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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이하… 종교 있고… 가난한 집안 출신' 소수의견 많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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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이하… 종교 있고… 가난한 집안 출신' 소수의견 많이 냈다

입력
2006.12.0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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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이나 외아들 보다는 3남 이하이거나 종교가 있는 대법관들이 소수의견을 많이 낸다.’

‘사법부의 별’로 불리는 대법관의 철학은 판례가 되어 사회를 바꾼다. 헌법 1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과 소신에 따라 독립하여 판단한다’고 규정, 법관의 철학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게 보호한다. 그럼에도 대법관의 직업적 ‘양심’과 ‘소신’은 진보와 보수, 때로는 중도의 옷을 입는다. 과연 이들의 양심과 소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역대 대법관 125명(현역 13명 포함)의 신상정보와 대법원이 보관 중인 역대 전원합의체 판결 483건, 소수의견 횟수 등을 ‘컴퓨터 활용보도(CARㆍComputer Assisted Reporting)’ 기법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 대법관의 성장환경이나 종교 유무 등 사회적 변수들이 소수의견 비율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역대 대법관 전원을 대상으로 가정ㆍ사회 환경 분석과 대법원 판결과의 상관관계 비교가 이뤄진 것은 학계와 언론계를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결과 전원합의체 형사사건에서 소수의견을 낸 비율은 3남 이하가 평균 19.83%로 가장 높았고, 이어 차남(15.41%) 외아들(13.90%) 장남(13.30%) 등의 순이었다. 3남 이하와 장남간 소수의견 비율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였다. 민사와 특별사건을 포함한 전체 사건 대비 소수의견 비율 역시 3남 이하가 12.40%로 가장 높았다. 미국에서도 외아들과 장남 출신 대법관들이 보수적 성향을 띠고 막내와 차남 출신은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띤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역대 대법관들의 종교별 전체 사건 대비 소수의견 비율은 기독교가 13.26%로 가장 높았고, 다음은 불교(12.45%) 천주교(9.96%) 없음(8.86%) 등이 뒤를 이었다. 기독교와 불교를 믿는 대법관들이 종교가 없는 대법관에 비해 소수의견을 더 많이 냈음을 의미한다. 또 가치관이 형성되는 유년기 성장환경과 소수의견 비율간 상관관계 조사에선 어렸을 때 가난하게 자란 집안 출신(12.34%)이 상류층 출신(8.97%) 보다 소수의견을 많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출신고교는 전통 명문의 강세가 두드러져 경기고가 16명(12.8%)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경북고(9명) 전주고(7명) 광주고(6명) 경복ㆍ서울고(각 4명) 등의 순이었다. 출신대학의 경우 서울대 법대가 전체 대법관 125명 가운데 84명(64%)을 배출해 압도적이었다. 다음은 초창기 대법관들의 영향으로 일본 소재 대학 출신이 18명(15.9%)으로 뒤를 이었으며, 고려대 법대(4명)보다 서울대 비법대 출신(5명)이 더 많았다. 가장 많은 대법관을 배출한 지역은 대구ㆍ경북(18명)이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김영란 양승태 전수안 등 부산출신 3명이 대법관에 기용된 것도 눈에 띈다.

역대 대법관의 73.6%는 공직 경험이 없어 국정 이해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현역을 제외한 역대 대법관 113명 중 15명(13.3%)이 퇴임 이후 장관 등 정무직에 임명되거나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관에 오른 평균 나이는 53세였으며, 김갑수 고재호 나향윤 전 대법관은 평균보다 10세 가량 적은 41세에 임용됐다. 또 판사 출신 대법관이 64명(51.2%)으로 가장 많았고, 변호사나 검사 경력이 있는 대법관은 각각 38명(30.4%)과 23명(18.4%)이었다.

기획취재팀=이태희 기자 news@hk.co.kr

민문기 전 대법관 소수의견 비율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유신 말기인 1977년 9월28일 소액사건의 상고범위를 다투는 사건에서 민문기 전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는 이유를 시대적 상황에 비유해 설명한 판결문 내용이다. 언제든 시대가 바뀌면 다수 의견이 될 수 있고, 그런 ‘정의’를 지키며 ‘봄을 알리는 제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본보 취재팀이 역대 대법관들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한 결과, 2003년 작고한 민 전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가장 많이 낸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26건의 전원합의체 형사사건 중 12건(46.15%)에서 소수의견을 내 비율과 건수 면에서 모두 1위에 오른 ‘Mr. 소수의견’ 이었다.

