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하루 아침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ㆍ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ㆍ1786-1856)<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 처음으로 해석한 학자가 추사라는 기존의 학설이 잘못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는 최근 추사학회에서 발표한 <추사 금석학의 재조명-사적 ‘고증’ 문제를 주안목으로> 이라는 논문에서 진흥왕 순수비의 첫 발견자는 추사가 아니라 유본학(柳本學ㆍ1770~?)이라고 주장했다. 추사>
최 교수에 따르면 추사가 북한산비를 진흥왕순수비로 심정(審定; 실제로 살펴서 확정하는 일)했지만 이미 당대에는 북한산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는 그 근거로 서유구(徐有榘ㆍ1764-1845)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를 제시한다. 서유구는 이 책 제5 이운지(怡雲志)의 ‘예완감상’(藝翫鑑賞)’에서 “…비봉(碑峯)은 도성 창의문(彰義門) 바깥에 있으니 그곳에 신라진흥왕 북순비(新羅眞興王北巡碑)가 있다. 글자는 모두 마멸되고 겨우 10여 글자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라는 문암록(問菴錄)의 구절을 인용한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문암록은 추사의 선배 학인인 유본학의 것으로 유본학은 금석학의 대가였던 유득공(柳得恭ㆍ1749-1807)의 장남이다. 그는 시에 뛰어나 자하(紫霞), 신위(申緯)와 교류가 많았으며, 금석학과 서화에도 정통했다. 문암문고(問菴文藁)와 문암집(問菴集)을 남겼지만, 문암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최 교수는 “문암록은 일제시대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당대 최고 학자인 서유구가 자신의 글에 인용했다는 점에서 근거가 확실하다”며 “1812~1813년 추사가 문암의 시문집을 3차례나 열독했다는 연구도 있는 만큼 추사는 이들로부터 북한산진흥왕 순수비에 관한 예비지식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이와 함께 “‘진흥(眞興)’이 시호가 아니고 생존시 부르던 칭호”라는 해석역시 추사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유득공의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유득공은 <사군지(四郡志)> 에서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으로 설혹 이름을 삼았다 하더라도 소명(小名 ㆍ아명)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는데, 이 구절은 생전의 이름으로서 사후에 시호를 삼는 이명위시(以名爲諡)설을 추사에 앞서 유득공이 제시했다는 근거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진흥이 단순한 이름인지 시호인지의 여부는 북한산비가 진흥왕대에 건립됐는지 사후에 건립됐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다. 사군지(四郡志)>
최 교수는 “진흥이비고에서 보여준 추사의 정박(精博)한 고증의 성과를 폄하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있는 사실을 충실하게 밝히거나 새롭게 해석해 추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논문”이라며 “<해동비고> <해동금선존고> 등 최근 발견된 추사관련 자료가 일반에 공개되면 좀더 객관적 연구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동금선존고> 해동비고>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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