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주의와 고립주의, 봉쇄정책과 유화정책….
언뜻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 외교의 변하지 않은 철칙은 무엇일까?
최근 발간된 마이클 헌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역사학과 교수의 <이데올로기와 미국외교> (산지니 발행ㆍ권용립 이현휘 옮김)는 미국외교정책의 저류를 흐르는 철칙을 3가지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 미국은 자유의 증진을 소명으로 삼는 위대한 나라라는 이념, 인종적 위계주의, 혁명과 같은 정치적 무질서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이다. 이데올로기와>
헌트 교수는 18세기, 19세기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이데올로기들이 20세기초까지 어떤 식으로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는가를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가령 인종적 우월감이 대표적이다.
책에 따르면 20세기 미국 지도자 가운데 앵글로색슨 이외의 인종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하는 인종적 위계질서에서 자유로운 지도자는 드물다. ‘일본인은 야만스럽고 무자비할 뿐 아니라 잔인하고 광적인 종자들’이라고 본 트루먼(민주당) 이나 ‘인도인은 괴상하게 생긴 놈들로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평한 아이젠하워(공화당)의 구별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인종적 편견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서도 뚜렷이 목격되는데 한국 현대사를 격동으로 몰아넣었던 신탁통치 찬반 논쟁도 “신탁통치를 필요로 하는 미성년 인종이 수없이 많은데 특히 ‘동아시아 황인종’이 그렇다”고 보았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인종적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을 묵인한 뒤 본국에 가서 “한국인은 들쥐와 같다. 민주주의란 한국인에게 부적절한 시스템”이라고 했던 당시 위컴 주한미군사령관 발언의 맥락을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다. 부시 행정부의 평양에 대한 장기간 고립정책 역시 미국의 위대성과 인종적 편견이라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공동 번역자인 권용립 경성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7년 출간된 책이지만 미국 외교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틀로서 이 책이 제시한 미국 외교의 세 가지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그대로”라며 “미국 외교 정책과 현실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20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미국 외교의 바탕과 방식을 보여주는 중후한 저작”이라고 소개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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