민 전 대법관은 자신이 지키려던 봄을 위해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0ㆍ26 사건 관련자 상고심 재판에서 “내란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 중 최고 서열로 가장 과감한 견해를 폈다.

“내란죄는 정치 색채가 짙은 범죄이고 실제로 이 사건이 체제 변동과 맞물려 있어 시국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유신체제를 끝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를 일반 살인이라면 몰라도 내란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민 전 대법관은 이 판결 직후 서윤홍 전 대법관을 제외한 나머지 4명과 함께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5년 일본 변호사 실무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검사로 임용돼 ‘검찰의 꽃’이라 불리는 법무부 검찰과장에 임명됐다가 그만 둔 뒤 법원으로 발을 돌려 대법관까지 올렸다. 퇴임 후에는 인천에서 공증업무를 보며 전철로 출퇴근 하는 등 청빈한 생활을 했다.

●어떻게 조사했나

본보 취재팀은 10월 중순부터 2개월 동안 역대 대법관들과 관련된 신문기사, 자서전, 인물DB 등을 통해 기초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이어 본인 및 가족들과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종교와 유학경험 여부, 성장기의 가정환경, 출생순서 등을 파악했다. 또 대법원에 보관 중인 전원합의체 판결문 483건 가운데 소수의견을 추려내 대법관의 가정ㆍ사회 환경과 판결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와 소수의견이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사법 행정의 최고의결기구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으로 구성되며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된다. 주로 대법관 4명이 1개 부(部)를 이루는 재판과정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가 꾸려진다. 대법관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인원 과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이 때 다수 의견에 포함되지 않은 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한다.

개인 환경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 특히 대법관들은 판결의 신뢰를 얻기 위해 지인들과의 만남 조차 꺼리고 수도승 같은 생활을 하며 임기를 보낸다. 윤관 전 대법원장은 “법관은 외부 압력은 물론 주관적 사상이나 인생관 등 자기를 형성하는 모든 요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자신으로부터의 독립’ 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으로 ‘양심의 감옥’에 갇혀 사는 대법관 개개인의 가치관에 성장환경이나 종교 등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의 조사결과는 ‘환경적 요인이 대법관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환경적 요인과 소수의견

10명 중 장남(외아들 제외)은 1명도 없었고, 전원 종교를 갖고 있었다. 출생순서로 보면 외아들과 차남이 각각 3명이었고, 3남 이하가 4명으로 가장 많았다. 출생순서 조사가 가능했던 역대 대법관 88명 중 장남이 23.9%(27명)인 것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차이 나는 수치이다. 또 전원합의체 형사사건 소수의견 비율을 따져 봐도 3남 이하가 19.83%로 가장 높았고, 장남은 13.30%로 6.53%포인트나 낮았다.

이 같은 대법관들의 출생순서에 따른 성향은 미국에서도 두드러진다. 미 노스캐롤라이나대 정치학과 케빈 멕과이어 교수에 따르면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중 장남은 65%나 됐으나 막내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장남 출신 대법관이 정치적으로 더 보수적(conservative)이고, 막내 출신이 보다 진보적(liberal)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미국 학계의 정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장남이 규칙을 잘 따르고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막내들이 더 자유로운 사고와 기존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특성을 보이는 것과 관련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종교적 신앙심이 깊을수록 소신이 강하고 주관을 굽히지 않는다는 일반적 인식은 대법관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됐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소수의견을 낸 비율(8%) 가장 낮았고 기독교가 13%로 가장 높았다.

출신지역에 따른 소수의견 비율은 비교적 대법원내 소수 집단이었던 경남ㆍ부산(12.7%)과 이북 출신(12.1%)이 호남(8.3%)에 비해 높았으나, 다른 출신지역 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또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고생을 하며 성장기를 보낸 대법관들이 부유층에서 자란 대법관들에 비해 소수의견(전체 사건 대비)을 평균 3.2% 가량 많이 냈다. 형사사건만 보면 상류층(11.75%)과 하류층 출신(17.82%)의 간격이 평균 6% 이상으로 더욱 벌어졌다.

●인권 사건과 소수의견

, 이를 정치적 성향과 직접 연결시키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다뤘던 주요 시국ㆍ인권 사건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대부분 전체 소수의견 비율도 상위권이었다. 한국적인 특수상황이 반영된 현상으로 보인다.

