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했다. 오랜 산문적 사유로 단련된 정신의 힘은 말에도 배어 나왔다. 옳음과 그름, 수용과 배척의 차원을 떠나 그의 논리는 정연했다. 지난 시절을 추억할 때는 신명도 냈고,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달면 다혈질의 성격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17년 동안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선배 김훈(56)을 보았고, 이 시대 문장가요, 소설가인 그를 만났다. 대화는 45만부나 팔린 그의 소설 ‘칼의 노래’로 시작됐다.
-‘칼의 노래’에 대한 우리사회, 특히 정치권의 반응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느낌은.
"(단호하게) ‘칼의 노래’를 386 애들이 읽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때 배 12척 갖고 300척을 부순 것처럼 하겠다는 거야. 무지몽매에 빠진 거지. 이순신이나 되니까 한 거야. 걔들이 갖고 나가면 다 죽어. 12척과 300척은 현대 사회에서 적용이 안 되는 이야기야. 중세 이야기를 쓴 건데 어떻게 현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TV에다 대고 말하는 거야. 그걸 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미쳤구나. 요새 내가 글을 잘못 써 가지고 어린 것들 망치는구나’ 했어. 진짜로 내 소설을 읽는 건 고마운데, 적이 300척 갖고 나올 때 지도자라면 최소한 200척은 갖고 나가야지. 12척을 갖고 나가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니들이 12척을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다’는 말을 TV에서 했는데 MBC가 빼버려 나만 바보가 된 거지. 얼마나 약 오르는지. 드라마? 안 봐. 처음 한번 봤는데 아동극 수준이야."
-그럼 왜 쓰셨어요.
"그 때, 그분(이순신)의 실존적인 부분을 썼는데, 현실을 지휘하는 리더들이 12척으로 300척을 깨듯 ‘경제를 살리겠다’니. 미치겠다 이거야. 적이 300척이면 500척 갖고 나가도 이길까 말까 하는데. 그래서 상종을 안 했어."
-이런 과정에서 우리사회가 극단적 이분법으로 갈라진 것 아닌가요.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져.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어. 중도란 인간의 상식이지."
-언젠가 ‘어느 편이라고 묻지 마라. 그 질문은 너무 폭력적’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는데.
"우리사회는 당파성 때문에 망한 거야. 좌우가, 중도 보수가 뒤엉켜 버려서 민족의 앞날에 가시덤불이 박힌 거야. 그걸 걷어 낼 수도 없다고, 그건 언어의 힘으로 안돼. 나도 못해. 나는 초야에서 언문 소설이나 쓰는 놈이야. 여러분들이 해야 돼."
이어 그는 특유의 섬세한 분석으로 지금, 우리 사회를 해부했다. "386이 리더가 됐잖아. 근데 걔들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는 아해들이야. 그래서 도덕적인 거지. 인간의 선의를 모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 아름답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 거든. 엄청난 세금을 내고, 반드시 아들을 군대 보내는 것은 우익이거든. 우익에겐 세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아 그래야 우익이 완성되는 거 아냐. 그런데 서울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
그러면서 자신도 굳이 말하라면 ‘중도 우익’이라고 했다.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좌익과 진보는 세상을 맡을 수 없어. 물적토대가 없으니까. 비참하게도 우리 시대의 물적토대의 역사는 우익이 만든 거야. 좌익이 반항하더라도 우익 토대 아래서 반항한 거라고. 그리고 한국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야."
-박 대통령이 그렇게 위대한가요.
"5,000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 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그의 정치적 과오는 어떻게 하고요.
"물론 그런 것까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리더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해. 다중이 하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 반대로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박정희나 이순신이나 강감찬이나."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때요.
"노 대통령의 마음은 로맨스야. 선한 마음을 담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거지. 그의 낭만주의야말로 역대 누구에도 없던 아름다움이야. 뜻은 옳고 바르고 도덕적이지만, 그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현실적 물적 토대가 없는 거야."
-기자와 소설가 중에 어느쪽이 좋은지.
"기자로 못한 원한을 지금 풀고 있는 거야. 기자 할 때는 6하 원칙에 맞게 써야 하는데 소설을 쓰니까 너무 편해. 근데 나는 사실 6하 원칙이 위대한,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해. 사실과 그것을 확인하는 것의 존엄함을 알아야 해. 지금 신문들을 보라고.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있어. 보수신문이나 진보신문이나 똑같아. 의견을 사실인양 떠들고 있으니 미쳤지. 나는 두 발짝 세 발짝 물러났어. 너무 진이 빠져서."
