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꽃’ 전문)
시인이 갔다. 그로 하여 불리어지기를 기다리던 뭇 ‘이름’들을 남기고 그예 갔다. 갔지만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그 이름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묵직한 ‘눈짓’으로 남았다.
그는 1922년 11월 경남 통영(옛 충무) 만석꾼 집안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만년까지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던 그의 꼿꼿하고 완고한 성정은 타고 난 것이었던가 보다. 명문 경기중학교에 진학하지만 일인 교사와의 불화로 5학년을 못 채우고 자퇴했고, 니혼(日本)대학 창작과에 입학해서는 일왕을 험담했다는 죄로, 불령선인으로 찍혀 3학년 때 퇴학 당한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서 ‘릴케’를 만났고, 관념시의 세계에 눈을 뜬다.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1945년)를 창립, 예술운동을 전개했다. 통영중 교사 시절인 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자비로 출간하면서 본격화한 그의 시작 활동은 전통 서정시에서 출발하지만, 꽃을 소재로 한 상징주의적 이데아를 추구하는 연작들로 나아갔다. 그가 ‘비로소 아류의 티를 벗고 내 나름의 길을 보았던’ 시기였다. 59년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그 해에 나온다. ‘부다페스트…’에서 보인 그의 흥분과 열정은 3·15 마산의거 직후 ‘베고니아 꽃잎 처럼이나’와 같은, 참여시의 전형이자 4월 혁명시의 효시로 보아도 좋을 시로 이어진다. ‘너는 보았는가… 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하지만 그는 60년대 중반부터 쓰기 시작한 장시 ‘처용 단장’으로 ‘무의미시’를 주창, 70년대 절정을 이루던 순수-참여시 논쟁에서 홀연히 비껴 선다. 거세된 관념과 이데올로기의 상투성에 대한 혐오 위에서 그의 시는 까다로운 지적 편력을 이어갔다. 열정적 강의의 교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 중 백미는 14년을 재직한 경북대 시절. 강의실은 항상 만원이었고, 종종 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뒷시간 교수가 복도에서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유명한 일화도 남겼다.
80년대 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는 정치외풍에 휘말리며 학교를 나와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오욕의 이 시기를 두고 훗날 그는 "한마디로 100%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처량한 몰골로 외톨이가 되어,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모르고 보낸 세월"이었다고 했다. 만년의 그의 시는 스스로 칭하듯 ‘변증법적 전개과정’을 거쳐 의미시·관념시로 회귀한다. 반 백년을 넘게 해로한 아내 명숙경(明淑瓊 ·99년 작고)를 보내고 2001년 펴낸 시집 ‘거울 속의 천사’를 두고 그는 "일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시를 쓴 시기였다"고 말했다.
170㎝의 헌칠한 키에 깡마른 체구, 말수 적고 깐깐한 인상. 그는 어디서든 늘 꼿꼿한 선비였고, 시에 대한 기준도 늘 꼿꼿했다 "시작(詩作)을 그만두는 시기를 헤아리는 것은 비평능력이다. 좋은 시인이 느슨해지면 시작을 멈춰야 할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시의 퇴화이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 현대시학 7월호에 ‘시인의 어깨’라는 시를 기고했다. ‘릴케가 딸과/ 아내 클라라의 곁을/ 떠난다./ 시인이 되겠다고/ 떠나는 릴케의 어깨가/ 빳빳하다./ 어쩌겠는가/ 시인이 되겠다고 떠나는데,/ 시인이 된 릴케는 죽음 앞에서/ 한뼘 더 빳빳해진다/ 어깨가’
서정시에 기운 한국 현대시단의 무게 중심을 철학적 관념시로 지탱한 든든한 균형추였던 그의 만년의 바람은 "마지막까지 시 쓰며 건강하게 살다가 가야지"였다. 중학시절 농구, 대학시절 야구선수로 단련된 시인의 몸은 그의 희구대로 건강했고, 그는 자신과의 약속처럼 ‘마지막까지’ 시를 썼다. 미당이 준 아호 ‘대여’의 의미처럼 ‘서두르지 않는 큰 그릇의 시인’으로 산 그는 60여년 간 1,000여 편의 시를 써 16권의 시집을 남겼고, 곧 유고시집 ‘달개비꽃’도 나올 예정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가 ― 대여 김춘수 선생님께
김 종 해 (시인ㆍ 한국시인협회 회장)
천사가 우리 곁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천사를 보지 못한다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났을 때
그분이 천사였음을 비로소 안다
하늘의 뜻과 말을 전하는
시의 천사여.
