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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춘문예/ 소설 - 너의 도큐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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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춘문예/ 소설 - 너의 도큐먼트

입력
2009.01.16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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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내가 처음 루팽을 만난 건 TV '만화동산'에서였다. 루팽은 나타났다 사라졌고 잡혔다가 달아났으며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났다. 모든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침내 루팽의 승리로 끝나면 이불에서 일어나 일요일을 시작했다.

사업에 실패하자 아버지는 루팽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삼 개월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다. 그것도 밤에, 그것도 몰래. 때론 아버지가 왔다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가,

면도기에 붙어있는 수염을 보고 눈치 채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는 대포폰을 쓰다 나중에는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어디서 자는 거야?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산에서 지내. 서류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산비탈을 올라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두고 싶었다.

서류상으로 이미 남남인 엄마 가게에도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대개 무례하게 굴다가 겁을 주고 사라졌다. 엄마는 울다가 화내다가 나중에는 빚쟁이들과 데면데면 농도 섞었다. 빚쟁이로 등장하기 전에는 친구, 친척, 동료로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채무자를 벼랑까지 몰고 간다는 사채업자가 끼어있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신용불량자 신세를 면하겠다고 한동안 가게에 머물며 법무사를 찾아다녔지만, 아버지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나였다. 양복바지에 코듀로이 재킷. 채주 표현으로는 '망했어도 남아있는 사장님 풍채'를 하고 아버지는 휙 하니 골목을 돌아나갔다.

찢어진 가게 차양이 바람에 들리더니 걸어오는 채주가 보였다. 점퍼를 껴입기에는 너무 일렀지만 채주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채주는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였고 위절제술을 고민 중이었다.

채주는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 티가 난다는 둥 아예 가게를 접수하라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맛밤을 뜯어 하나씩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친구들의 근황을 알렸다. 누구는 중형차를 몰고 누구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고 누구는 세 번 낙태했다.

누구는 원어민 강사와 연애하고 누구는 중국으로 떠났으며 누구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주인공만 달랐을 뿐 언제나 비슷비슷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누구는 이렇게 가게의자에 앉아, 위의 한 부분을 잘라내야 할 친구의 식탐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시각 매킨토시 도큐먼트를 열어 텍스트를 깔고 있었을 것이다. 손목에 쥐나도록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는 박봉의 일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나풀나풀 사라져버릴 듯 불안하던 데이터가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실물로 제본소에서 배달되는 순간은 극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여미가 죽었다잖아."

"여미가 죽어?"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집에서 심장마비인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평소 여미는 심장 질환을 앓지도 않았고 약물 중독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미의 심장은 아무 문제없이 삶을 견뎌오다가 어느 밤 갑자기 멈춰버렸다.

"몇 달 전 둘이 헤어졌다던데, 주용이 발이나 뻗고 자겠니."

채주가 쥐포를 하나 더 뜯었을 때 엄마가 가게로 들어왔다. 계양산 약수터에서 아버지를 봤다는 사람이 있다며 나서더니 성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괴도 루팽이니까. 채주가 돌아간 뒤 가게와 붙은 뒷방으로 들어가 인터넷에 접속했다. '사람 찾기'로 여미를 검색하고 미니홈피에 들어가니, 방명록에는 이미 한 떼의 슬픔이 지나간 뒤였다. 놀람, 눈물, 안녕, 죽음 같은 단어들이 드물어질 때까지 방명록을 뒤로 넘겼다.

여미를 처음 만난 것은 15박16일 일정으로 떠난 중국 여행에서였다. 베이징에서 비행기로 둔황을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란저우, 시안을 거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각 과에서 추천한 학생 서른 명 가운데 여미와 나, 채주가 있었다.

여미 얼굴에서 가장 큰 특징은 왼쪽 입술 끝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핏줄이었다. 옆에서 보면 푸른 털실 한 올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끝은 붉은 심장과 이어져있을 것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여미의 별명은 '80년대'였다. 몇 명을 빼고는 다들 80년대 생이었지만 여미 별명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80년대 운동권 여학생 같다는 뜻이었다.

