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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진연주, 방(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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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신춘문예/ 진연주, 방(房)

입력
2008.01.02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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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또 커졌어. 내 발이 23.7센티니까 정확하게 57.4센티미터가 더 커진 거야. 갑자기 이렇게 커진 적은 없었는데 정말 이상해. 그래 알아. 방이 커진다니, 미친 소리지. 그렇지만 정말 커지는 걸. 내가 맨날, 아니 만날 재본다니까. 거짓말 아니.

음성녹음은 1번, 청취는 2번, 재녹음은…….

그 사람의 전화기는 언제나 꺼져 있다. 나와 그 사람을 연결하던 유일한 지상의 선. 그 통로가 막혔으므로 나는 안심하고 번호를 누른다. 넌 물기가 없어, 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피부와 근육에 뻗어있을 말초신경을 생각했다. 이리저리 엉켜 하염없이 뻗어있는 신경의 잔가지들이 나의 어디쯤에 와 달라붙을지를 말이다. 고온의 전류를 받은 필라멘트가 끊임없이 밝은 빛을 뿜어내 주기를.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신경이 내 대퇴부나 견갑골, 허리의 어디쯤으로 촉수를 뻗칠 때마다 그의 격정은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교신이 끊기면 난 그 사람의 피스톤 운동이 일 분에 몇 번쯤 가능한지 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눈을 감고 누워서 그 사람이 뿜어내는 온기나 숨소리를 느끼는 일은 따뜻했지만 나의 내부가 타인이 발산하는 힘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 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움직임이 격정적일수록 나는 빳빳하게 경직됐다. 메마름, 그 결핍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일이 자극적이라고 했던 사람이 똑같은 이유로 신물을 느끼고 침묵하게 된 것 또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폴더를 닫는다.

오후 두 시, 방은 여전히 어둡다.

오전 여덟 시에서 열 시 사이 잠깐 햇빛이 들긴 하지만 해 든 방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정오에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개 밥을 준다. 개는 밥만 제 때 주면 귀찮게 하는 법이 없다. 안아달라고 보채지도, 꼬리 흔들며 아양을 떨지도 않는다. 잠을 자거나 발등을 핥아대는 것이 고작이다. 짖지도 않는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귀를 바짝 세울 뿐이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도 머리가 몽롱하거나 심심하면 다시 잠을 잔다. 잠에서 깨면, 어둠은 한층 깊어져 있다. 그제야 난 책상에 수북이 쌓인 원고 뭉치를 들춘다. 수능이 끝나면 원고는 더 많아질 것이다. 대학입시에 논술고사 배점이 커진다는 소문이 있고부터 일이 부쩍 많아졌다. 그렇다고 수입까지 눈에 띠게 늘어난 건 아니다. 건당 4천원, 첨삭 하나 하는 데 삼십 분 정도가 소요되니 쉬지 않고 열 시간을 일해야 팔만 원이다. 일당치곤 나쁘지 않은 액수다. 그러나 열 시간 동안 괴발개발 써놓은 원고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건 고역이다. 눈은 침침해지고 뒷목은 펼 수도 없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래도 일이 없을 때를 생각하면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벌써부터 속이 메슥거린다.

방이 또 커졌다.

방이 자라나는 걸 눈치 챈 것은 몇 달 전의 일이다.

손잡이 돌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101호 여자에게는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열쇠를 채우고, 손잡이를 이리저리 비틀어 보고, 다시 열쇠를 돌려 문을 여닫는 식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부산하고 신경질적이다. 오전 일곱 시 정각, 조심성 없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매번 잠이 깬다. 여자가 요란하게 문단속을 할 때마다 나는 이불 속에서 튀어나와 여자를 훔쳐본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내달았다. 도어아이를 통해 뒷모습이 보였다. 검정색 구두에 검정색 수트 차림의 여자. 여자가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는 언제나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걷는다. 뾰족한 구두 위로 곧게 뻗은 다리, 꽉 죈 스커트 위로 드러난 엉덩이의 윤곽, 잘록한 허리, 육감적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 있게 반들거렸고 언뜻 보랏빛이 감돌기도 했다. 머리카락 한번 지랄 맞네. 뱀처럼 미끌거려.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잖아. 소름 끼쳐. 여자가 마당으로 내려선 뒤 대문을 열기까지는 꼭 열세 발자국이 소요된다. 그러고서 조심스럽게 대문을 연다. 나는 여자의 조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쩐지 가식적이다. 조심을 하든 그렇지 않든 낡은 문짝은 언제나 끔찍한 소리를 냈다. 있는 대로 손톱을 세워 칠판을 긁어대는 것 같은. 아니, 멈춘 심장이 다시 뛰고 그래서 완벽한 어둠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 이가 질러대는 괴성 같은. 여자가 대문을 열고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지고도 한동안 대문은 음산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문짝이 움직일 때마다 벗겨진 페인트 밑에서 벌건 녹이 떨어져 내렸다. 방안에서 일렁대는 햇빛처럼 불쾌하고 속수무책이었다.

