온 호박이나 부추가 고명으로 얹혀있던 국수, 역시 밭에서 뜯어온 배추로 버무려낸 겉절이를 곁들어 먹던 국수. 웃으면서 옆집 아낙, 처자, 총각, 아이들 흉을 보면서 칭찬을 하면서 먹던 국수.

그런데 시인에게도 그것은 꿈이었나 보다. 이 시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저 세상 사람들 같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꿈 속에서 국수를 먹고 있거나. 하긴 국수가 삶기는 솥을 들여다 보면 솟아오르는 김 속에 보이던 국숫발은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얀 그 국숫발을 함께 넘기던 사람들과 공동으로 꾸는 꿈. 그 시절이 낙원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의 풍경과는 달랐다는 것뿐.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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