-이번 문학동네에 소설 ‘머나먼 속세’를 쓰셨던데, 만족하십니까.
"작가는 실패할 수도 있지. 기자라고 기사를 매일 잘 쓸수 있냐? 내년 2월부터 ‘치정’에 관한 소설 쓰려고. 앞으로 인류가 소설을 쓸 일이 없도록 만들거야. 여기 후배들 예쁘지만 다들 소설 못쓰게 해야지(웃음)."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다.
"나는 잡놈이여. 질서와 무질서 사이에서 깨지는 인간이 바로 김훈이야. 내 살과 뼈는 김구 선생 따라다니던 아버지(김광주)에게서 받은 것이거든. 염상섭 채만식을 존경하지 않아. 세상의 바탕이 폭력이라는 걸 알았던 아버지를 존경하지. 난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 길바닥, 잡놈 사회서 배운 거야. 기자라는 건 잡놈 근성이 있어야 돼.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한 후배의 고향이 경남 밀양이라고 하자, 그는 최근 그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바로 여중생 집단 성폭행이 자행된 그 곳. 그는 탄식했다. "나라가 망했더라. 남자 새끼 엄마들이 미쳤어. 도덕과 윤리가 없어. 단군 이래 최악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자기 자식밖에 몰라."
정리=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김훈 兄’과 함께 한 송년회 풍경
김훈 형(한국일보에서는 선배를 이렇게 부른다)과의 송년회는 후배들의 청으로 이뤄졌다.
지금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대부분은 그를 잘 모른다. 두번째 ‘문학기행’을 끝낸 1989년 어느날 그는 훌쩍 한국일보를 떠났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장명수 선배(현 한국일보 이사)의 "김훈, 와" 라는 한마디에 10년 만인 1999년 돌아와 세번째 ‘문학기행’과 ‘자전거기행’을 쓰기 시작했고, 그러다 무슨 연유인지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나, 간다" 한마디로 사라졌다. 때문에 그의 소설이, 갖가지 기행(奇行)이 세간의 화제일 때마다 기자로서, 문장가로서, 올해 최고 잘 나가는 소설가로서 그에 관한 숱한 일화는 선배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12월 어느날 툭 튀어 나온 말. "이번 송년회는 김훈 형 모시고 하면 어떨까요. 그런 거 있잖아요. 집단 인터뷰." "좋지"라고 했지만 ‘나와줄까’ 걱정했다. 그의 별난 성격 때문 만은 아니다. 한국일보를 떠난 지 오래고, 이제는 소설가로서 살고, 또 그를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 지금, ‘아직도 한국일보에, 얼굴도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애정이 있을까.’.
그러나 기우였다. 기꺼워 하면서 날짜까지 정해 주었다. 우리가 이름 붙인 ‘김훈과의 집단 대화’란 이름의 송년회는 이렇게 해서 겨울 추위가 기지개를 켠 23일 조계사 어름의 한 식당에서 열렸다.
30분 늦게 나타난 그는 앉자마자 후배 인사를 받으며 "몇 년 됐어 입사한지? 5년. 한참 말 안들을 때네. 5년 되면 지가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근데, 후배들 보니까 너무 기분 좋다. 나도 한국일보 기자 다시 할까. 예쁜 후배들이 많으니까"라는 덕담을 했다. 술잔이 한바퀴 돌았고, 그 시간에 맞춰 그도 20년 전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문학기행’을 있게 한 ‘장명수’가 있었다. "장 선배는 왜 늙은 나를 미워하고, 내가 반항한 것만 기억하시냐. 몇 번 속을 썩였지만, 아직도 ‘얘, 훈아’ 하면 ‘네’하고 대답하는데. 장 선배가 없었으면 기자가 아니라, 난 깡패가 됐을 꺼야. 그런 어른이 있어 나 같은 애들을 챙겼지. 속 썩여도 봐주시고. 지난번에 그러데 ‘너 떴니?’라고. 너무 기분이 좋아 ‘저 떴어요’라고 했어. 그러고 살어. 과히 틀린 말씀하신 것도 아니잖아."
3시간 동안 그는 때론 확신에 찬 어조로, 때론 낄낄대며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친정인 한국일보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하면 들어가라, 나도 그랬다. 그게 한국일보가 살아온 기상이다. 알겠지? 야! 고기 맛있다.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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