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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 - 한중교류의 성과와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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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터뷰/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 - 한중교류의 성과와 나아갈 길

입력
2004.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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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원로(元老)라는 말은 좀 남발되고 있다. 나이 많고 덕망 높으면서 나라에 공로가 큰 사람을 일컫는 말일 텐데 실제로는 나이만 들면 ‘원로’다. 하지만 내년에 여든다섯이 되는 김준엽(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은 ‘원로’라는 이름이 전혀 틀리지 않을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래서 그의 발언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세상 이야기 하자"는 인터뷰를 한사코 사절해왔다. 그의 이름이 올라 있는 국가원로회의라는 단체가 최근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권고문을 채택했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 나 없는 동안에 이름 넣어 놓았던데 나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두 가지는 예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나 광복의 의의를 되새기는 이야기는 더불어 나누기를 반기며, 15년 동안 앞장서서 추진해온 한중 문화교류 사업은 약간 욕심내서 알리려는 쪽이다. 시국 이야기를 청했다가 "그건 관두자. 한중 교류쪽에 할 말이 있다"는 김 이사장을 서울 성북동의 동원빌딩 3층 재단법인 사회과학원으로 찾아갔다.대담 / 임철순 편집국장 ycs@hk.co.kr

_ 한중 교류 사업을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셨지요?

"광복 되고 지금 베이징(北京)대학 동방어언(語言)전문대학의 전신인 동방어전문학교에서 강사로 지냈는데, 1948년에 난징(南京)서 졸업한 제1회 졸업생 3명을 뽑아 한국 유학을 시켰지요. 서울대 역사과에 편입시켜 이병도(李丙燾) 선생 지도를 받게 했는데 6·25때 피란 갔다 오니 종적이 없어요. 죽었나 걱정하고, 괜히 데려왔다고 후회도 했는데 나중에 중국을 오가던 미국의 스칼라피노등을 통해 그 중 한 사람이 베이징대에 있는 걸 알았어요."

지금은 꽤 흔한 한중 학생 교류사업을 반세기도 더 전에 시작한 셈이다. 일제 말기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부관을 지내며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투쟁한 이력이나, 광복 이후 난징의 중국국립동방어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했고, 1949년까지 중국 국립 중앙대 대학원에서 중국사를 공부한 인연도 각별한 것이다.

그는 한중 수교(1992) 이전인 1989년에 중국을 다시 찾아갔다. 사회주의의 장막을 걷기 시작한 중국에 가면서 두 가지 구상을 했다. 하나는 중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활성화해야겠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리 옛 문화와 독립운동 흔적들을 복원하겠다는 것이었다.

_ 중국대학의 한국학연구소 설치 성과는 어떻습니까?

"1959년 미국 하버드대에 머물 때 그 곳의 교수들이 한국이 어디 있는지, 제 나라 말은 있는지 묻는 데 놀랐어요. 해외 한국학 연구기반 조성의 필요성을 절감했지요. 지금은 베이징대,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 저장(浙江)대, 산둥(山東)대, 랴오닝(遼寧)대, 베이징어언문화대 등 8개의 지역별 최고 대학에 한국학연구소가 있을 만큼 기초가 잡혔습니다. 1995년부터 2년에 한 번씩 한국전통문화 학술회의도 열고 있지요." 사무실 책장을 한 가득 채운 중국 각 대학의 한국 논문집이나 명함에 적힌 중국 일류 대학 11곳의 명예교수 직함은 그 노력이 얼마나 정력적이었는지 알게 한다. 김 이사장은 "중국은 각 지역에 거점대학을 정해 세계적 대학으로 육성하고 있다"며 "평준화도 좋은데 좋은 학교를 하향해서 평준화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15년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중국 내 우리 문화유적 복원 사업은 내년 10월 저장성 항저우(杭州)시의 고려사(高麗寺) 복원으로 일단락된다.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여러 대 피우며 권하기까지 하는 그는 정정해 보이는데도 "여든이 넘으면서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최근 백내장 수술을 했는데 시력이 좋아져 안경알을 도수 없는 것으로 바꾸었다"며 트레이드 마크 같은 검정 뿔테 안경을 쓱 벗으며 묻는 말에 답한다.

_ 왜 그렇게 중국 내 우리 문화유적 복원사업에 애를 쓰십니까?