백까지 센 후 자물쇠를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몰려왔다. 숨을 고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여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잊고 나갔거나 아무래도 문이 신경 쓰이면 오십을 세기 전에 돌아왔다. 101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뗄 때마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사향노루가 흘리고 다니는 분朱?같은 냄새였다. 여자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떠올랐다. 엉덩이와 사향이라…… 찰떡궁합이로군.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여자처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비틀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술처럼 문이 열리는 순간, 내 몸이 여자의 방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문을 향해 돌아섰다. 여자의,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와 발을 뗄 때마다 탄력적으로 움직이던 엉덩이, 팽팽하고 단단하게 부풀어 깊은 곳의 윤곽까지 선연히 드러난 엉덩이, 남자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엉덩이를 여자는 지니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다시 한 번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발을 돌렸다. 방 안으로 희끄무레한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했다. 창 밑의 책상도 서랍장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원고와 붉은 사인펜과 컵, 지갑, 열쇠, 휴지 따위가 늘어져 있었다. 늘 보던 물건들임에도 왠지 낯설었다. 그리고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아니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개가 밤새 새끼를 낳았을 리도 없고, 도둑이 들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생경했다.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무언가? 잠이 덜 깨서 그래. 망할 년. 나는 101호 여자를 탓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오후 네 시, 방은 익숙한 어둠으로 덮여 있었고 언제나처럼 방문객 같은 건 없었다. 기지개를 켜고 열까지 센 뒤 몸을 일으켰다. 발치에 엎드려 있던 개가 굼뜨게 움직여 침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와 나는 서로에게 몰두하지 않는다. 길에서 조용히 따라온 개를 나 또한 조용히 맞아들였고 개는 당연한 듯 내게서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 받았다. 좁은 공간임에도 녀석은 나와 부딪치지 않고 용케 피해 다녔다. 한 공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경계로 서로의 영역을 교묘하게 확보하고 있는 셈이었다. 개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침대 끝으로 가 누웠다. 침대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무언가 휑했다. 책상을 향해 발을 뗐다. 발바닥이 장판에 들러붙어 내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나는 개를 돌아다보며 발소리를 죽였다. 책상 앞에 섰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낯섦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책상이 벽으로부터 시집 정도의 두께만큼 앞으로 나와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할 법 했지만, 그런 거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가슴은 이미 뛰고 있었다. 뭐야, 이건……. 주위를 둘러봤다.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이상했다. 손을 댄 기억은 없었다. 다른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있어야 할 자리, 꼭 그곳에. 당연히 그렇겠지.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변화 없이, 변함없는 것들이라야 안심이 된다.

책상을 밀었다. 끄덕도 하지 않았다. 원목 책상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게다가 비닐장판이 책상 다리에 꽉 붙어 책상을 밀 때마다 따라 움직였다. 책상 위의 물건들을 내려놓고 책상 끝을 들어 지그재그로 밀어 넣었다. 책상과 벽 사이의 틈이 엉성하게나마 메워졌다. 여전히, 휑했다.

방은 그렇게 조금씩, 그림자 지듯 소리 없이 자리를 넓혀갔다.

그리고 개미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프림 병뚜껑에 두 마리가 붙어 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은 병뚜껑 속에 숨어 있다가 뚜껑을 열자 잽싸게 움직여 달아났다. 붉고, 작았다. 개미란 걸 눈치 챈 것은 그들이 병을 타고 내려와 내 손등을 가로질러 완전히 종적을 감춘 뒤의 일이다. 개미라고는 새까만 외피를 지닌 것밖에 보아오지 못한 나로서는 그들이 지닌 빛깔이, 뭐랄까 퇴폐적이고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렬해졌다.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틈,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유유히 방안을 기어 다니다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죽은 벌레를 무심히 지나쳤고 과자 조각이나 설탕, 심지어 꿀마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낙지처럼 비린 것에도 태연했다. 테이프로 눌러 죽이고 살충제를 뿌려도 그때 뿐, 며칠만 지나면 숫자는 배가 되었다. 그들이 가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정수기를 타고 나와 컵 속에서 꾸물거렸고, 개켜 놓은 옷이나 신발 속에서 기어 나오기도 했다. 스피커가 지직거려서 열어 보면 한 떼의 무리가 석류 터지듯 흘러나왔다. 그래도 그런 일쯤은 참을 수 있었다. 피부에 닿는 물건에서 그들을 발견할 때는 절로 욕지기가 터졌다. 팬티 속에 짓눌려 있는 붉은 곤충이라니. 수시로 몸을 쓸어냈다. 그리고 아무 때나 팬티 속을 들여다봤다. 팬티를 들출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헛배가 부르거나 생리가 늦어지면, 약수를 마신 후 뱀 새끼를 낳았다는 어떤 여자의 얘기가 생각났다. 그들이 질로, 자궁으로, 새빨갛게 몰려드는 상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끔찍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처음 본 바다, 그곳을 덮고 있던 노을, 나만의 방, 가득 찬 침묵과 고요, 그리고 작은 일기장…….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생각해낼 것이 없었다.

