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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도청실체 수사 마무리 前국정원장 사법처리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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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도청실체 수사 마무리 前국정원장 사법처리만 남아

입력
2005.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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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공개된 김은성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 공소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도청 사례와 함께 감청장비를 이용한 도청 시스템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고, 김씨 재직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ㆍ신건씨의 공모 관계가 기재됐다는 점이다.

이는 도청 범행의 실체에 대한 수사는 대부분 마무리됐고 전직 원장의 사법처리 수순만 남아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도청사례 중 일부만 공개된 현 단계에서도 구 여권은 국정원을 통해 정치사찰을 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도청 사례들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도청사례는 최규선씨의 전횡,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미국 방문 추진, 민주당-자민련-민국당의 정책연합 및 임동원 통일원 장관 해임안을 둘러싼 정치권 움직임 등이다.

국정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홍걸씨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했던 최씨의 전화 통화를 도청하면서 국정원장을 비롯한 고위공직자 인사 관여시도 등을 파악했다.

최씨의 금전관계, 여자관계, 자기과시 등 사적인 대화내용도 엿들었다. 국정원은 2001년 미국 상원과 인권단체의 방문 초청을 받은 황장엽씨의 동향도 도청을 통해 감시했다. 당시 정부는 신변안전 문제와 황씨의 증언이 대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황씨의 미국 방문을 꺼려했다.

2001년 4월 민국당 대표였던 고 김윤환씨와 민주당 의원들의 정책연합 관련 통화, 같은해 9월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불거진 임동원 장관 해임안에 관한 자민련 의원 등의 통화 도청은 국정원이 정치인들을 얼마나 깊숙이 사찰하고 또 정치에 개입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김씨가 대통령의 국가통치권을 보좌하는 차원에서 도청했다고 진술한 점에 비춰 도청 대상과 범위는 훨씬 더 광범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은 이날 “지금 단계에서 기소해도 충분한 사안들에 대해서만 공소 사실에 넣었다. 필요하면 추가 기소할 수도 있다”고 밝혀 비슷한 도청 사례가 야당을 대상으로 얼마든지 더 많이 있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국정원장 사법처리 전망 검찰은 김씨가 국정원 차장 재직시 감청담당 부서인 과학보안국(8국)으로부터 A4 용지 반쪽 크기의 용지에 대화체로 요약한 통신첩보 보고서를 ‘8국’ 또는 ‘친전(親展)’이라고 기재된 봉투에 밀봉된 상태로 받았다고 밝혔다.

검찰이 임동원ㆍ신건씨를 김씨의 공범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것은 이들이 8국에서 같은 방식으로 보고를 받았다는 진술과 정황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우선 통신첩보 보고서는 내용이 대화체로 돼 있어 대인(對人) 첩보 보고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또 국정원이 휴대폰 감청가능성을 대외적으로 부인해왔기 때문에 합법 감청을 위해 대통령의 승인이나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국정원장들이 통신첩보 보고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휴대폰 도청 사실을 묵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도청이 집중됐던 김씨 재직 기간 국정원 최고 책임자였던 두 사람이 사법처리를 피해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임씨는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 전도사’로 불릴 만큼 남북화해의 상징적 인물이고 국정원 내부 업무보다는 대북 관계에 힘을 쏟았다는 점이 고려대상이 될 수 있다.

신씨는 2002년 3월 R2, CAS 등 감청장비를 폐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점이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할 때 중요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이 어려운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고위관계자와의 형평성 측면이 고려될 수도 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 R2팀 32명 3교대로 24시간 도청

국정원이 전담 부서를 만들어 24시간 내내 상시 도청해온 사실이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의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

국정원은 1996년 디지털 휴대폰이 상용화되자 기존 아날로그 휴대폰 감청장비를 대체할 새 장비 개발에 들어갔다. 국정원 8국(과학보안국)은 휴대폰도 유선구간에서 감청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 98년 5월 이동통신회사의 기지국과 전화국 연결구간을 감청하는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 1세트를 개발했다.

