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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실에 구시대적 벌 숙제 '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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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실에 구시대적 벌 숙제 '깜지'?

입력
2006.10.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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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실에 구시대적 ‘벌 숙제’가 판치고 있다. ‘깜지 숙제’ 또는 ‘빽빽이 숙제’로 알려진 이 숙제는 A4나 B4 용지에 가로ㆍ세로 5㎜ 크기의 글자로 공부한 내용을 빽빽이 적는 것이다. 깜지나 빽빽이라는 말은 종이를 까맣게 또는 빽빽이 메운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지나친 주입식 교육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교사들은 “짧은 시간 안에 성적을 올리는 데 최고”라며 깜지 숙제를 고집하고 있다.

전남 여수시 Y고는 매일 1, 2학년 학생 모두에게 B4크기의 갱지를 내준다. 학생들은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오후 10시까지 수학공식 영어단어 한자 등 전 과목의 그날 학습내용을 깨알같이 여기에 적어 담임교사의 검사를 받는다.

특히 이 학교 1학년의 한 반은 깜지 숙제를 제출하지 않는 학생에게 1,000원의 벌금을 받으면서 학생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한 학생은 “어떤 반은 주말에도 깜지 숙제 3장을 내는 등 학교 전체가 이 때문에 난리”라며 “악명 높은 깜지 숙제가 이제 학생들 주머니를 터는 도구로까지 전락했다”고 불평했다.

서울 J중도 일부 교사들이 깜지 숙제를 내고 있다. 이 학교 2학년 한 학생은 “담임선생님이 여름방학 때 깜지 숙제를 내 줘 60장이나 까만 글씨로 채워 넣었다”며 “1시간 이상 걸려 겨우 1장을 쓰고 나면 손목이 아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깜지 숙제에 대한 불평은 사이버공간에서도 일상사가 됐다. 오선화라는 여고 2년생은 “보충수업을 빠진 대가로 깜지 숙제를 했는데 시간만 잡아먹었을 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굿잡’이라는 ID의 한 학생은 “방학 때 공휴일 빼고 무조건 매일 한 장씩 쓰다보니 깜지 숙제가 공포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깜지 숙제는 학생의 수준이나 건강상태에 관계없이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문제다. 대구의 한 중학교 교사는 “깜지 숙제를 내줄 때 성적우수 학생, 아픈 학생들의 사정을 봐주다 보면 역효과가 난다”며 “깜지 숙제가 학생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깜지 숙제가 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편법도 유행하고 있다. 볼펜 6자루를 엇갈리게 테이프로 붙여 만든 ‘쌍쌍바’와 깜지 아래에 먹지를 대고 쓰는 방법 등이다.

교사들은 깜지 숙제가 반복학습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수 Y고 1학년 주임교사 K씨는“10개반 중 깜지 숙제를 한 학급이 모의고사에서 월등하게 좋은 성적을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주입식 교육의 전형이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고려대 교육학과 김성일 교수는“반복에 의한 단순암기는 학습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고 분노까지 유발해 정신력을 저하시킨다”고 지적했다.

대구=전준호 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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