이 집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떠난 후엔?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매달리는 건 헛수고다. 그래서 난 뜀틀도 넘지 않았고, 미적분 문제엔 손도 대지 않았다.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만족했다. 애초부터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삶이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위한 도정이라고들 한다. 궁극엔 그곳에 도달할 것이라고도. 그런데 '의미' 있다는 건 또 무어지? 봄이면 피어나는 꽃은 의미 있을까? 유기된 애완동물을 데려다 키우는 것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아는 것? 그래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유수의 기업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 붕괴된 건물 잔해에서 기사일생한 사람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까? 무엇이 유의미하고 무엇이 무의미한 것이란 말인가? 그에 대한 무지로 내 삶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저 방이 자라는 것을 멈추고, 개미가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만 했으면 좋겠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개미약은 끝내 오지 않았다.

수요일의 남자다.

그들이 아무리 용의주도하다 해도 낡은 대문이 내는 소리는 어쩔 수 없다. 대문은 온몸의 뼈가 뒤틀리고 꺾이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힘을 주어 단번에 열거나 아주 천천히 열어도 마찬가지다. 주 5일 동안 각기 다른 남자들이 같은 소리를 내며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월요일의 남자는 누구보다 요란하다. 들어오는 시간도 나가는 시간도 일정치 않다. 남자는 매번 스타일이 바뀌는 자신의 옷처럼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으나 호기심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남자의 한계다. 화요일의 남자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십 대의 중년이다. 올 때마다 양복이 바뀌는 것 말고는 지루할 정도로 평범한 사내다.

그리고 이 남자, 수요일의 남자는 언제나 모자를 눌러쓰고 두툼한 파카에 청바지 차림이다. 모자 밑으로 드러난 턱 선이 가녀린 것에 비해 코는 크고 우뚝하다. 코가 얼굴의 반은 차지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얼굴이 만들어 내는 표정 또한 불균형하다. 마당을 가로질러 103호로 들어가기까지, 그는 늘 쭈뼛거린다. 망설이고, 서성이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커다란 코가 씰룩인다. 그가 마당에 서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나는 담배 길이가 왜 8.3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그는 손끝으로 담배를 튕겨 불을 끈다. 언제나, 늘, 같은 모습이다. 그가 버린 담배꽁초는 유리병에 담겨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간혹 그것들을 꺼내 입에 문다. 더러는 일을 하는 내내 물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가 103호로 들어간 후 다시 나올 때까지도 내 입에는 그의 담배가 물려 있다. 담배를 물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가끔은 담배에 불을 붙여 개미를 태워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목요일, 금요일의 남자……. 나는 103호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궁금해 한 적도 없다. 103호 여자는 그들이 방문할 때마다 왔어요? 라고 말하는 여자일 뿐이다.

온몸의 촉수를 곤두세운 채 벽에 귀를 댄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은 계속 자라난다. 어둠 속에 촘촘히 박힌 이빨 같다.

가구가 놓인 자리를 빼면 방의 크기는 가로로 열아홉 걸음, 세로로 열다섯하고 반걸음이다. 처음 쟀을 때보다 세 걸음씩 커진 셈이다. 나는 그 공간이, 공간의 비어 있음이 두렵다. 인터넷 쇼핑몰에 구십 센티미터 길이의 콘솔을 주문했다.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가구를 산 것은 처음이다. 개는 방이 자라고부터 부쩍 수척해졌다. 때 없이 짖기도 하고 자주 놀란다. 늘 따라다니고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문을 긁으며 낑낑거리는 식이다. 그러나 눈빛만은 형형해졌다. 동그란 눈이 어느 순간 길쭉하게 찢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그런 변화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니 만큼 당혹스럽다. 간혹 무언가 탐색하는 것처럼 번득 날을 세우기도 하는데 그럴 때 개의 눈빛은 103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남자들처럼 번들거린다.

그 사람도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혼자 사는 여자의 집을 방문하는 남자들의 눈빛은 모두 같아지는 것일까. 그 사람이 내 집을 다녀간 날이면 늘 같은 꿈을 꾸었다. 흰 면사포를 쓴 채 죽어 있는 꿈. 목구멍엔 검고 반질반질한 말뚝이 박혀 있고 가슴 위에 놓인 손가락엔 실뱀이 친친 감겨 있다. 그 이미지는 흐르지 않고 사진처럼 고정된 채 머물렀다. 나는 꿈속의 나를 조용히 내려다 보다 잠이 깨곤 했다.

수요일의 남자가 버린 마일드 세븐을 물고 청소를 시작한다. 침대 시트를 털고 책장에 쌓인 먼지를 쓸어낸다. 개미가 먼지 보다 많다. 걸레질을 하는데 개가 연신 알짱댄다. 번거롭고 번잡하다. 비어 있는 공간 쪽으로 개를 몰자 제 목을 조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흡煞?몸을 버둥댄다. 침을 흘리며 있는 대로 짖어댄다. 개가 저렇게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개 짖는 소리 때문에 귀가 얼얼하다. 하는 수없이 녀석을 지나친다. 며칠 째 녀석의 밥그릇은 가득 찬 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하루가 다르게 살이 내린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코도 바짝 말라 있다. 개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변화 없이, 변함없는 것들 속에서만 안심할 수 있다. 한숨을 내쉰다. 개는 비로소 조용하다. 그러나 이 적막은 참을 수 없군.