1980년 10ㆍ26 내란 음모사건 재판 당시 6명의 대법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에 반대해 소수의견을 냈다. 이들 중 민문기 대법관은 형사사건에서 소수의견 빈도(12건)와 비율(46.1%)이 단연 1위였다. 또 임항준 대법관은 전체 소수의견 비율이 36.51%로 가장 높았고, 김윤행 대법관은 형사 소수의견을 7차례 제기해 역대 대법관 중 5위를 기록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재판에서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던 이일규 전 대법원장은 민문기 전 대법관에 이어 두 번째로 형사사건에서 소수의견(10건)을 많이 낸 반골이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역시 대법관 재직 시절 자신이 맡은 주심사건 16건 중 11건에서 소수의견을 냈다.

출신배경 살펴보니…

법관으로서 최고 영예의 자리인 대법관은 우리 사회의 지성과 양심을 상징한다. 판결문에 담긴 그들의 숨결은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국민들의 생활과 사고체계에 파고들어가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과거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역대 정권의 의지에 휘둘려 영욕이 교차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용훈 대법원장과 현역 대법관 12명을 포함, 지금까지 총 125명의 대법관이 배출됐다.

●연령

대법관에 임명된 평균 나이는 53세였다. 하지만 김갑수 고재호 나향윤 전 대법관의 경우 평균보다 10세 가량 적은 41세에 대법관 자리에 오르는 행운을 누렸다. 반면 오필선 대법관은 희수를 넘긴 72세에 임명돼 최고령을 기록했다.

●출신지역

영ㆍ호남을 비롯한 모든 지역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돼 있었다. 가장 많은 대법관을 배출한 지역은 대구ㆍ경북(18명ㆍ15%)이었다.

하지만 전남ㆍ광주와 충남ㆍ대전도 각각 17명(14.2%)의 대법관을 배출해 동ㆍ서간 차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법조계에선 1970~80년대 중앙권력에서 소외됐던 호남 출신 인사들이 검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이 적고 권력의 외풍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판사직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반면 현역 대법관 13명을 제외할 경우 부산 충북 강원 출신이 각 1명으로 가장 적었다. 그러나 부산의 경우 참여정부 출범 이후 김영란 양승태 전수안 대법관 등 부산 출신이 3명이나 발탁돼 격차가 많이 해소됐다. 강원은 변화가 없었고 충북 출신은 1명 늘었다.

●출신학교

예상대로 전통 명문고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사법부는 물론 법조계에서 최고의 인맥을 자랑하는 경기고 출신이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북고(9명) 전주고(7명) 광주고(6명) 경복고(4명) 서울고(4명) 등 과거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고들이 뒤를 이었다.

2명 이상을 배출한 고교는 광주일고(3명) 대전고(3명) 경남고(3명) 중동고(2명) 휘문고(2명) 대전고(2명) 공주고(2명) 양정고(2명) 경동고(2명) 경남고(2명) 경북사대부고(2명) 진주사대부고(2명) 체신고(2명) 평양고보(2명) 등 14개 학교였다.

대학의 경우 서울대 법대가 125명의 역대 대법관 가운데 84명(64.6%)을 배출해 압도적이었다. 특이한 점은 서울대 비법대에서도 5명(4.4%)의 대법관이 나왔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사법시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한 고려대 법대(4명)보다 많은 것이다.

서울대를 제외한 비법대 출신은 조선대 정치학과를 나온 이성열 전 대법관과 한문 수학 후 법관양성소를 거친 초창기 김찬영 전 대법관 뿐이다. 서울대와 고대 외에는 연세대 법대(2명), 영남대 법대(2명), 동아대 법대(3명) 등 3개 국내 대학만이 대법관을 배출했다. 일본 소재 대학 출신도 초창기 대법관들을 중심으로 18명이나 됐다.

●유학 경험

역대 대법관 125명 중 유학 경험이 있는 대법관은 38명(30.4%)에 달했다. 우리나라 법 이론의 발전을 진두지휘하는 대법관들의 유학 경험은 사법문화 발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유학 경험에서 흥미로운 시사점이 발견된다. 초창기 대법관들은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비롯, 상당수가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일본 사법제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일본파는 유태홍 전 대법원장을 끝으로 미국 유학파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첫 유학파는 변옥주 전 대법관으로 1956년 미국 사법기관을 장기간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후 57년 미국 하버드대 옌칭학회 초청으로 소송법을 연구한 이영섭 전 대법원장을 비롯, 1980~90년대 14명의 대법관이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2000년대 들어선 유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강국 전 대법관(사시 8회)과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수학한 손지열 전 대법관(사시 9회) 등 독일파가 대법원에 입성하면서 미국파는 자취를 감추었다. 독일파 두 대법관은 올들어 임기 만료로 대법원을 떠났지만, 대신 안대희(프랑스) 양승태(영국) 김지형(독일) 대법관이 수혈됨으로써 유럽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성장환경 및 종교

역대 대법관 113명의 종교는 기독교가 23명(20.4%)으로 가장 많았고, 천주교(18명ㆍ18%) 불교(17명ㆍ15%) 등이 뒤를 이었다. 종교가 없는 대법관도 35명(31.0%)에 달했으며 18명은 종교 여부를 알 수 없었다. 미국 대법관들은 기독교 신자가 87%에 달하고 가톨릭은 8%에 불과하다.

