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은 음력으로 그 달의 맨 마지막 날이다. 그믐날이라고도 한다. 그 즈음에 잡힌 젓조기를 그믐사리라 하고, 그 즈음에 내리는 눈이나 비를 그믐치라 한다. 그믐은 보름과 서로 맞버티면서도 닮았다.
보름달과 그믐달의 생김새는 드다르지만, 보름날과 그믐날은 둘 다 여섯무날(한사리)이다. 그믐밤은 어둡다. 그래서 '그믐칠야(漆夜)'라는 말도 생겼다. 그믐께의 몹시 어두운 밤이라는 뜻이다.
그믐밤의 이미지는 보름밤의 이미지와 맞선다. 그 맞섬은 어둠과 밝음의 맞섬, 캄캄함과 환함의 맞섬이다. 그믐께부터 다음 달 초승까지의 며칠을 그믐초승이라 한다. 그믐의 상대어(흔히 말하는 '반의어')가 보름인지 초승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인위적으로(물론 그 인위에는 천체의 운행에 대한 관찰이 반영돼 있다) 갈라낸 시간의 끝과 처음이라는 관점을 취하면 초승이 그믐의 반의어가 되겠지만, 그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그믐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보름이다.
그리 보면 보름이 그믐의 반의어인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반의어'라고 부르는 것이 여러 겹의 두루뭉술한 개념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예컨대 '아들'의 반의어는 뭘까? 대뜸 떠오르는 말은 '딸'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기준들(예컨대 세대나 가족관계)을 붙박아 놓고 성(性)이라는 기준만을 고려한 것이다.
만일 성을 붙박아 두고 세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아들의 반의어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성과 세대를 함께 기준으로 삼으면 아들의 반의어는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성과 세대의 두 차원에서 동시에 아들과 대립하는 것이 어머니이므로, 어머니야말로 아들의 '진정한' 반의어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통 반의어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기준들을 붙박아 두고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삼는 의미적 대칭어다.
그래서 아들의 반의어를 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머니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얘기가 옆길로 샜다. 국어사학자들은 '그믐'이 '검다(黑)'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 공유하고 있는 어근은 kam-이다. '검다'는 <훈몽자회> 에서 '감다~검다'의 교체형을 보여 주는데, '감다'가 고형(古形)이고 '검다'가 그 발달형으로 보인다(이남덕 <한국어 어원 연구 3> , 27~28쪽). 어근 kam-에 담긴 것은 숯 빛깔이나 먹 빛깔처럼 어둡다는 뜻이다. 한국어> 훈몽자회>
이 견해에 따르면 '검다' 계열의 수많은 색채형용사(이를테면 까맣다, 꺼멓다, 가무죽죽하다, 거무죽죽하다, 거무스레하다, 거무스름하다 따위)만이 아니라, 까막눈, 까마귀, 가마우지, 가물치, 까마종이(가지과의 한해살이 풀. 까마중, 가마중, 깜뚜라지라고도 부른다. 익은 열매의 빛깔이 검다) 같은 말들이 죄다 '그믐'의 자매어다.
이남덕 선생은 더 나아가 '구름' '흐리다', '저물다' 따위의 말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본다. '흐리다'에선 '/k-/ > /h-/'의 음운변동이 일어났고, '저물다'에선 '/k-/ > /c/'의 음운변동(구개음화)이 일어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견해가 옳든 그르든, '/k-/ > /h-/'나 '/k-/ > /c/'의 음운변동은 다른 자연언어의 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깊이 알수없는 검정의 불투명성
요컨대 '그믐'은 '검음'이고 '검정'이다. 그믐밤엔 세상이 온통 검게 어둡다. 그렇다면 보름밤은 하얗게 밝은가? 보름달 수십 개가 한꺼번에 뜬다면 모를까 밤이 하얗게 밝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어둡지 않으면 밤이 아니다. 아무튼 그믐은 검정이고, 검정의 반대편에는 하양이 있다. 사람의 유전자에 박힌 별난 미적 감각 때문이든, 현재의 인종적 위계질서가 만들어낸 편견 때문이든,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검정보다는 하양을 높이 친다.
일부 종교 교파에서 거론하는 백마법(white magic)과 흑마법(black magic)의 구별, 바둑에서의 흰 돌과 검은 돌, 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등장하는 백기사와 흑기사 같은 표현에서, 대체로 하양은 선(善)함이나 우월함을, 검정은 악함이나 열등함을 표시한다.
'백설공주'(Snow White)의 백(白)은 잉여 표현이지만(눈은 정상적 상황에서 하얗기 마련이므로), 그 하양 덕분에 공주의 아름다움과 순결 이미지는 한층 짙어진다. "그 검은 속을 누가 알랴?" 같은 표현이나, 흔히 마수(魔手)의 유의어로 쓰는 '검은손'이란 표현에서, 검정은 음험함의 기호다.