103호와 면해 있는 벽 쪽으로 몸을 바싹 붙인다. 벽에 입을 대고, 왔어요? 라고 속삭인다. 수요일의 남자는 항상 똑같다. 망설이고, 서성이고, 커다란 코를 씰룩이며 마일드 세븐을 피우고, 손가락을 튕겨 불을 끈다. 다른 남자들처럼 동선을 익히는 데 며칠, 몇 달, 몇 년을 허비하지 않아도 좋다. 그가 다른 남자들과 다른 또 하나는 눈빛이다. 그의 눈에서는 맥박 뛰는 소리가 난다. 그의 눈동자는 쉼 없이 흔들린다. 왼쪽과 오른쪽의 눈동자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본다. 허공과 지상을 오가는 그의 눈은 항상 촉촉하다. 그는 쭈뼛거리고, 망설이고, 서성이고, 생각한다.

그 생각 속에는 말뚝을 입에 박은 내가 있다. 흰 면사포를 쓴 나는 아름답다. 그의 눈길이 허공을 배회하는 동안 103호 여자는 옷을 벗는다. 풍만하다. 엷은 색의 젖꽃판 위로 유두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다. 여자의 거웃은 말의 갈기 같다. 검고 무성하다. 여자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띠를 움켜쥔다. 그는 쭈뼛거린다. 여자가 지퍼를 내린다. 속옷이 불룩 솟아있다. 그는 망설인다. 여자가 그의 손을, 자신의 단단한 젖꼭지로 가져간다. 여자의 입이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작은 불씨 하나로도 활활 타오를 것만 같다. 여자의 손이 그의 음경을 자극한다. 그는 망설이고, 생각한다. 그 생각 속에는 실뱀이 친친 감긴 내 손가락이 있다. 개가 발등을 핥는다. 나는 눈물을 훔친다. 상상에서 깨어날 때는 언제나 울고 있다.

벽에 귀를 댄 채 속삭인다. 왔어요?

103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콘솔이 도착했다. 택배 기사가 자리를 잡아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나는 내 방을, 매일매일 의뭉스럽게 자라나는 방을 들키고 싶지 않다. 바글거리는 붉은 개미떼도 마찬가지다. 콘솔은 생각보다 무겁고, 걸을 때마다 다리 사이를 오가는 개는 귀찮기만 하다. 오른쪽 발로 개를 밀어낸다. 개가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다리를 휘저어 보지만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할 뿐 좀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콘솔의 무게만큼이나,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개의 의지도 무겁다. 꼼짝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대신 나를 정면으로 쏘아본다. 광채가 섬뜩할 정도다. 왼쪽 발에 힘을 주어 개를 찬다. 그 바람에 바지가 찢어진다. 개는 찢겨 나간 천을 물고 빈 공간 쪽으로 나둥그러진다. 개가 맹렬히 짖는다. 흠칫 뒤로 물러난다. 개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린다. 이빨 사이로 흰 거품이 부글거린다. 개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걷어찬다. 동시에 개 이빨이 종아리에 박힌다. 흰 이빨이 금세 붉어진다. 개의 턱을 타고 피가 흐른다. 그제야 개는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난다. 나는 피가 흐르는 종아리를 한 채로 콘솔을 움켜쥔다. 손목에 푸른 핏줄이 돋는다. 콘솔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도 쉽사리 틈에 들어가 박힌다. 그러나 콘솔과 벽 사이에는 또다시 손가락 세 개 만큼의 공간이 남는다. 도대체 너는…… 이 방은……. 참을 수 없다. 이불로 공간을, 자라나는 방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불에 수놓인 꽃이 텅 빈 공간에 박힌다. 순간 주춤한다. 이불 틈에서 촘촘히, 무리를 지어 밀려 나오는 것들, 그들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들은 꾸역꾸역, 서로를 타고, 오르고 내리고 길을 터주고 또다시 뭉치면서 끊임없이 기어 나온다.

망할, 어쩌란 말이야? 이 미친 것들! 살충제를 뿌려댄다. 소용없다. 개미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개 짖는 소리 때문에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다. 그래, 불! 성냥불을 그어 던진다. 붉은 것들이 서로 엉켜 불인지 개미인지 분간할 수 없다. 서로 먹고 먹힌다. 그 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개가 펄쩍 뛰어오른다. 담요를 던지고, 두 발로 붉은 것들을 짓이긴다. 다행히 불길은 쉽게 잡힌다.

