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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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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입력
2007.08.2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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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부재한 가족의 삶…남은 여자들의 강렬한 말꽃

한국문학 속의 아비는 ‘종’이었다가, ‘남로당’이었다가, ‘군바리’였다가, ‘악덕 자본가’였다가, ‘개흘레꾼’이었다.(문학비평가 이봉일) 오늘날 연극 속의 아비들은 몸져눕거나(이강백 작 <맨드라미꽃> ), 먼 유랑 길을 떠나고 없다.(박근형 작 <경숙이, 경숙 아버지> ) 아비가 부재하는 자리,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작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지경화 작, 박근형 연출, 극단 골목길)는 ‘강한 아버지’의 드라마가 물러난 자리에 다른 지형을 열어 젖힌다.

식육용 도사견을 키우는 외딴 집, 유약한 아비는 일찌감치 죽고 할아버지는 산송장으로 드러누웠다. 여름날 어미(정은경)는 고복(皐復)하듯 집 나간 아들 이리(최은선)의 옷을 널어 거풍(擧風)한다.

이리는 쌍둥이 누나 이손을 지켜내지 못한 죄로 할아버지에게 쫓겨 집을 나갔다. 한 낮 이혼을 결심한 큰딸 이금(장영남)이 뒤웅박팔자를 웅변하듯 한 덩이 깨진 수박을 들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둘째딸 이손(주인영)은 집단 성폭력의 내상으로 쪼그려 오줌 누는 것을 거부한 채 기저귀를 차고 산다. 병석에서도 부권을 행사하던 할아버지가 숨을 거둔 저녁, 이리는 무서워하던 개들을 이겨내고 피칠갑이 된 채 시퍼런 외날 가위를 들고 귀환한다.

연극은 아비가 부재한 공간을 어미의 모성이 대체할 수 있음을 낙관하지 않는다. 모성 역시 불안정하고 수상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미는 발정 난 암캐마냥 허물어진 담장 너머 자주 시선을 던진다.

희곡의 글쓰기 안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삶의 식물성과 동물성의 암유들로 차 있는 이 연극을 일상성으로 균형 맞춘 데는 윤시중의 무대미술이 맞춤했다. 마당 한쪽 벌려놓은 살림살이는 거두어 먹이느라 분주한 어미의 속성을 자연스런 동선으로 연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연극은 성격 구축 면에서 모호하고 해체적이다. 큰딸은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면서 방만한 듯 살지만 불임이라는 결락 앞에서는 나약하며, 가부장제의 전통 가치에 순응한다.

둘째 딸 이손은 공격적이면서 삶의 본질을 꿰뚫지만 비굴하고 퇴행적이다. 어미는 ‘남자가 마른 집안’에서 자식들을 물고 빨고 보듬지만 어미가 간직한 색정에 가까운 여성성은 아슬아슬하게 자식을 배척한다. 어미의 역 창조 면에서 모성과 여성성의 모순과 위반을 소극적으로 다룬 점은 아쉽다.

삼손의 잘린 머리칼처럼 부권이 거세되어 버린 이 세계 속에서 여자들의 삶은 강렬한 말꽃으로 피어난다. 가족 관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면서 때로는 덧들이는 대사 운용이 매력적인 연극이다. 26일까지 게릴라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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