여미는 야학동아리에서 활동했고, 풍물패에서 장구도 친다고 했다. 둔황 사막에 둘러앉아 장기자랑을 할 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하며 여미가 열창하자, 애들은 별명이 딱 떨어진다며 웃었다. 차라리 '낭랑 18세'나 '남행열차'를 불렀으면 나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미는 차분하고 신중했지만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여행사 스케줄에 따라야 하는 일정에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식당으로 향해야 했다. 안 그래도 향신료 때문에 젓가락이 가지 않던 음식은 그때마다 남았고, 여미는 음식을 포장해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안에서도 장미꽃을 사라며 호텔 앞까지 쫓아온 여자애에게 포장해온 만두를 주었다. 그 만두는 오늘밤 뒷풀이 안주였어, 여행단 아이들이 힐책하듯 말하자 여미는 "배가 고프다잖아." 이렇게 답했을 뿐이었다.

"그만둔 게 아니라 잘렸어."

호텔 방에서 둘이 맥주를 마시다 야학동아리를 왜 그만뒀냐고 묻자 여미는 쿡쿡 웃었다.

"애들이랑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배시시 웃는 입가에 핏줄이 도드라졌다가 피부 속으로 다시 잠겼다.

"그래도 최소한 입사지원서를 채울 욕심으로 동아리에 들진 않았어."

여미는 내가 취조관이라도 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했다. 시작 자체는 꽤 순수했다고 덧붙였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어 나는 여미 머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채주는 여미 별명 앞에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을 붙이며 마뜩치 않아 했지만, 나는 여행 내내 여미가 좋았다. 모일 때마다 월드컵 이야기로 흥분하는 학생들이나, 겨울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냉소하는 교수들과 달랐으니까. 여미는 과외를 세 건이나 뛰고 논술 채점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 우선 돈부터 모으고 봐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든 다른 길이 열리면 미련 없이 달아날 거라는 여미의 말을 그때 내가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학보사와 사진동아리, 자취방을 돌며 이십 대를 채워나가는 주용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함께 어울렸고, 주용의 권유로 여미는 학보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미는 주용과 '연애'했다. 빤한 삼각관계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여미를 괴롭혔다. 어느 날 전화해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소리 지르자 여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싫어."

그러면 내가 죽겠다고 하자 여미는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

"너도 안 돼."

다음 날 엄마는 하루씩 교대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엄마의 계획은 무모했다. 틈이 날 때마다 시내 곳곳을 돌아다녀보자는 것이었다. 차라리 흥신소에 의뢰하면 빨리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더 이상 대들지 않았다.

이제 외출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까. 가게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피곤이 몰려와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입맛을 잃어 과자나 빵, 라면 따위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머리도 빗지 않은 채 카운터에 앉는 날이 늘었고 매일매일 현찰을 만질 수 있다는 소박한 기쁨조차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가게를 나서는 내게 엄마는 시내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부채처럼 착착 접으면 세로가 30센티미터쯤 되는 지도에는 각 구가 반듯한 직선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엄마는 하루 동안 다닌 길을 표시해 두라고 했다. 추적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지도를 펴보았다. 계양산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나는 공단 옆에 세모로 가게 위치를 표시했다. 산에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얼마나 사실일까? 벤치에 앉아 시내의 산들을 찾아봤다. 전에 살았던 동네와 가장 가까운 곳이 철마산, 어쩌면 그곳이 아닐까?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가 있었으니 빚쟁이들을 만날 확률은 어느 곳보다 높다.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볼펜으로 철마산을 죽죽 지웠다.

언제까지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주안역에서 내려 옛 시민회관 쪽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며 걷다 입간판에 턱을 부딪치고 지도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시내에서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중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이렇게 충고했다. 그때는 웃어 넘겼지만 아버지 말이 맞았다. 시내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순식간에 능선과 능선을 넘어 부지런히 달아나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검도장이었던 곳은 어학원으로 바뀌었다. 서점은 네일아트숍이 되었다.