"한중 교류가 수천 년을 이어왔는데도 중국 내 우리 문화의 흔적이 어디 남아 있는지 잘 모르는 형편 아닙니까. 연간 200만 명이 중국을 방문하지만 백두산이나 관광하고 돌아옵니다. 우리 문화의 흔적을 둘러볼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는 "기념비나 유적 복원을 위한 고증과 중국정부의 허락을 받아내기 위해 해마다 3차례 정도 중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문화교류는 수꼭지 틀면 물 쏟아지듯 일시에 수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는 김 이사장은 "일본이 그런 일을 많이 한 데 반해 우리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는데도 문화·역사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중국의 고구려사왜곡문제도 정부의 무관심, 국사를 소홀히 한 잘못을 원인으로 꼽았다. 물론 그는 중국의 학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당신들의 역사도 없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_ 고려사 중건 작업을 말씀해 주십시오.

"고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에 건너가 송나라 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각지를 다니며 중국의 고승들과 토론했습니다. 항저우 혜인사원(慧因寺院)에서 존경하던 정원(淨源)법사를 만났고 7,500권 정도의 불경을 기증했습니다. 당(唐)대에는 도교 숭상정책으로 불교가 탄압 받아 경전들이 많이 멸실했기 때문에 의천이 기증한 경전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 뒤로 절의 이름이 고려사가 되고, 선종에서 화엄종 절로 바뀌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도 의천은 화엄종 불경 170권과 화엄경각 보수를 위해 금 2,000냥을 쾌척했습니다. 절은 태평천국의 난 때 완전히 없어졌지요. 1989년에 가 보니 주춧돌과 우물만 있더군요. 그래서 3차례 방문해 중건 문제를 항저우시 당국과 협의했고, 지난달 왕궈핑(王國平) 시 공산당 서기와 만나 중건에 합의했습니다. 항저우시 종교국장도 중건에 참고하기 위해 해인사 불국사를 둘러보고 갔습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항저우를 방문한 한국인은 20만명으로 외국인 중 가장 많았다"며 "고려사가 서호 인근인 데다 옆에 호텔 신축계획도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추진해 완료한 유적기념사업은 많다. 독립운동관련 작업으로 상하이와 충칭, 항저우의 임정청사, 상하이 루신(魯迅·옛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사 기념비 확대 사업은 거의 완료됐다. 길게는 3년 정도 중국정부를 설득해 이뤄낸 일들이다. "옛 훙커우 공원에는 ‘윤봉길의사 기의(起義)현장’이라는 표지만 있었는데 사정을 알아 보니 임정을 남한정부의 전신으로 이해한 상하이시가 북한을 의식해서 한 일"이더라는 것이다. 임정이 남북을 연합해 정통성을 갖는 정부라고 설득해 기념유적을 확대했다.

유교 관련 사업은 양저우(揚州)의 최치원 기념비 및 최치원 사료 진열실, ‘표해록’을 쓴 최부(崔溥)를 기념하는 저장성 임해(臨海) 최부 기념비 건립이 있다. 도교는 신라 출신으로 중국 도교에서 추앙하는 유명도사 53명에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포함된 김가기(金可記)를 기리는 시안(西安) 종남산(終南山)의 김가기 기념비, 불교는 고려 출신으로 중국 천태종 제16대 교조가 된 학승 의통(義通)을 기리는 닝보(寧波) 보운사(寶雲寺) 기념비 건립과 고려사 중건 작업이 포함된다. 무역 관련 유적은 ▦칭다오(靑島) 자오저우(膠州)시의 고려정관(高麗亭館) 기념비 ▦닝보의 고려사관(高麗使館) 기념비 ▦양저우(揚州)의 고려관기념비 등이 있다. 중국이 적극 나선 경우도 있고, 상하이 충칭 임정청사처럼 우리 돈이 꽤 들어간 예도 있다.

"정치나 시국 이야기는 왜 안 하시느냐"고 묻자 "해 봐야 욕밖에 안 나온다"며 웃고 만다. "만주니 봉천이니 땅 다 잃고, 해방 이후 반도마저 둘로 갈라졌으니 한스럽기도 하고 참 정치 못한다는 생각도 든다"면서도 예의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5공화국 때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고려대 총장에서 쫓겨난 덕에 독립운동사 이야기를 담은 ‘장정(長征)’도 쓰고, 한국일보에 독립운동사도 연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두환이 고맙다"며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의 연구실 액자에는 ‘斷學無憂(단학무우)’라는 노자 노덕경 20장의 말이 씌어 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역설이다. 광복군 소령으로 김구(金九) 주석 밑에서 임정신문을 만들었던 독립투사, 여러 정권의 총리 제의를 마다하고 50년 넘게 학자로 외길을 걸어온 우리 시대의 원로는 ‘단학(斷學)’의 경지를 자신이 평생 오를 큰 봉우리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정리=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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