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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2> 최일남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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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22> 최일남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보다'

입력
2006.08.0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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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는 소설가 최일남(74)이 최근 펴낸 산문집의 표제이자 이 산문집 첫머리에 실린 글의 표제다. 작가는 그 글에서 “내 가운뎃손가락의 돌출은 내가 살아낸 역사의 징표이자 응고”라는 감회를 토로한다. 또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삐주룩이 돋은 옹이를 왼손 엄지로 자꾸 문지르며, 그동안 얼마나 굳었는가를 점검한다.

단단할수록 기분이 좋다. 농땡이를 부리는 바람에 돌기가 주저앉았다 싶으면 적이 실망하고 자책한다”는 고백도 보인다. 글 노동의 부하(負荷)를 컴퓨터 키보드 위 열 손가락에 고루 나누기 십상인 신세대 글쟁이가, 펜대와 원고지 ‘이우’(二友)에 기대어 한 생애를 버텨온 구세대의 소회를 고스란히 빨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역시 인생에서고 글쓰기에서고 이 책 저자의 까마득한 후배인지라, 젊은 시절 잠깐 동안만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의 옹이를 살짝 경험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이 원로 작가의 손가락 옹이를 상상하는 내 마음은 직업적 경의와 경이로 파닥인다.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이하 ‘어느 날 문득’)가 최일남 문장의 높다란 경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저 이 원로의 최근 문집일 따름이다. 그런 한편, ‘어느 날 문득’이 최일남 문장을 살피는 데 부적절한 텍스트도 아니다.

공식 문단 경력만 반세기가 훌쩍 넘은 이 작가의 글은, 그 장르가 소설이든 다른 산문이든, 그 긴 세월동안 그리 큰 변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가 최일남과 언론인 최일남의 글을 띄엄띄엄이라도 따라온 독자라면, 그의 글이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 만큼이나 그 내부적으론 세월을 뛰어넘어 동질적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최일남 문장이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청년 최일남의 글들을 읽지 못한 내가 이런 진단을 내리는 것은 자발없는 짓일 테다. 오진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말을 바꾸자. 장년기 이래 최일남의 문장은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고. 말하자면 한 세대 이상 최일남의 문장은 어금지금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 이것은 정체(停滯)라고도 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최일남이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굳게 세웠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자주 쓰는 말을 훔쳐오자면, 최일남은 ‘웃자란’ 글쟁이였던 듯하다. 어쩌면 그는, 스타일에 관한 한,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타일의 굳건함은 소설에서든 에세이에서든 신문기사에서든 한결같았다. 작고한 소설가 김동리는 어느 해 세배 온 최일남에게(동리는 최일남을 등단시킨 문단 스승이다) “신문 칼럼에 비해 소설은 문예적이더라”는 덕담을 했다하나(‘그게 글쎄--나의 데뷔작’), 최일남에게 문학적 글쓰기와 저널리즘 글쓰기가 크게 차이났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소설 문장은 저널리즘의 기율에 묶여 어연번듯했고, 그의 기사 문장은 문학의 매혹에 끌려 바드름했다. 그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문장도, 저널리즘과 문학의 경계에 있었다.

저널리즘과 문학 사이가 아니더라도, 최일남 문장은 경계의 문장이다. 그의 문장은 예스러움과 현대성의 경계에 있고, 토착성과 외래성의 경계에 있고, 전원풍과 도회풍의 경계에 있고, 귀족풍과 서민풍의 경계에 있고, 고전미와 유행감각의 경계에 있다. 최일남 문장에 점점이 박힌 외래어나 (젊은 세대의) 신어의 현대성은 글의 근간을 이루는 토박이말과 한자어의 예스러움과 길항하고, 토박이말의 토착성 전원풍 서민풍은 한자어의 외래성 도회풍 귀족풍과 길항한다.

그것은 구어체와 문어체 사이의 길항이기도 하고, 조선어 단어와 (설핏 보이는) 일본어투 문체 사이의 길항이기도 하다. 아니 그것들은 길항하지 않고 서로 어우러지며 두터움을 얻는다. 그리하여 독특한 최일남 문체를 이룬다.

최일남의 이 개성적 문체는 이름을 걸고 쓰는 소설이나 기명기사에서만이 아니라, 이름을 감춘 채 쓰는 신문 사설에서도 제 꼬리를 감추지 못한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의 여자육상 3관왕 임춘애는, 경기를 마친 뒤,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가난 고백으로 많은 사람들을 울먹이게 한 바 있다. 당시 이를 다룬 동아일보 사설 역시 최루성(催淚性)이었는데, 한 눈에도 최일남의 글임이 또렷했다. 최일남의 문체는 고스란히 최일남이라는 이름이다.

최일남 문장의 이 모든 경계성 또는 혼방성(混紡性)을 슬며시 그러나 어기차게 떠받치는 ‘디폴트값’은 전북방언의 리듬이다. 방언 어휘를 찾기 힘든 그의 글이 전북방언의 리듬에 실려있다는 말은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듬은 어휘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이다.

그래서 리듬을 버리거나 거기 동화하는 것은 어휘를 버리거나 거기 동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대학 시절 이래 줄곧 서울에서 산 이 작가의 글에는 고향 말의 리듬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아니, 이 작가 스스로 그 리듬을 고집했을지도 모른다.

