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아
잘 지냈니? 지난 번에 퐁피두센터 <비엔나> 전시회를 보면서 네 생각을 많이 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들을 좀 무섭고 끔찍하리만치 날 것으로 그려냈어. 어딘가 보들레르적인 미의식이 깃들였고 세기 초의 비엔나 화풍이 그러했어. 코코슈카의 말이 너와 연관되는 것 같아 적으면, “한 예술가가 7년쯤 침묵을 지키면서 계속해 자기 길을 모색해 나가는 것은 때로 필요한 자세이기도 하다”라고. 비엔나>
박사 논문은 3월에 합격이 났다.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태피스트리 제작을 하고 있다. 9월 중순경에 12㎡의 큰 주문 작품을 들고 한국에 가니 그때 만나 볼 수 있겠구나. 비엔나 전에서 구한 작은 그림 복사판 하나, 그리고 프로그램 몇 부 부쳐 보낸다.
시몬 보봐르가 죽었을 때, 좋은 기사들이 신문, 잡지 등에 많이 실렸었어. 그 중에 <여자(une femme)> 라는 제목도 있었어. 그녀가 쓴 <제 2의 성> 은 여자가 남자의 부속품이 아니라 달리(또는 동등하게 나란히) 존재하는 것임을 깨우쳐 준 유익한 책이었다고 지금의 50,60대 부인들은 말하고 있어. 얼마 전에 쓴 사르트르와의 말년 생활록에서 “후생을 믿지 않으므로 죽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50,60년을 함께 보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자위를 한다”고. 우리 집 근처 몽파르나스 묘지에 합장을 시켰는데, 묘석이 늘 꽃으로 덮여 있다고 해. 제> 여자(une>
보봐르가 죽은 다음 날, 그녀의 친구이기도 했던 주네가 또 세상을 떠났어. 적잖이 상을 받기도 했지만 아주 초라한 한 호텔 방에서 생을 마쳤다. 어쨌든 ‘누구에게도, 또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사람’으로 그는 인정받았어. 감옥 들락거리느라 교육도 거의 안 받았는데, 그가 쓰는 불어 문장은 썩 훌륭해. 그에게, 걸맞지 않다고 말하면, 자기와 맞지 않는 부르주아 사람들을 욕하기 위해선 그들의 언어를 써야 되지 않느냐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순수한 불어의 아름다움에 이끌렸던 탓이라고.
요즘은 중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는 것 같아. 그만치 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 사상, 문학적인 업적에서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유감스럽지. 어서 성공해서 이름을 얻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니까.
내가 서울 가는 길에 뭐 사갈 것 부탁할 건 없는지? 돈은 가서 받기로 하고. 김동리 선생님껜 무얼 드릴 수 있을까 생각 중이다. 좋은 술을 한 병 갖고 가야 될지. 안녕히.
1986. 5. 31 숙희
김다은의 우체통
유럽 예술계 흐름 전한 메신저
숙희는 그림을 전공하고 연극도 공부한 소설가 이언의 본명이다. 편지는 1986년 6월 3일자 프랑스 파리 소인이 찍혀 서울에 당도했다. 날렵한 비행기가 상공을 날아가는 당시 우표는 3.70 프랑. ‘숙희’는 유럽의 예술과 사상의 흐름을 ‘영은’에게 수년간 꾸준히 전해준 메신저였다. 작가들의 우정 편지에서 예술가의 초상을 읽는 것은 기쁜 일이다. 코크슈카의 ‘7년쯤 침묵을 지키는 예술가’가 프랑스의 한 문학이론을 상기시킨다.
이 이론은 잠에 빠져 일어나는 침묵은 비언어로, 저항이나 긍정의 표시로 지키는 침묵은 언어로 간주한다. 침묵 속에서 귀청이 터질 듯 오롯이 투쟁을 한 뒤, ‘영은’은 소설 <먼 그대> 를 들고 세상에 나왔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대 교수)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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