상점들만 변하는 게 아니다. 이십육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 매순간 거리를 채운다. 게다가 내가 걷는 동안 아버지도 어디론가 끊임없이 걷고 있을지 모른다. 루팽을 좇는 갈리마르의 막막함이 이랬을까, 나는 이내 모든 것에 시들해졌다.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전화로 채주를 불러냈다. 채주는 식구들이 위절제술을 말린다며 한숨이었다. 뚱뚱하기는 하지만 멀쩡한 위를 잘라낼 정도는 아니라며, 채주 엄마는 아예 몸져누웠다고 했다.

"날 이렇게 뚱보로 키워놓고, 무책임하게."

채주는 가족들이 반대하더라도 인터넷에서 병원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위가 슬퍼하겠다, 떼어내지 못해 안달하는 널 보면."

위로하기 위한 농담은 썰렁하기만 했다. 나는 말에 서툴렀다. 회사에서 편집회의라도 열면 마음만 안달복달할 뿐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제대로 꺼내놓지 못했다. 마취주사를 맞은 듯 얼얼한 입안을 혓바닥으로 부드득부드득 문지를 뿐이었다.

"병원에 같이 가주라."

내가 탈 마을버스가 왔을 때에야 채주는 속내를 드러냈다.

"혼자서는 비참할 것 같아."

나는 그러기로 약속하고 버스를 타려다가 여미네 집 주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정류장에 내릴 무렵 채주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야, 이 청승아. 골목 어귀에서 지도를 펼치고 주안과 가까운 산에 엑스를 그렸다. 내일은 엄마가 이 지도를 들고 거리로 나갈 것이었다.

엄마와 내가 가게를 들락거리는 열흘 동안 지도도 나달나달해졌다. 엄마는 추적의 배경을 동그라미로, 나는 엑스로 표시했다. 동그라미와 엑스는 마치 경주하듯 지도 위를 내달렸다. 엄마의 발길은 갈산으로 갔다가 여전히 계산과 계양동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약수터에서 봤다는 말이 아직까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와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지만 엄마의 표정은 그런대로 밝아졌다. 길거리에서 판다며 내게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도트무늬 머리띠를 사오거나, 화분을 들여오는 날도 있었다.

지도에서 내 동선은 주안에서 시청을 지나 수봉산을 거쳐 항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채주와 지하상가를 돌아다니거나, 계획에 없던 곳으로 혼자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우리가 다닌 대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주용이 살았던 원룸 주변을 배회하기도 했다.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의 삼층, 작은 테라스에는 철제 의자가 하나 나와 있었다. 창문 밖으로 커튼자락이 비죽이 나와 바람에 탈탈 흔들렸다.

거리 곳곳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뒷모습을 만났다. 그들은 테이크아웃 커피숍에 앉아있거나, 보도에서 내려와 택시를 타거나, 과일 상자를 들고 언덕으로 올랐다. 아버지는 종종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르며 서 있었는데, 그런 버릇이 있는 중년 남자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거리를 무작정 걸어 다니는 방법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버지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끝까지 쫓아갔다. 처음에는 단숨에 따라잡아 얼굴을 확인했지만, 점점 뒤를 밟는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동안에는 누구도 아버지일 수 있었다.

한 번은 역 광장에서 토스트를 사먹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집 앞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을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추적자로서 내 역할이 어설펐는지 남자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몸을 숨길만한 모퉁이나 가로수가 없을 때는 길에 멀뚱히 서서 고스란히 시선을 받았다.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가자 남자는 홱 뒤돌아 선글라스를 벗고는 눈을 홉떴다. 뒤돌아 뛰면서 모든 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입가는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얼굴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미네 집 주소를 이메일로 알려준 사람은 주용이었다. 클릭하자 '여기 여미가 있어'라는 문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크롤바를 내렸다. 첫 사진은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흰 벽, 흰 문, 흰 쇠창살로 된 집 앞을 지나는 어린 남자애였다. 오른쪽 한 귀퉁이에는 줄무늬고양이가 쓰레기통 위에 올라 남자애를 지켜본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흙빛 같은 뒷덜미, 풍선으로 얼굴을 가려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더 내리자 안경잡이 남학생 하나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고 스포츠머리의 청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 옆을 지나가는 여자애 셋, 똑같은 레깅스를 신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여미는 아니다.

