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작가의 우정편지] 희곡작가 유현숙이 소설가 이외수에게
알림

[작가의 우정편지] 희곡작가 유현숙이 소설가 이외수에게

입력
2006.12.29 06:26
0 0

외수 오라버님께

며칠 전 미용실에 머리 손질하러 들렀다가 오라버니 회갑에 관한 잡지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라버니와 언니의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동안 찾아뵈어야지 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만, 연락도 없이 잠적해버린 죄스러운 마음이 시간이 지나 더 못 찾아뵙게 됐답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제게 스승이었고, 큰오빠였고, 어느 땐 부모 같은 존재였답니다. 우리의 인연은 1982년 12월 말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요. 제가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접한 지 며칠 후, 지금은 시인이 된 후배 조현석을 통해 저를 부르셨지요. 오라버니는 저를 불러 앉히시고 저를 오누이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그 후 오라버니는 글에 임하는 자세를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답니다.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위해 수백 매의 원고지를 구겨내며 고뇌하던 오라버니 모습은 성자와 같았습니다. 밤새워 단 두 줄의 글을 쓰셨을 때 초췌해진 모습과 수북이 쌓여 버려진 원고지더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줄의 글은 제 몸에 전율을 느끼게 했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처럼 두려움까지 갖게 했었답니다. 문장 하나 허투로 쓰지 않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자신감도 잃고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오라버니는 제게 좋은 희곡을 쓰게 하시려고 틈만 나면 희곡 얘기를 하시고, 어느 땐 밤새워 토론을 이끄셨던 것 기억 합니다. 제게 ‘삼각주’란 제목을 지어주시고 글을 쓰게 하셨는데, 18년이 되도록 미완성입니다. 이제 곧 ‘삼각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방황과 외도에서 제 자리로 돌아왔으니까요.

오라버니, 제가 방황했던 것 기억하시죠? 이제 제 방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는답니다. 오라버니가 저를 만나던 그 나이가 되어서야 말이죠. 제가 방황의 끝에서 오라버니도 안 계신 춘천으로 언니를 찾아갔던 것 아시죠? 그때 언니가 ‘가슴에 물을 팔부쯤 채웠다고 생각하고 살면 살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저는 가끔 그 말을 꺼내 놓고 들여다본 답니다. 제가 오라버니의 글 절반은 언니의 것이라 말하던 거 빈말 아니에요.

젊은 시절 고뇌하고 방황 할 때 울타리가 되어 준 오라버니와 언니가 없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뻐근해지고 아파 온답니다.

저는 방황을 끝내는 방법으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도망치듯 주위에 연락도 끊고 결혼을 했습니다. 세상과 문학과 주위 사람들과의 인연을 칼로 무 자르듯 자르고 15년을 넘게 잠적해 살았답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세상을 향해 나오는 중이랍니다. 오라버니, 뵙는 날까지 건강하세요.

못난 동생 현숙 올림 2006년 12월 11일

● 김다은의 우체통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던거야!

유현숙 씨는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으로 등단했다. 스무 살 당시에는 세상의 이야기를 다 쏟아놓기에 연극무대가 턱없이 좁아 보였다. 그래서 스케일이 더 커 보이는 드라마, 장편소설, 아동문학 등을 헤매고 다녔다. ‘외수 오라버니’는 그런 방황을 말없이 지켜보면서도, ‘동생 현숙’의 갈 길이 희곡일 것이라고 은연중에 암시했다고.

20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고, ‘현숙’은 “이제야 인생이 연극무대임을 알겠다”고 했다. 문학적 외도를 끝내고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을 준비 중인 그는 모노드라마의 한 대사처럼 중얼거렸다. “기인(奇人)이야, 기인! 외수 오라버니는 내가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야!”

김다은(소설가ㆍ추계예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