최일남 문장은 전주평야를 흐르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처럼 한국어의 평야를 살갑게 적시며 굽이굽이 흐른다. 그것은, 아주 깊다란 수평에서는, 판소리 가락과도 친화적이다. 최일남의 문어가 문득문득 구어 느낌을 주는 것도, 이 지식인의 언어가 더러 비속함에 대범한 것도, 모든 일에 문외한인 체하는 그의 말에서 어떤 의뭉스러움이 묻어나는 것도 그와 관련 있을 테다. 요컨대 최일남 문장을 이끄는 것은 입심이다.

‘어느 날 문득’의 표지에는 표제 위에 ‘최일남 산문집’이라는 말이 붙어있다. 산문은,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흐트러진 글’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어느 날 문득’에 묶인 글들은 흐트러진 글들이다.

그리고 그 글들엔, 작가 후기(상자기사)의 “하다가 많아진 우리말과 글쓰기에 대한 서술이 객쩍다”라는 술회에서도 드러나듯, 말과 글에 대한 최일남의 생각이 많이 드러나 있다. 사실, 산문이라는 말의 축자적(逐字的) 뜻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 글들 하나하나가 흐트러져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이라는 책 자체는 전체적으로 꽤 흐트러져 보인다. 이 책의 편집에 어떤 체계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이 산문들은, 책 속에서, 질서 없이 흐트러져 있다. 그것이 저자의 뜻인지 출판사 편집자의 뜻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을 더욱 흐트러져 보이게 하는 것은 자주 보이는 오자, 탈자들이다. 이것은 명백히 편집자의 직무유기다. 출판사는 이 원로의 글들을 책으로 묶으며 최소한의 에디터십도 발휘하지 않았다.

최일남이 ‘어느 날 문득’에서 펼친, (우리)말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들은 건전하고 소박하다. “어떤 형태의 문장이건 간에 시대성을 떠나 존재하기는 어렵다. 옛날의 명문이 오늘 읽으면 맛이 덜한 이유도 거기 있다”(‘이태준 문학독본’)는 견해는 지혜롭지만 평범하다.

“얼핏 비슷한 말인 듯하면서 그 때 그 때 정황에 따라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말 임자를 잘 만나야 제 값을 받는 게 우리말이다”, (쇠고기의 여러 요리법을 나열한 뒤에) “요컨대 우리말은 그렇게 발라내고 저미는 데 익숙하다”, “우리말은 네모반듯하기보다 둥글넓적하고, 단단하기보다는 무른 편이다”(이상 ‘우리말의 폭과 깊이’) 같은 판단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런 말들은 굳이 최일남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들이다. 더러, 부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둔 견해도 보인다.

그러나 이 의견들을 펼치는 스타일은 오직 최일남만의 것이다. ‘라일락이나 마로니에’라는 글에선 대학 동기생 이어령에 대한 찬탄이 꼬박 한 페이지에 걸쳐 나열된다. ‘이태준 문학독본’과 ‘함석헌 선생의 말과 글’이라는 글은 전체가 이태준과 함석헌의 문장에 대한 경의로 채워졌다. 그러나 재치있는 담론 전파자로서라면 몰라도 문장가로서라면, 이어령에겐 볼 것이 거의 없다. 이태준도 최일남에게 미치지 못한다. 아마 함석헌 정도가 그 개성에서 최일남과 겨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최일남은 신문 문화면의 혁신자로, 걸출한 인터뷰어로 기록될 것이다. 1950대 말 그는 민국일보 문화부장으로서, 그 전까지 외부 필자들의 기고로 채워지는 것이 관례였던 문화면을 문화부 기자들의 기사로 채우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그가 월간 신동아에 연재한 ‘최일남이 만난 사람’은 인터뷰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장르라는 것을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저널리즘과 문학을 포함한 한국어 일반의 역사에서라면, 최일남은 가장 개성적인 문체를 지닌 스타일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초등학교 과정을 온전히 일본어로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한국어 텍스트를 읽기 시작했던 불행한 세대에 그가 속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최일남 문장에 대한 경의는 더욱 더 커진다.

▲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저자 후기

하다가 많아진 우리말과 글쓰기에 대한 서술이 객쩍다. 규모 있게 찬찬히 챙기기보다는 투정질하듯 변죽만 핥다 말았기 때문이다. 글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말은 하물며 더하다.

이마에 예민한 센서를 달고 ‘날마다 빅뱅’에 대응하는 신진세력과 좌우대칭의 가녀린 더듬이로 일상의 변화를 겨우 감지하는 자의 차이는 어차피 심하다. 그런 판에 이런 산문집의 등장은 대체 무엇인가. 조잔한 글줄로 우세나 사랴. 그나마 팔 할이 스러진 옛 기억의 단편을 주워 모은 것이다.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의 저자 다우베 드라이스마에 따르면,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다. 사람의 명령을 잘 듣지 않고 제멋대로 논다는 의미다. 기억은 또 수수께끼 같은 자기만의 법칙을 따른다고 했다. 경찰이 수첩에 기록된 범죄자를 가려내듯, 하필이면 괴롭고 수치스러운 일을 반복해서 떠올리게 하는 수가 많다. 노년의 어린 시절을 마흔 살 때보다 더 선명히 기억하게 만드는 역순의 요술을 부리기도 한다.

거꾸로 오늘의 이 순간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몇 달이 못 가, 아니 겨우 이틀만 지나도 그 순간의 색깔, 냄새, 향기를 자신이 원했던 만큼 생생히 기억하기 어렵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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