다시 아래에는 패스트푸드점 의자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한 여자. 고개를 푹 숙인 여자의 뒷머리 숱이 듬성듬성 빠져 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열두 시 너머를 가리킨다. 여미일까? 이불을 둘둘 감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할머니가 마지막이었다. 합판 천장 아래에는 벌 떼가 집을 지어 검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여미가 여기 있어, 주용은 다시 반복하더니 여미네 집 약도를 그려 놓았다.

여미가 있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미친놈. 창을 꺼버리고 지도를 펼쳤다. 송현동에는 파랗고 노란 도로선이 엉켜있을 뿐 주용이 알려 준 달동네박물관은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동그라미로 여미네 집을 대강 그려 넣다가 지도의 표시들을 선으로 쭉 이어보았다.

항구와 놀이공원, 전철역과 도서관, 백화점과 산, 달동네박물관과 가게, 약수터를 모두 통과한 선은 지도 끝에서 멈췄다. 일정한 각도로 꺾인 모양이 마치 별자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으로는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주용은 여전히 묻고 있었다. 여기 여미가 있잖아, 안 보여, 정말 안 보여?

채주는 위절제술 대신 식도와 위 경계를 밴드로 묶는 시술을 받았다. 20cc 정도의 위만 남겨서 먹는 양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수술을 앞둔 일주일 동안 채주가 '최후의 만찬'을 함께 즐기자고 했다. 채주와 나는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해 강남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만찬의 마지막 날, 월미도 횟집에서 채주는 갑자기 울었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 회 한 점을 깻잎에 싸서 내밀었다. 채주는 어깨를 떨면서도 씩씩하게 받아먹었다.

수술을 받고 나서 채주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4주 동안은 죽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뒤로도 정기적으로 가서 밴드를 조여야 한다. 둥근 밴드 안쪽에 풍선이 달려 있어 몸 밖에서 물을 넣고 뺄 때마다 위의 크기가 조절된다고 했다.

"위가 줄어든 게 느껴지니."

"그럼!"

채주는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우선은 먹지를 못하니까."

수술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100킬로그램 가까이 줄어든 사람도 있다고 했다. 밴드에 묶여 몸은 몸이되 몸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채주의 위를 상상했다. 채주는 과거 사진들을 모두 불태워버릴 거라고 말했다.

"네가 가진 사진도 다 내놔."

"그러면 스물여섯 이전의 너는 어디에도 없잖아."

채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삼겹살이랑 장어, 닭다리살과 함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지. 이제 새 출발이야."

채주를 만나고 돌아오니 엄마가 얼마 전 계양산에서 아버지를 봤다고 했다. 허둥지둥 쫓아가자 쏜살처럼 사라졌는데, '여보' 하고 부르자 힐끗 뒤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고 했다. 엄마 손으로 딱 잡으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 뒤로 눈에 띄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붉은 매직으로 지도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는 이제 외출을 줄여야겠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불이 들어오지 않던 간판을 바꾸고 형광등을 더 단다. 마트에 나가 새로 출시된 과자 종류를 확인하고 가게 밖 골목에 파라솔을 놓는다. 삼천 원마다 스티커를 한 장씩 줘서 '福'자를 채우면 세제를 준다. 엄마 입에서 이런저런 계획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문을 더 남기려면 도매점에 직접 가서 물건을 가져와야겠다는 엄마 말에 나는 건성으로 응, 하고 대답했다.

"네가 운전면허증을 따라."

이번에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젊었으면 내가 면허 따서 소형트럭이라도 몰고 방방곡곡 돌아다니겠다마는."

엄마 눈이 아득해지더니 차양도 새로 달아야겠다고 덧붙였다.

"펄펄 날아오르는 걸 말아놓은 게 몇 달짼지."

