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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 때 스트레스 '요람에서 무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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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아 때 스트레스 '요람에서 무덤까지'

입력
200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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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중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태어난 아기가 성장한 후에까지 행동발달에 장애를 겪는다.”

태교 신봉자라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과학적 근거를 따지면 시원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 쥐 실험에서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경진 교수는 1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열리는 ‘스트레스와 뇌 질환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임신중 어미 쥐를 만성 스트레스에 노출할 경우 태어난 새끼 쥐가 성체가 된 뒤에도 학습과 기억에 문제를 겪는다는 것이다. 임신중 스트레스가 단순히 저체중아 미숙아를 낳는데 그치지 않고 평생의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김 교수는 어미 쥐를 임신중 20일 동안 매일 6시간씩 꼼짝 못하게 플라스틱 통에 넣어두는 스트레스를 주었다. 태어난 새끼 쥐들은 정상 환경에서 길렀다. 3개월 후 성체가 되었을 때 이들은 체중 등 겉 모습은 대조군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행동은 매우 부산하고 공간학습 능력과 위험(공포)회피 기억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쥐를 물 속에 빠뜨려 출구를 찾게 하거나 먹이를 놓고 길을 찾게 하는 실험에서 ‘스트레스 쥐’는 정상 쥐보다 공간학습에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다. 또 한쪽 방에 전기를 흘려 공포를 느끼게 한 뒤 다음날 똑 같은 실험을 반복, 이 공포를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를 실험한 결과 정상 쥐는 한번만 전기자극을 받아도 다음날부터 전기가 흐르는 방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반면 ‘스트레스 쥐’는 아주 둔감한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평소에도 매우 부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치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와 비슷하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자궁 속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최근 의학계 주장과 닿아있다. 최근 의학계에선 비만 당뇨 암 심장병 등 현대 성인병의 발병이 이미 자궁 속 태아 때 결정된다는 ‘태아 프로그래밍’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이 말은 10여년 전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의 데이비드 바커 교수가 영국의 빈민지역인 하트퍼드셔에서 심장병 사망률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처음 정립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미국 코넬대 피터 너새니얼스 교수의 ‘태교혁명’에서는 이 같은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말해준다. 예컨대 임신한 여성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스트레스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코티솔에 노출된 태아는 태어난 이후에도 코티솔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게 되고, 이 경우 동맥경화 고혈압 노화 등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연구도 이러한 태아 프로그래밍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김 교수는 ‘스트레스 쥐 집단’의 뇌를 조사한 결과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뇌 해마조직에서 흥분성 신경전달 체계인 글루타메이트 수용체(NMDA)를 구성하는 단위체(NR1, NR2b)의 기능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스트레스가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바꾸는 유전자변이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유전자의 기능(발현)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ADHD 아동에 대한 태아기적 스트레스와 관련된 연구도 일맥상통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임신 12~22주 사이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후에 ADHD, 행동장애, 불안장애를 겪는 확률이 높았다는 연구가 벨기에 연구팀에서 나온 적이 있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가족에게서도 서로 다른 행동과 질병 패턴이 나타난다면, 자궁에서 지냈던 그 열달간의 환경을 추적해 볼 일이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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