몸이 쉬지 않고 떨어댄다. 내 것 같지 않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장롱과 식탁과 행거와 이불을 닥치는 대로 주문한다.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자꾸만 떨어지려는 걸 간신히 잡고 수첩을 넘긴다. 오래된 이름들로 가득하다. 그들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젠지, 연락이 끊긴 게 언젠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는 익숙했던 이름들, 사람들, 그들은 시간이 사라지는 곳을 향해 빠르게 가버렸다. 결국 누를 수 있는 번호는 하나뿐이다. 목이 데일 듯 뜨겁다.

방이…… 멈추질 않아. 이러다, 이 방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돼 버리면 어쩌지. 아니, 그건 상관없어. 단지 난…… 개미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나조차 믿을 수 없으니까.

폴더를 닫는다.

내 몸의 떨림을 억제할 수 없다.

개는 어느새 내 허벅지에 바투 몸을 붙인 채 엎드려 있다. 넓적다리뼈는 엉덩이를 찌를 듯 강퍅하고 주둥이는 한층 뾰족해 보인다. 등뼈도 앙상하다. 손가락 하나를 등뼈로 가져간다. 녀석의 등뼈엔 우툴두툴하게 골이 나 있다. 작은 공기돌이 놓여 있는 듯도 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고생물의 뼈 같기도 하고, 치아 표본을 박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 느낌이 손가락 두 개에서 네 개로, 그리고 손바닥 가득 전해진다.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 손은 이제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다. 그 손등을 또 녀석이 핥는다. 매끄럽고 따뜻하다. 따뜻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개에게 물렸던 종아리가 타들어갈 듯 아프다. 송곳니가 박혔던 곳이 갱도처럼 캄캄하다. 아니면 바다. 수초의 움직임처럼 유선형으로 난 핏자국 위로 또, 삽시간에 그들이 몰려온다. 핏물처럼 붉은 그들은 흡사 어미의 등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피파개구리의 알 같다. 모골이 송연해짐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다리에 붙은 개미를 털어낸다. 비명을 지르고, 손으로 연신 다리를 쳐대지만 그들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손에도 개미가 달라붙는다. 소름이 끼친다. 맙소사. 개 짖는 소리에, 내가 지르는 비명에 고막이 터질 것만 같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맙소사. 욕실로 뛰어가 수도꼭지를 돌린다. 수압 때문에 샤워기를 놓친다. 천정을 향해 물줄기가 치솟는다. 온몸이 젖는다. 구토인지 욕설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들이 목구멍을 치받고 올라온다. 샤워기를 잡고 다리, 아니 그들을 향해 물줄기를 들이댄다. 붉은 것들이 물에 휩쓸려 수챗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진다.

힘이 쭉 빠진다. 몸도, 얼굴도 푹 젖어있다. 젖은 채 욕실을 나선다. 개는 아직도 으르렁거리고 있다. 발치에 있던 슬리퍼를 힘껏 던진다. 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난다. 푸른 광채가 선연하다. 개를 흘긋거리며 최대한 멀리 돌아 방으로 들어간다. 어딘가에 약솜이 있을 것이다. 서랍을 여닫는 손이 멈출 줄 모르고 떨린다. 약솜은 생리대 사이에 처박혀 있다. 종아리를 바투 잡아당긴다. 상처를 닦아낸다. 깊게 팬 상처가 솜이 닿을 때마다 화끈거린다. 눈물이 난다. 내 근육은 고통만은 생생하게 감각한다. 그것은 잊히지 않고 화인처럼 박힌다. 그 사람이 처음 내 몸을 밀고 들어왔을 때의, 그 아찔한 이물감이 여전히 또렷한 것처럼.

마일드 세븐을 물고 불을 붙인다. 라이터는 좀체 점화되지 않는다. 라이터돌을 열한 번째 돌리고 있을 때 대문 소리가 들린다. 다른 때보다 더 크고 기분 나쁘다. 아직 수요일의 남자가 떠날 시간은 아니다. 그는 세계가 눈 뜨는 시간, 어둠이 깊어져 온 세상의 불빛이 반짝이는 시간에 떠난다. 그가 떠나면 나는 마일드 세븐에 불을 붙이고, 어쨌든, 일을 시작할 것이다. 집 밖에 나갈 일은 없으나 그렇다고 먹는 것까지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은 알약 하나로 공복감을 없앨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면. 우습다. 방은 커지고 개미는 몰려오고 개는 점점 이상해지는데 단지, 살아가기 위해 먹는다는 것이. 하지만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죽음조차 희망한 적이 없다.

문을 향해 움직인다. 한쪽 다리가 마지못해 끌려온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간신히 문 앞으로 간다. 도어아이에 눈을 댄다. 희뿌옇다. 소맷자락으로 렌즈를 닦는다. 101호 여자다. 여자의 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느리다. 여자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자가 바라보는 하늘을 나도 보고 싶다. 그러나 도어아이로는 하늘을 볼 수 없다. 나는 여자의 눈동자에 담겨 있을 하늘을 상상한다. 별이 여자의 눈동자에 내려와 반짝인다. 나는 아직 울고 있다.