엄마가 본 사람이 맞았는지 이틀 뒤에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왔다. 걱정 말아라, 전화를 받자마자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무얼 하며 지내냐고 묻자 머뭇거리다 아직도 산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산이 어디냐고요, 내 목소리가 높아지자 엄마가 전화기를 빼앗았다.

"식사는 했어요?"

전화기를 다시 빼앗으려는 나를 밀쳐내며 엄마가 통화를 마쳤다.

"살아있는 거 알았으니 됐어. 훌훌 털고 다시 돌아올 거다."

전화기에 찍힌 발신번호는 '76'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동인천 근처에 있다고 확신했다. 항구로 향하고 있던 내 지도상의 추적라인은 정확했던 셈이다. 나는 역에서 신포동까지, 다시 차이나타운까지 걸으며 만나는 공중전화마다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엄마 말을 믿지 않았다.

중구청을 지나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 하나가 겨우 지날 만큼 도로 폭이 좁았다. 옛 조계지 시절에 지은 건물들을 따라 오르면, 치파오와 중국신발, 효자손과 나무칼 같은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이 나온다.

나는 그 앞을 기웃거리다 손지갑을 하나 샀다. 낮에는 자유공원에 올라 장기 두는 노인들을 지켜보거나 파라다이스 호텔 주차장에서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에는 얕은 둔덕을 줄지어 오르는 가로등이 나를 자꾸 걷게 했다. 쇠락한 거리와 어울리게 내 걸음도 느릿느릿했다. 박문사, 중구대서소, 칠성통상, 신공항 공인중개소, 중앙동 커피점을 지나 드디어 홍등의 무리가 나타나면, 하루의 추적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아버지를 발견했다.

언덕을 따라 중국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차이나타운,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거리가 끝나고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이 지난 뒤였다. 회색건물의 작은 마당에서 아버지가 남자 셋과 화투를 치고 있었다. 전보다 더 야위어서 볼이 움푹 파였지만, 염색했는지 머리카락은 검었다. 건물은 사회단체에서 만든 노숙자를 위한 재활 센터였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아버지는 파란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재활 센터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창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손짓하자 남자들은 왁자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아버지는 주변을 정리했다. 여자가 다시 나와 종이쪽지를 건네주며 무어라 설명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아버지가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얼른 뒤돌았다.

가게에 돌아와서도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지방신문 기사 하나를 찾았는데,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과 譴結? 잠자리를 제공해 '재활 의지'를 불어넣음"이 시설의 목적이었다.

결국 밥을 먹고 씻고 잘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평범한 일상조차 기사에서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노숙자로 들어왔다가 나중에는 시설 도우미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도 읽었다. "도움이 도움을 낳는 것이죠." 관계자 말을 인용하고 당사자 사진도 올려놓았는데,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똑같이 파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시설에 들어오고 나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앞만 보고 달려오던 그 시절 욕심과 좌절이 사라지고 나니 새 삶이 열렸죠." 그러나 잘 적응하다가도 센터에서 달아나 노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입소자들이 많다는 말로 기사는 끝나고 있었다.

지도를 꺼내 작은 별표로 재활 센터를 표시했다. 엄마의 붉은 원과는 20센티미터 거리도 안 된다. 가게는 그보다 더 가깝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마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것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종적을 감춘 것들도 있었다.

거주지 불명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되자 의료보험증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신분을 보장해주던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먼저 이별을 고했다. 돌아온다, 주민등록과 의료보험, 국민연금과 보험증권, 은행통장이 있어야 하는 일상으로. 하지만 그것은 곧 파산한 가장으로, 갚을 수 없는 빚과 루팽처럼 몰래 집을 오가야 하는 피로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아버지를 만나리라 기대했던 곳은 약수터일까, 항구일까, 역 광장일까, 차이나타운일까. 아버지를 잡아당겨 채우려는 것은 내 도큐먼트일까, 아버지의 도큐먼트일까. 나는 어느 쪽에도 자신이 없어 지도를 접어 다시 가방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버스에서 내렸을 때 서른 명 정도의 남자들이 정류장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쪽문에는 간판도 없이 파란 글씨로 '인력'이라고 써있었다. 주인이 건물 문을 열자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경쟁하듯 좁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늙은 남자들은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여미의 집으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이유여서는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지웠다. 얼얼한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스물여섯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도 아니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푸르스레한 핏줄 때문도 아니다. 심장이 멈춰버린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옆에서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달동네박물관을 지나 색색의 포스트잇처럼 지층에 붙은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달동네의 일부를 헐어내고 아파트 단지를 지었지만, 비탈길을 타고 오른 낮은 지붕들은 여전했다.