역대 대법관들은 유년기를 도시에서 보낸 사람이 49.6%로 농촌 등 시골 출신46.5%)보다 약간 많았다. 본인이나 가족들이 밝힌 대법관들의 성장기 가정환경은 중류층이 42명(37.2%)으로 가장 많았고, 상류층(27명ㆍ23.9%) 하류층(20명ㆍ17.2%)의 순이었다. 조사가 불가능하거나 癬貪綬?거부한 경우는 24명(21.2%)이었다.

부모의 직업은 농업이 23명(23.9%)으로 가장 많았다. 손지열 전 대법관은 아버지 손동욱 씨에 이어 2재째 대법관을 역임했고, 이회창 전 대법관과 김지형 전 대법관은 각각 한성수 전 대법관과 사광욱 전 대법관의 사위이다. 또 박준서 전 대법관은 박우동 전 대법관과 동서 사이이며, 윤영철 전 대법관(전 헌법재판소장)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손녀사위이다.

고재학(팀장)·이태희·김용식·안형영기자 news@hk.co.kr

퇴임후에는…113명중 75명 변호사 개업

역대 대법관들은 퇴임 후 정계로 진출하거나 장관 등 다른 공직을 맡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변호사 개업을 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본보 취재팀이 현역을 제외한 역대 대법관 113명의 퇴임 이후 진출분야를 조사한 결과, ▲변호사 75명 ▲정계 15명 ▲학계 3명 ▲헌법재판소장 2명 ▲기타 18명 등이었다.

하지만 대법관들의 변호사 개업에 대해선 곱지않은 시선도 많다. 이들이 법모를 벗자마자 대법원 사건을 70% 가량 싹쓸이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법관시절 평생 지키려 노력했던 ‘양심’이나 ‘소신’과는 거리가 있는 행보이다.

그래서 최근엔 직접 재판정에 서거나 서류에 이름을 올리는 단독 개업보다 품위를 지키며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로펌 고문 등이 인기다. 이영섭 전 대법원장은 퇴임 이후 ‘동대문합동 법률사무소’를 만들어 주재황씨 등 퇴임 대법관들과 사랑방 삼아 공증업무 등을 하며 소일하기도 했으나 로펌행이 일반화한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이다.

오랜 조직 생활에 염증을 느껴 로펌행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 최근 단독 개업한 한 전직 대법관은 “인생에 한번쯤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세태에 비추면 최근 퇴임한 조무제 배기원 전 대법관의 행보는 신선하다. ‘청빈 법관’으로 유명한 조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모교인 부산 동아대 석좌교수를 맡아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배 전 대법관 역시 모교인 영남대의 석좌교수를 맡았다.

1971년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 표결을 했다가 73년 재임용에서 탈락한 나항윤 유재방 전 대법관은 ‘국선변호’ 활동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옷을 벗은 후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10년 이상 무료법률상담과 매년 50~70건의 국선변호를 맡아 85년 인권선언일 기념 훈장을 받았다.

컴퓨터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73년 ‘컴퓨터로 양형 통계를 계산해 재판에 활용하자’는 논문을 발표, 주목을 끌었던 고 김윤행 전 대법관 집안은 3대에 걸쳐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당시 서울대 응용수학과를 졸업하고 부친인 김 전 대법관을 도와 논문을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장남 김성인씨는 어느덧 중견교수(고려대 산업공학과)가 됐다. 김 교수의 가장 큰 소망은 현재 공익법무관인 아들이 복무를 마치면 함께 완결판 ‘컴퓨터 양형프로그램’을 만들어 부친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81~86년 대법관을 지낸 신정철씨는 현재 부인과 함께 충북 진천에서 대규모 농장을 일구며 여생을 즐기고 있다. 81~85년 ‘정권에 예속된 사법부’ 수장을 지낸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으며 우울한 말년을 보내다 지난해 1월 한강에 투신자살해 충격을 줬다. 민문기 전 대법관과 소수의견 수위를 다퉜던 임항준 전 대법관은 현재 캐나다에서 이민생활을 하고 있다.

고재학(팀장)·이태희·김용식·안형영기자 new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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