여자가 핸드백을 뒤져 무언가 꺼낸다. 가늘고 긴 담배다. 수요일의 남자가 피우는 마일드 세븐은 8.3센티미터이다. 저 담배의 길이는 얼마쯤 될까? 여자가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쪼그려 앉는다. 한 모금 빨고 다리 사이에 머리를 파묻는다. 여자의 몸은 이지러짐 없이 둥근 한 마리 고슴도치가 된다. 여자의 손끝에서 담배가 타들어 간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어깨를 드러낸다. 작고 얇다. 잠깐 숨이 멎는다. 숨을 쉬면 여자가 일어나 가버릴 것 같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쉰다. 명치가 뻐근하다. 여자의 어깨는 얇고 작다. 그곳에 손을 얹고 싶다. 여자의 동그란 등은 내 가슴에 꼭 맞을 것이다. 나는 아직 울고 있다.

당신의 방도 자라나요? 그래서 틈을 메우기 위해 당신도, 쓸모없는 물건들을 사들이나요? 그런데도 방이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겠죠? 당신의 방에도 개미가 들끓는 거예요?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나가서, 안녕究셀? 인사만 건네면 된다. 날씨 얘기를 하고 안부를 묻고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는지 수압은 센지 변기가 자주 막히지는 않는지 묻기만 하면 된다. 여자는 날이 건조해서 비염이 도졌다고,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아서 전기 쓸 일은 얼마 없다고, 수압 때문에 자주 물벼락을 맞고 변기는 자주 막힌다고, 그래서 짜증이 난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뒤 당신 방과 내 방은 아주 많이 닮았군요 라고, 등을 토닥여 주기만 하면 된다.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이쪽으로 걸어온다. 가슴이 뛴다. 여자가 점점 가까워진다. 가슴에서 팔뚝만한 물고기가 펄떡이는 것 같다.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가 사라진다.

나는 여전히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여자의 동그란 등은 내 가슴에 꼭 맞을 것이다.

속으로 백을 세고 조용히 문을 연다. 마당으로 내려가 주위를 둘러본다. 여자가 버린 담배가 구석에서 타고 있다. 담배가 꺾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불을 끈 후 손에 쥔다. 101호 불빛은 흰색이다. 하얀 방에서 여자는 하얀 목을 꺾어 별을 볼 것이다. 여자의 몸에 별이 박힌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밝고 차갑다. 나는 그 별에 숨을 불어넣고 낯선 말(言)들이 공중에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말들을 향해 여자가 손을 뻗는다. 여자의 손에 잡힌 말들이 말초신경의 잔가지처럼 수없이 뻗어 나와 나의 내부에 달라붙는다. 여자와 나는 비로소 교신한다.

그 순간 문이 열린다. 수요일의 남자다. 그와 내 눈이 뒤엉킨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는다. 그도 움직이지 않는다. 내 손은 101호 여자의 담배를 쥐고 있다. 손이 떨린다. 담배를 입에 문다. 시간이 흘러내린다. 지극히 짧고, 긴 시간이다. 그가 마당으로 내려와 손을 뻗는다. 그의 손에서 불이 반짝 켜진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숙인다. 빨간색 운동화에 끈이 풀려 있다. 끈은 땅에 끌려 끝이 새까맣다. 그의 발에 수없이 밟히고 그의 걸음을 수없이 낚아챘을. 눈꺼풀이 푸르르 떨린다. 그도 마일드 세븐을 꺼내 불을 붙인다. 불을 붙일 때 잠깐, 그의 눈동자가 보인다. 왼쪽은 담배를 향하고 오른쪽은 103호를 향해 있다. 103호 문은 닫혀 있다. 왔어요? 라고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귓바퀴에서 뱅뱅 돈다.

다리를 다쳤나요? 그의 목소리는 저음이다. 입안에 가득 침이 고인다. 나는 대답 대신 피딱지가 앉은 다리를 내려다본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운다. 하늘은 검고 우리가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는 하얗다.

당신은 왜 늘 쭈뼛거리고, 망설이고, 서성이고, 생각하나요? 당신을 빨아들이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가 담배를 튕겨 불을 끈다. 나도 서둘러 담배를 끈다. 그가 내 곁을 스쳐 대문을 나선다. 대문에서는 언제나 기분 나쁜 소리가 난다. 그가 사라진 곳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아니면, 아니면…… 말뚝을 입에 박은, 실뱀을 친친 감은 내 손가락이…….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 갇힌다.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말을 나눈다는 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의지이고, 시작은 그게 무엇이든 변화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다.

방이 자라는 것은, 그 중심에서 미친 듯 돌올하는 광기는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두려운 것도 아니다. 신경이 쓰일 뿐이다. 그래, 다만 거추장스럽고 신경이 쓰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개까지. 주위를 돌아본다. 개는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방이 자라기 시작한 후로 내 곁에 착 달라붙어 있던 녀석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개와 나는 어차피 서로에게 몰두할 필요도, 몰두하지도 않는 사이다. 그 편이 편하다.