골목에서 녹색대문 집을 찾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패에는 남씨 성이 적혀 있고, 우편함에는 여미 앞으로 온 보험회사 홍보물도 보였다. 대문 앞에 서서 마당을 훔쳐보았다. 집안에서는 기침소리가 크게 났을 뿐 조용했다.

십 분쯤 머물렀을까, 등 뒤에서 한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눈, 위로 도톰한 입술, 한눈에 남동생인 줄 알았다.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는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른 채 다시 물었다.

"누구세요?"

"저, 여미… 말인데요, 소식을 늦게 들어서 와보지도 못하고."

뒤이을 말을 준비했지만 그는 조금도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열쇠로 문을 열었다.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 안 살아요."

당황한 나는 몇 걸음 물러섰다. 집안에서 어머니인 듯한 여자가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엉뚱한 사람을 찾아."

한 시간 정도 더 서성이는 동안 집안에서는 불이 켜지고 텔레비전 소리가 떠들썩하게 새어나왔다. 생선을 굽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가 풍겨왔다. 바람이 불어 어디선가 검은 봉지가 날아오더니만 계단을 걸어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골목을 내려와 역으로 빠르게 걸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바짝 붙이고 뛰었다. 구두 안축으로 발뒤꿈치가 닿을 때마다 욱신욱신 아렸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잊는 거다. 뺨을 한 대 맞은 듯 붉어지던 남자의 볼이 떠올랐다. 아니, 기억하는 거다. 형광불빛처럼 생선냄새처럼 된장찌개처럼 텔레비전 소리처럼 가볍게 사라진 비닐봉지처럼. 얼굴이 젖었다 마르는 동안 길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일주일 만이었다.

다시 한 번 담을 넘겨다보았다. 세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는 이곳에 있을 거였다. 내가 형사 갈리마르가 되지 못했듯, 아버지도 괴도 루팽이 될 수는 없다. 철커덕, 소리가 나서 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자전거 브레이크를 풀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먼저 길 아래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운동화끈을 다시 묶는 척 시간을 끌었더니 뒤에서 그만큼 서 있었다. 주말인데다 축제기간이라 차이나타운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들과 어깨를 툭툭 부딪혀가며 중구청으로 내려갔다.

어디로 갈까 막막해 하다가 중화가 입구, 왕희지 동상 옆에 마련된 야외공연장으로 향했다. 축제 기념으로 경극을 공연하고 있었다. 중국식 공갈빵과 족발, 술을 파는 천막도 보였다. 팸플릿을 받아들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공연장 밖에서 기다렸다. 술 취한 양귀비가 백화정에 오지 않은 현종을 원망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양귀비가 물러나고 손오공이 무대 위로 올라와 거북이와 티격태격하며 무공을 다투고 나서 경극은 끝났다.

나가야 하나, 다시 걸어야 하나, 아버지와 마주쳐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서커스가 시작되었다. 자주색 공연복을 입은 소녀가 삼십 개가 넘는 훌라후프를 스텝에게 받아 돌리기 시작했다. 몸을 완전히 휘감으며 빠르게 회전하는 훌라후프들은 꼭 커다란 비눗방울처럼 보였다.

한동안 음악에 맞춰 돌리다가 리듬감을 잃었는지 훌라후프가 소녀의 발등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사람들이 엉거주춤 일어서서 소녀를 살폈다. 스텝이 훌라후프들을 허리께로 올려주자, 소녀는 꾸벅 인사한 뒤 다시 돌렸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공연도 실수도 망설임 없이 능수능란한 중국 소녀가 부러웠다.