이렇게, 하양은 진선미고, 검정은 위악추(僞惡醜)다. 그래서 한자어권에서든(黑白ㆍ흑백) 몇몇 유럽어에서든(영어의 'black and white'나 프랑스어의 'noir et blanc'), 그 둘을 함께 언급할 때 검정을 하양에 앞세우는 관행이 기묘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천오백여 년 전 주흥사(周興嗣)라는 중국인이 <천자문> 의 들머리에 '천지현황(天地埠?'을 얹었을 때, 그 세 번째 글자 '검을 현(玄)'은 전혀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거기서, 검다는 것은 깊숙하고 으늑하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바라본 밤하늘이 그랬을 것이다. 천자문>
그들 생각에, 검다는 것은 깊이나 두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두텁고 그윽하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하양의 투명성은 얄팍함과 경박함의 기호이기도 하다.
반면에 검정의 불투명성은 그윽함과 두터움의 기호다. 그렇다면, 그믐의 사랑, 검은 사랑을 깊고 그윽한 사랑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배려로 그득 찬, 무르익은 사랑 말이다.
그러나 둥그런 보름달에 견줘 그믐달의 가냘픈 외양이 어떤 결핍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보름달이 가득함의 기호라면 그믐달은 기욺의 극점이다. 그믐달 아래서 우리는 혼자일 것 같다.
그믐달은 혼자됨과 쓸쓸함과 소슬함의 배경이다. 그믐의 사랑은 왠지 짝사랑이거나 슬픈 사랑일 것 같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 같다. 그믐의 사랑, 곧 검음의 사랑은 구름의 사랑이고 흐린 사랑이고 저문 사랑이다.
한없이 짙어지고 깊어진 파랑이 검정이라면, 그믐의 사랑은 우울한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은 파랑'('Love is blue')이라는 영어 노래에서, 파랑이 뜻하는 것은 우울함이다.
이 노래는 앙드레 포프가 선율을 만들고 피에르 쿠르가 가사를 붙인 프랑스어 노래 'L'amour est bleu'(1967)를 번안한 것이다. 그런데 본디 프랑스어 가사에선, 파란색(bleu)이 회색(gris)과 대비돼, 외려 사랑의 기쁨이나 희망을 드러낸다.
가사를 영어로 번안한 브라이언 블랙번이 원작자의 속뜻을 바꿔버린 것이다. 프랑스어에서도 영어에서 차용한 '블루즈(blues)'란 말이 우울함을 뜻하긴 하지만, 영어에서와 달리 파란색(bleu) 자체가 우울함의 은유 노릇을 하진 않는다.
또다른 사랑 직전의 産苦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랑은 대개 (우울함의 기호로서) 파란색이거나, 한없이 깊어진 파랑인 검은색일 것이다. 고금동서의 이야기들 속엔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지천이다.
쉽게 이뤄진 사랑보다는 어렵사리 이뤄진 사랑이, 어렵사리 이뤄진 사랑보다는 끝내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 마음의 더 깊은 울림과 떨림을 낳는다.
<춘향전> 의 사랑이 두 번째 범주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나 <좁은 문> 의 사랑은 세 번째 범주다. 첫 번째 범주의 사랑, 곧 쉽사리 이뤄지는 사랑은 진지한 연애서사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좁은> 젊은> 춘향전>
사랑은 얄팍한 기쁨보다는 깊다란 슬픔에 더 가깝다. 더 나아가, 적지 않은 경우, 깊다란 기쁨보다 깊다란 슬픔에 더 가깝다. 옥에 갇힌 춘향의 사랑이나 스스로 죽음을 택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깊다란 슬픔의 사랑이고, 그믐의 사랑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이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주인공들이 보름달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공중을 날아가는 장면일 것이다. '이티'는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고 해피엔딩의 에스에프판타지이므로, 그 보름달-자전거 장면은 매우 적절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티'가 암울하고 끔찍한 미래를 그린 '19금(禁)' 호러 에스에프였다면, 스필버그는 보름달 자리에 그믐달을 배치했으리라. 그믐은 퇴락의 정점이므로.
그러나 앞서 내비쳤듯, 그믐과 초승은 아주 가깝다. 말하자면 사위어가는 그믐의 사랑은 새롭게 타오르기 시작할 초승의 사랑을 준비한다. 그믐의 사랑은 신생 직전의 사랑, 산고(産苦)의 사랑이다. 그런즉, 그믐의 사랑은 사랑의 원형일 것이다.
그것은 쓸쓸한 사랑이고 약한 맥박의 사랑이지만, 숨 가쁜 사랑이며 위대한 사랑이다. 삶이 그렇듯 사랑도, 기다란 슬픔과 슬픔 사이에 끼워진 짤따란 기쁨이고, 종(種)의 보전을 위한 기술이며, 신생을 위한 수고이므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그림 신동준기자 dj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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