천천히, 왼발과 오른발 끝을 정확하게 맞추어 걷는다. 보폭이랄 게 없어 자꾸만 몸이 휘청거린다. 방은 이제 가로로 스물한 걸음, 세로로 열일곱하고 반걸음이다. 방은 계속 자라나고, 그러나 그것을 확인해 줄 사람은, 내가 꿈꾸고 있거나 미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화번호는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뿐이고, 그 사람의 전화기는 언제나 꺼져 있다. 101호 여자의 어깨는 너무 얇고 수요일의 남자,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 흔들린다. 더구나 해야 할 일도 산더미다. 원고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오늘 하루, 반 정도는 끝내서 퀵서비스로 보내야 한다. 방은 부화한 새들이 날아간 둥지처럼 어수선하다. 창문엔 하얗게 성에가 끼어 있다. 창문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고양이가 지나가는지, 누군가 우는지…… 창 저쪽은 온통 암흑이다.

빗자루를 꺼내 든다. 바닥을 쓸어낸다. 빗자루가 스칠 때마다 비닐장판에 정전기가 생긴다. 머리카락이 장판에 달라붙어 있으면 손으로 쓸어 모을 수밖에 없다. 한곳에 모인 것들을 꼼꼼히 살핀다. 먼지와 머리카락과 개털, 몇 마리의 개미가 전부다. 뭔가를 물고 있다. 누렇고 딱딱해 보이는 것들이다. 그들이 뭔가 물고 있기는 처음이다.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짓이긴다. 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침대 밑에는 없다. 이불 속에도, 책상 밑에도 없다. 행거에 걸린 옷들을 젖힌다. 행거와 벽 사이가 또 벌어져 있다.

개미떼가 바글거린다. 새빨갛다. 무언가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다. 개는, 그들 밑에서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어 있다. 개미떼에게 덮여 있는 개는 흡사 붉은 녹 덩어리 같다. 나는 그 앞에 한참이나 서 있다. 지금 이 상황은 공포스러운가.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열 지어 사라지는 개미떼를 바라볼 뿐이다. 개미들이 떨어져나간 곳에서 개의 살점 몇 개가 촛농처럼 흘러내린다. 개는 살갗을 연 채 죽어 있다. 젖혔던 옷들을 바로 잡는다. 개는 옷 뒤에 갇힌다. 하루, 이틀 썩어갈 것이다.

붉은 펜을 들고 책상 위에 있는 원고 중 하나를 뽑는다. 원고는 타이프라도 한 듯 깔끔하다. 꾹꾹 눌러쓴 글씨에서 검은 잉크가 흐를 것만 같다. 나는 한동안 망설이다 수인의 딜레마로 시작되는 원고를 읽는다. 순간 자음과 모음이 으깨져서 다 타버린 형광등처럼 깜빡이다 꺼져 버린다. 원고에는 검은 얼룩만 남는다. 얼룩을 매만진다. 얼룩은 원고 위에서 잠시 퍼덕이다 내 손가락으로 빨려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고 내 몸이 검은 얼룩으로 뒤덮이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둠이 짙어진다.

방은 이제 가로로 스물한 걸음, 세로로 열일곱하고 반걸음이나 됩니다. 방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당신은 방이 자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나요? 다행히 개는 죽었습니다. 첨삭란에 붉은 펜으로 또박또박 적는다. 다른 원고에도, 또 다른 원고에도 모두 같은 내용을 적어 넣는다. 책상 위에 있던 원고가 금세 줄어든다. 서류봉투를 꺼내 원고를 넣고 테이프로 봉한다. 퀵서비스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든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중입니다.

조용히 폴더를 닫는다.

(끝)

■ 인터뷰-"정해진 틀 싫어해… 쓰고 싶은 걸 쓸것"

"충동적이에요. 무계획이 계획인 삶이죠(웃음). 일기장, 블로그에 혼자 써오던 글을 문학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한 지 15년만에 문예창작과에 편입했고요."

진연주(39)씨의 문청(文靑)으로서의 삶은 2년 전 '문득' 시작됐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습관처럼 신변잡기를 써오다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충동에 휩쓸려 2005년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습작을 하고, 등단의 문을 두드렸다. 유난히 글이 안써지던 올 하반기, 겨우 완성한 작품 한 편을 정성껏 퇴고해 한국일보에 보냈고 당선 통보를 받았다.

당선작은 자고 일어나면 커져 있는, 실연(失戀)한 여자의 방에 관한 이야기다. 진씨는 "어느날 방이 커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며 작품의 모티프를 설명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버린, 이질적 느낌에 공포스러웠다. 만약 내면이 텅 비어가고 타인과의 접촉이 희박해져가는 사람에게 이런 순간이 들이닥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응모작 대다수가 밖으로 한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는 자폐적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는 심사위원들의 평을 전하자 진씨는 "사회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은 진화됐지만 진정한 소통 기회는 협소해졌다"며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 외엔 대화 나눌 사람이 없지 않나 싶다"고 답했다.