아버지는 공연장 밖에 없었다. 놓쳤다고 생각했을 때 맞은편에서 자전거가 나타났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거리를 밀며 걸었다. 밴댕이 횟집이 몰려있는 곳에서도 공연 중이었다. 탱크톱과 짧은 치마로 여장을 한 남자가 "어머님, 아버님들 청춘을 확실히 돌려드릴게." 하며 노래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청추우운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아버지는 도로를 가로지르지 않았다. 못 다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먼저 사라지지도 않았다. 청추우운아 내 청추운아, 어…딜… 갔느냐.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아버지는 맞은편에서 줄곧 나를 지켜보고 서있었다.

버스 두 대가 먼지를 몰고 정류장으로 들어와 사라지는 동안에도 우리 간격은 그만큼이었다. 나는 세 번째 도착한 버스를 행선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타버렸다. 걸어오는 내내 아버지가 묵직하게 밀어냈던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나였다.

늦가을 밤 추위는 버스 안까지 따라왔다. 지도는 인쇄 부분이 벗겨지면서 속지가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끄트머리를 잡고 뜯어내자 별자리의 마디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조금 더 힘을 주자 지도는 손톱으로 긁은 듯 긴 자국을 남기며 찢어져 버렸다.

이제야 몸이 녹는지 다리가 떨렸다. 소형트럭을 몰고 싶어 하는 엄마는 가게에 새 차양을 달 것이다. 여미가 죽었어도 녹색대문집 사람들은 저녁이면 생선을 구울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용의 카메라는 계속 여미를 찍을 것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 실리콘 랩밴드와 풍선조차 채주의 몸이 될 것이다. 창문을 열어 지도를 버렸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도로표지판에 부딪힌 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속삭였다. 이제 남은 이 텅 빈 도큐먼트야말로 네 것이라고.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 <끝>

[당선소감] "당선소식 듣던 날도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 두려움 이기고 쓰겠다"

전철을 타고 철교를 건너다 강 위로 아주 무겁고 농밀하게 돋은 비늘들을 보았다. 그것은 바람을 따라 서서히 일어서며 끊임없이 일렁였다. 아주 잠깐 햇빛이 돋았다가 사라졌을 때, 오늘의 기쁨이야말로 저 황금 비늘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을 추동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을 테니. 첫 걸음을 떼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앞으로의 여정을 따져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당선 소식을 듣던 그날에도 변함없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위안한다. 내 작은 방을 벗어나 거리로 향할 때 비로소 소설이 완성된다는 믿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도.

부족한 작품을 세상으로 불러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한국일보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은 고통스러울 정도다. 같은 글을 몇 번이고 읽어주었던 남편에게는 어떠한 감사의 말도 부족할 것 같다.

시부모님을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 인하대 국문과 선생님들과 친우들, 편집자 생활을 하며 만났던 동료들과 '책'들에도. 더불어 내 소설의 원천인 이름 모를 '당신들'에게도. 나는 언제나 덜컹이며 당신들과 함께 흘러갈 것이다.

때론 내 발을 밟은 당신에게 눈을 흘기며, 때론 자리 하나를 두고 당키?신경전을 벌이며, 만 원에 석 장짜리 '올드 팝송'이라도 울리면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걸어둔 채 잠시 숨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일상이 또 다른 비늘로 돋아날 그날을 기다리며, 두려움을 이기고 나는 쓰겠다.

■ 인터뷰/ 소설가 꿈 위해 9월 사표내고 글만 쓴 몇달… "아, 살았구나"

"'아, 살았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더라구요. 호호호."

김금희(30)씨는 당선 통보를 받는 순간에도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자기암시의 힘이었을까? "중학교 때부터 소설가를 꿈꿔왔다"는 김씨는 "서른이 되면 소설가가 돼있으리라고 꿈꿔왔는데, 신기하게도 이뤄졌다"며 활짝 웃었다.

