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올라가는데 이미 피카소를 본 이들이 우산을 받고 내려오고 있었다. '참 행복한 사람들이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순정만화나 CF에나 나올듯한 어여쁜 빨강색의 차양을 친 입구는 거친 현실과 단절을 약속하는 듯했다. 평일에 저녁 6시쯤, 그것도 비 오는 날 피카소전을 보러 오는 사람들 자체가 험한 정치판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환한 얼굴의 큐레이터는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제 한가해져서 이렇게 피카소전도 왔네요." "…???" "대변인 그만두셨으니까요. 요즘은 뭐하세요?" "아, 네,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내 대답이 몹시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보냈다.
나 역시 미소로 답했다. 한나라당의 전당대회도, 암담한 현실도 예술 속에 묻혀 사는 그녀에게는 '관심 밖 사항'인 듯 했다. '사실은 이게 정상인데… 그렇잖아?' 나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린다.
시립미술관에서 나를 기다리는 피카소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 어떤 예술가보다 치열한 이념투쟁을 했던 피카소였지만 이번 전시의 주제는 '그가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여인들, 더 정확히 말해 창작의 불쏘시개로 썼던 여인들이었다. 삶에 대해, 창작에 대해 이글거리는 용광로 같은 짐승 같은 인간을, 이기적인 남자를 만나지 않은 여자들은 다 신께 무한한 행운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작(多作)과 다산(多産)과 다난(多難)의 작가 피카소는 매우 조용히, 담담하게, 차분하게 무욕의 노인처럼 나를 맞았다. 피카소 앞에서 왜 나는 경제학자 죠셉 슘페터 생각이 났을까? 젊은날의 슘페터는 이렇게 떠벌리고 다녔다.
"유럽 최고의 경제학자로, 숙녀들의 최고의 연인으로, 최고의 기수로 기억되고 싶다." 그런 그가 죽음을 앞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경제학자 몇 명을 길러낸 선생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마치 사소설을 쓰듯 자신의 일대기를 피카소는 화폭에 담았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이 '나에게 영향을 끼친 이들'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듯 피카소의 자서전은 '그의 사람, 그의 여인들'이 주어이고 주체였다.
이글거리는 활화산에서 숨 고르기에 들어간 휴화산이 된 피카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용기있고 뛰어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동료로서 기억되고 싶다"고.
"사람들이 저 도라를 그린 작품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해요." "… ???(20세기 가장 뛰어난 화가라고는 해도 피카소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는데)." 그녀는 다시 속삭인다.
"관람객들이 왜 게르니카가 안 왔냐고 물어보지 뭐예요." 나는 슬며시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다소 황당해 하는 그녀에게 말한다. "웬만한 한국사람이면 그런 말 하고도 남지요."
관람객 중의 한 30대 후반 남자가 반색을 하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더없이 귀여운 어린 아들 딸 그리고 영민하면서도 따뜻한 얼굴을 한 부인과 함께였다.
웬 아줌마한테 사진을 찍자고 하나, 하고 어리둥절한 부인에게 친절한 가장은 열정적으로 설명을 한다. "당신, 왜 한나라당 대변인 전여옥씨 몰라?" 그의 설명에도 부인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환한 웃음으로 함께 가족사진에 합류한다.
피카소가 그렸던 수많은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 - 바로 이런 가족을 거장도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나와 행복한 가족이 디카 앞에서 "김치!" 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피카소도 보았다면 밥 먹고 사랑하고 배설하고 일하는 동물적 생명활동의 모든 시간, 분초를 다퉈 창작에 몰입했던 그 탐욕스런 천재도 흐뭇한 웃음을 지었을 듯싶다.
그래서 피카소 전이다. 대체 '삶'이란, '생활'이란 - 그 모든 것에 대해 물음표로, 느낌표로 그리고 마침표로 완성된 답을 주기 때문이다.
전여옥ㆍ한나라당 최고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