진씨는 문창과 재학 시절 박범신 교수의 충고 덕에 더 나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내 소설이 자의식 과잉이라고, 그걸 깨버리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할 거라고 말씀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런 구절을 짚어보시라고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 후 예전 작품을 읽어보니 문장 하나하나에 내가 들어앉은 듯한 느낌에 끔찍했다." 이때부터 초고를 마치면 집필 당시의 주관적 열정이 가라앉을 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퇴고를 한다.

진씨는 창작에 있어 첫 문장의 발견, 찰나의 낯선 경험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문적 문학 수업을 받으며 새삼 깨달은 것은 자신이 틀을 생래적으로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다가, 길을 걷다가 첫 문장이 떠올라 아무 생각 없이 쓰다보면 어느새 한 편이 완성된다. 반면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면 도무지 안써졌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그저 쓰고 싶은 걸 쓰겠다"고 했다.

■ 수상소감-"내삶의 희망인 소설… 멍석은 깔렸다"

세밑 분위기 탓일까. 어둠의 수위가 아찔할 만큼 높다. 주변이 술렁이고 번잡하고 활기에 가득 찰수록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ㆍ공간의 감촉은 차고 낮고 깊다. '혼자'라는 것이 지독한 추위로 느껴진다. 추억으로만 남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헤아려 본다. 떠난 이는 없지만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어디에 있을까 무얼 하고 있을까 그들은, 따위의 생각들을 해보아?오수 취한 꿈에서나 잠시 스칠 뿐, 종적 알 길 전연 없다. 유난히 살결 뽀얗던 그 아이, 웃으면 충치까지 환했던 그녀, 햇살 등진 채 굴러오던 자전거, 손 흔들던 그…. 일화나 추억 대신, 이렇듯 떠올리는 자가 기억하는 것이란 그들을 대신하는 두어 음절 화석화된 이미지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애달프고 그리운지도.

내게 소설은, 그들을 기억하는 내 방식처럼 파편화되고 맥락 없는 어떤 것이다. 무엇을 어떤 그릇에 담아 어떻게 차려내야 할지, 요령부득이다. 그러나 내 삶이 유일하게 희망했던 것은 소설. 그러니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삶에 아부하기 위해서는 쓰는 길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이제, 마음껏 굿이라도 쳐보아라, 멍석까지 깔렸으니 손 놓기는 글렀다. 잘 되었다.

고마운 마음이 너무 커서 일일이 호명하기도 어렵겠다. 뽑아주신 분들, 박범신 선생님, 그리고 생인손처럼 아픈 내 식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진연주(秦延周)-1968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 심사평 - “참신한 발상·완성도·디테일 배치 인상적”

본심대상작으로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작품은 모두 4편이었다. 한데 모아 놓고 보니 모두 현대인의 고독에 관한 소설이었다. 어느 소설의 주인공도 단독자가 아닌 인물이 없었고, 그들 모두는 집이 아닌 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는 물론 국가, 사회, 가족으로부터 유폐된 채 홀로 존재하는 단독자들. 공교롭게도 이런 주인공을 다룬 소설들만이 단편소설 특유의 열도와 밀도를 획득하고 있었다.

동질적인 소설들 틈에서 한 편을 고르다 보니 심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질적인 작품들 사이에서 한 편을 고르는 선택과 결단 대신 완성도만 따져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장벽씨의 <카르마(Karma)-표본>는 실현되지 않는 기다림과 낯선 침입자를 통해 현대인이 고독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나 여러 장면에서, 특히 나비 표본에 관한 장면에서 상투형을 넘지 못했다. 역시 낯선 침입자들과의 기이한 동거를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허무를 다룬 김태정씨의 <독백>은 신성한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상징화하는 능력이 단연 돋보였으나 기시감이 짙었고 또한 독자의 예상을 배반하는 소설 구성의 전복성이 미약했다. 차영일씨의 <세러모니 소동>는 아비보다 빨리 늙어가는 아들/딸들과 점점 젊어지는 어미의 대비를 통해 문명 속의 인간의 쇄락을 그려낸 작품은 신인다운 활력이 넘치는 작품이었으나 문장이 불안정했고 소설의 마무리가 느닷없다는 느낌이었다.

반면 진연주씨의 <방>은 거의 결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그'가 떠난 후 매일 방이 커나가서 그 공백을 필요치 않은 물건으로 채워간다는 발상이 우선 참신했고, 또한 그러한 경이로운 디테일들을 하나의 질서로 모아내고 배치하는 솜씨도 발군이었다. 간혹 앞선 작가들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대목들은 마음에 걸렸으나 생활세계(혹은 의식)를 잃고, 대신 그 자리를 환상(혹은 무의식)으로 메워가는 현대인의 실존형식을 이만한 필치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작품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당선자와 모든 응모자들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심사위원=이인성(소설가)ㆍ이순원(소설가)ㆍ이혜경(소설가)ㆍ우찬제(문학평론가ㆍ서강대 교수)ㆍ류보선(문학평론가ㆍ군산대 교수)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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