출판사 편집자로 직장생활을 한 지 7년째. 책 만드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던 김씨는 올 여름 갑자기 몸이 아팠다. 그의 '오랜 꿈'을 눈치챈 회사 동료들은 "네가 글을 못 써서 먹병이 났구나!"라며 한 마디씩을 건넸고, 김씨는 9월 사표를 냈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글만 썼고, 그래서 나온 3편의 단편 중 첫번째 소설이 거짓말처럼 그에게 소설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당선작은 빚 독촉에 시달린 아버지가 괴도 루팽처럼 변신해 도시 곳곳으로 숨어들고,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를 찾아다닌다는 줄거리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익숙한 소설적 테마를 다루면서도 주인공이 '비어있는 아버지의 공간에서 내가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깨달아간다는 성장소설의 요소를 적절히 결합시키고 있다.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고 한다면 불편할 것이고, 또 커다란 주제를 가진 작가라고 해도 버거워할 것이죠. 그 가운데 놓인 작가가 되고 싶어요"라는 김씨. 김씨의 고민은 'IMF 세대'로 불리는 자신들의 세대적 정체성이다.

운동권 조직은 와해되고 학생회는 등록금 투쟁을 하고 있을 무렵 대학에 입학한 그는 선배들이 "쟤들은 생각이 없어, 잘 노는 세대야, 세계로 가는 세대야"라고 자신들을 규정할 때 느꼈던 일종의 모욕감이 자신의 소설적 동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래의 기성 작가들이 개인의 내면 탐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세대가 처한 사회ㆍ경제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당선 소식을 전했을 때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김씨의 남편 역시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한 평론가 강경석(34)씨다.

"'여기 지루해, 저긴 감동적이야'라고 제 작품에 훈수 둘 때마다 '흥, 평론이나 쓰는 주제에 어떻게 소설을 알겠느냐'는 식으로 반발한다"고 말한 김씨는 "그래도 그 사람이야말로 내 소설의 가장 훌륭한 독자이자 비평가"라며 결혼 3년차 새댁다운 멘트를 날린다.

이미 쓴 습작들에 돈 문제, 삼각관계, 실업, 운동권 선배의 경험, 가족 등 많은 주제가 들어있다는 김씨는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쓸 수밖에 없어요. 어쨌든 생활이 묻어나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라고 했다.

■ 심사평/ 조화롭게 이야기 꾸려나간 구성 돋보여… 본선 세편은 현실괴리·상투성에 울림 못얻어

예심을 거쳐 올라온 10여 편의 작품 가운데 가상적 현실을 다룬 작품이 절반이 넘었다. 판타지든 알레고리든 그것이 현실 속의 문제와 축을 이루어야 울림이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최종적으로 네 편을 골라냈다.

'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수행해나가는 한 병사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가상공간의 게임캐릭터라면 이미 익숙하다 못해 식상한 소재이고, 현실 속의 전투라면 왜 이런 전투를 하는 것인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싱글 왈츠'도 노래방과 같은 형태로 눈물방을 운영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발상은 신선하나, 그렇게 흘려야 하는 눈물의 의미가 잡히지 않고 소설적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여자의 부엌'은 말만 부엌가구 디자이너이지 실제론 부엌가구를 팔러 다니는 여자의 핍진한 삶과 고객들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신분상승욕 등이 잘 그려져 있기는 하나, 그것이 치정으로 연결되고 그런 치정의 해결이 남자의 아내를 통해서라면 결말이 너무 상투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비해 '너의 도큐먼트'는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앞서의 작품들보다 문장 감각과 묘사력이 뛰어나다. 몇 개의 중심인물들의 삽화를 앞뒤로 잘 배치하여 전체 이야기를 조화롭고도 풍성하게 만들어내는 소설의 구성 솜씨도 돋보여 오랜 의논 없이 바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 그리고 올해는 뜻을 이루지 못한 응모자 모두 부디 정진 바란다.

●심사위원 이제하(소설가) 이순원(소설가)

이왕구기자 fab4@hk.co.kr

사진 김주영인턴기자(고려대언론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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