국정원은 성능을 보완해 이듬해 9월 5세트를 추가 제작했으며, 이를 R2 수집팀에 설치한 후 광화문전화국 등 6개 전화국과 연결했다. 검찰은 6세트로 최대 120회선 접속이 가능하다는 국정원 발표와 달리, 3,600회선까지 접속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도청은 철저한 분업체제로 이뤄졌다. 8국 산하 종합운영과 직원들은 정치인, 경제인, 고위공직자 등 주요인사의 전화번호를 R2에 입력했고, R2 수집팀은 2개팀 8개조 32명이 3교대로 24시간 도청했다. 하루 수십 건씩 도청한 뒤 그 가운데 10여건을 문서로 정리했다.

종합처리과 직원들은 이를 대화체 형식으로 요약, 7~8건의 통화내용을 종합처리과장, 8국장 등을 거쳐 매일 아침 김 전 차장에게 보고했다. 검찰은 이 같은 통신첩보가 국정원장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다.

6세트가 가동된 기간(1999년 9월~2002년 3월)을 감안할 때 도청 건수는 수만 건에 달하며, 같은 인물을 중복 도청했더라도 최소 수천 건을 도청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우에 따라 한 인물의 통화내용을 수년간 도청했을 수도 있다. 검찰이 공소장에 밝힌 도청 사례 중 최규선씨의 경우는 2000년 10월말부터 이듬해 11월까지 1년 넘게 도청을 당했다.

국정원은 99년 12월 R2와 별도로 ‘이동식 휴대폰 감청장비(CAS)’ 20세트를 제작했다. CAS는 승용차에 탑재, 200m 거리 안에서 휴대폰 통화자의 통화 내용을 감청하는 것으로,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된 것을 제외하고 2001년 4월까지 60~70차례 사용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 경우도 국정원 직원이 현장에서 임의로 휴대폰 번호를 입력할 수 있어 마구잡이식 도청이 가능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 새로 드러난 도청사례… 당시 정황은

검찰이 26일 김은성씨 공소장에 명시한 도청 사례 중 새로 드러난 도청대상 정치권 인사들은 고 김윤환 전 민국당 대표와 이완구 전 자민련 의원이다.

2001년 4월 민국당 김윤환 대표와 민주당 의원간 통화 도청은 당시 최대 정치 현안이었던 민주당ㆍ자민련ㆍ민국당 3당 정책연합과 관련이 있다. 집권 민주당은 자민련과의 ‘DJP 공조’로도 원내 과반의석이 안돼 2석을 갖고 있던 민국당과 정책연합을 추진했다. 때문에 국정원은 도청을 통해 민국당 김 대표의 의중과 기류를 파악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민국당 사무총장이었던 윤원중 전 의원은 26일 “3당 정책연합이 잘 될 것인지, 장애는 없는지 이런 것들을 살펴보려고 도청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며 “지금 드러나는 걸 보면 섬뜩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보좌관을 지낸 한 인사도 “정책연합을 두고 당시 민국당 7명의 최고위원이 당론을 모으는 과정에서 이론도 있었다”며 “국정원이 그 진행과정을 알려고 도청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9월 이완구 전 의원과 자민련 관계자간 통화내용에 대한 도청도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처리 문제라는 핵심 정치현안과 관련됐다. 한나라당이 8월24일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정신’ 파문 등 8ㆍ15 방북단의 돌출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임 장관 해임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자민련도 동조했다.

민주당은 자민련을 만류했지만 결국 해임안은 가결됐다. DJP 공조는 이로써 파기됐다. 당시 이 전의원이 자민련 원내총무로 있으면서 해임안 통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도청 대상이 된 것이다. 미국 체류중인 이 전 의원은 측근을 통해 “당시 자민련ㆍ민주당간의 공동정권 파기의 주역을 담당했던 원내총무였기에 항상 감시 당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며 “도청을 당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불쾌하다”고 전해왔다.

또 2001년 자신의 방미 추진과 관련해 주변인사들이 도청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황장엽씨는 “도청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 처지에 있지 않다”며 “도청한다고 뭐 내용이 있느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황씨와의 통화내용을 도청 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탈북자동지회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가 남북관계 등을 이유로 황씨의 미국 방문을 몹시 싫어했다”며 “도청 개연성은 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경환 비서관은 “임동원ㆍ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김은성씨와 공모해 조직적 도청을 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정녹용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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