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동서고금의 책에서 국정운영의 힌트를 얻는 '독서정치'로 유명하다. 국민이나 정치권과의 소통에 유달리 인색했던 그가 돌연 대연정 등의 깜짝 구상을 하게 된 계기도 책이었다.
그런 노 대통령이 2006년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밝힌 후 한 권의 책을 놓고 참모들과 둘러앉았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을 지낸 조지프 나이 교수가 펴낸 <국민이 정부를 불신하는 이유(why people don't trust government)> 라는 책이었다. 국민이>
1960년대 75%에 달했던 연방정부 신뢰도가 90년대 들어 25%로 급락한 배경과 원인을 분석한 이 책은 소득이 높고 민주화한 국가일수록 국민의 정부 불신이 높아진다는 논지를 편다.
정부역할에 대한 과잉기대, 진흙탕식 여야 정권다툼, 언론의 선정주의, 개인주의 성향 팽배 등 민주적 정치 시스템의 단점이 서로 맞물리면서 국민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정지출 확대를 요구하면서도 세금 인상에 거부감을 갖는 대중의 이율배반적 행태도 지적됐다.
■ 구세주 신드롬 낳은 정부 불신
참여정부의 개혁추진과정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기보다 오히려 불신만 커가는 상황을 답답하며 논리적 설명과 위안을 찾던 노 대통령으로선 깊은 인상을 받았을 법도 하다.
당시 청와대가 노 대통령과 참모들이 이 책을 읽고 토론한 사실을 공개한 것을 보면 정부 불신이 참여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추세임을 강변하려던 행간이 읽힌다. 그러나 거기서 그쳤다.
국민과 소통하며 사회적 기대수준을 적절히 조절하는 개방형 정치체제를 강조하고 장밋빛 전망으로 채색된 포퓰리즘 정책의 역효과를 경고한 메시지를 간과한 것이다.
최근 한국 행정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한 논문은 우리 국민의 정부 불신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대다수 국민이 '공직사회는 부정직하고 부패하며, 법을 지키지 않고 세금을 낭비하며,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특히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전 부문에 걸친 불신이 민주화가 완성됐다는 지난 10년간 더욱 심화됐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등장은 일차적으로 경제를 살리는 '구세주의 재림'을 염원하는 민심을 반영한 것이지만, 더 깊게는 이 같은 불신과 의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당선자도 여기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은 오만한 여권 세력을 격렬하게 응징했다는 흥분과 CEO형 지도자의 출현에 거는 열기로 들떠 있지만, 흥분은 가라앉고 열기는 식게 마련이다. 기대가 크고 주문이 많을수록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실망과 불신도 큰 법이다.
'신 발전체제'를 화두로 꺼낸 이 당선자는 요즘 어디서든 '실용으로 무장한 낮고 겸손한 권력'을 강조하며 속도전을 펼친다. 대통령직 인수위에 신속함과 효율성을 주문하고, 대기업 총수도 서둘러 만나 투자 확대를 요청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엊그제 그는 "나도 5년이 잠깐인 것을 안다. 괜히 폼 잡다가 망치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국민들의 기대를 생각하면 당선 기쁨은 잠시이고 '이 일을 어찌할꼬' '어휴, 어떻게 해야 하나'가 솔직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 '소통하는 추진력' 약속 지켜야
그럴 것이다. 추진력과 결단을 평생의 덕목으로 자랑하며 대기업 CEO와 서울시장 재직 시절 화려한 성과와 업적을 쌓은 그이지만, 대통령직은 그런 덕목만으로 안 된다.
다양성을 껴안는 소통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변심'이 특권인 민심의 바다를 항해하려면 때론 항로를 우회하는 용기도 필요하고 때론 속도를 늦추는 지혜도 가져야 한다. 기득권의 격랑은 과감히 헤쳐나가야 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다.
이 당선자는 불도저라는 별명을 싫어한다고 했다. 청계천 복원 등 일을 결행하기까지 자신이 쏟은 열정과 설득과 고민의 과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아서란다. 그런 소통의 자세가 추진력과 결합돼 선진화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을 국민들은 진정 보고 싶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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