그대 가고 없는 빈 자리에
남은 것은 꽃보다 아름다운 시들,
언어가 빚어 놓은 음악과 향기,
살아서 미당 서정주와 함께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받던
우리 시의 천사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시가 되고, 천사가 되었다
우리 시의 황무지 60년을 개간하고
문 밖에 밝은 등불 환하게 켜놓으셨던
김춘수 선생님
그분이 하늘로 오르시던 날은
우리는 슬픔에 가위 눌려
몇날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한다
아닌 밤중에 비수를 들고
폄하하려는 세력도 있지만
우리 시의 천사
그분이 이룩한 영광을 뺏지 못하리라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이
러시아 사람들의 자랑인 것처럼
우리의 시인 김춘수 선생님은
우리 역사 안에서 영원하리라
■김춘수의 시 세계
4·19는 명민한 청년작가 최인훈으로 하여금‘광장(1960년)’을 쓰도록 강박했다. 북쪽을 향해서는 물론 남쪽을 향해서도 감히 ‘노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함을, 그러나 동시에 ‘노오!’라고 말할 수 없음을 4·19가 요구했던 것이다. ‘광장’을 4·19가 썼다고 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4·19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이른바 난해시라 부르기도 하는, 시인 자신도 잘 모르는 시를 염치도 없이 씀으로써 시인 행세를 일삼았던 시인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한 것도 4·19였다. 혼자 잘난 척하는 늪에 빠졌던 김수영 신동문 들이 세계를 구조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김종삼 김춘수 들이 세계를 순수 이미지로 보기 시작한 것도 4·19의 강요사항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의미의 시’와 ‘무의미의 시’의 탄생장면이라고나 할까.‘시여 침을 뱉어라’고 외치며 내용 쪽이 형식 쪽을 향해 자유가 모자란다고 우기는 시들이 김수영에 의해 폭포처럼 두려움도 없이 쏟아졌고, 김종삼 김춘수에 의해 단순하고도 투명한 이미지의 시편들이 북 치는 소년들의 표정과 울림을 동반하면서 펼쳐졌다.
의미의 시 쪽이 민족과 민중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거대한 뿌리로 성장한 경우를 고은 신경림 김지하 등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의미의 시 쪽은 어떠했을까. 이 물음에 압도적이면서 거의 유일하게 응해 오는 시인이 김춘수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물음 속에 미당 이래 최대 시인으로 평가 받는 김춘수의 시적 위업과 그 시사적 의의가 잠겨 있다.
앞에서 잠시 지적했듯, 무의미의 시 쪽에 김종삼, 김춘수가 서 있었다. 투명한 이미지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점에서 두 시인은 같았으나 그 구성방식에서는 크게 달라졌다. 이미지의 생략과 그로 인해 생긴 잔상효과를 통해 얻어지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김종삼이 문제 삼았다. 그 때문에 그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할 수조차 있었다. 이 시적 가능성은, 불행히도 시인의 빠른 죽음으로 더 심화되지 못했다. 김춘수의 경우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첫째, 무의미의 시 계보의 김춘수식 방법론을 구축했다는 점. 김춘수의 이미지 구축방식은, 30년대 영미 이미지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이른바 그들이 말하는 순수 이미지란 기술적(記述的) 이미지를 가리킴이었다. 곧 단순성을 겨냥한 까닭이다. 단순성의 추구라 했거니와, 그것은 그들의 극복 대상이 저 상징시라 말해지는 애매모호한 시적 영위에 있었음을 새삼 말해놓고 있다. 기술적 이미지를 통해 일체의 애매모호성을 물리칠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김춘수의 위업은 그 다음 단계를 방법론상에서 전개했음에서 찾아진다. 방대한 분량의 시론이 끊임없이 씌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도 남는다. 고금동서의 문학론이나 사상서를 지속적으로 탐색함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장면이 그의 시론에서 뚜렷하여 감동적이다. ‘무의미의 시가 되라!’라고 시론에다 대고 외치면서 그는 시를 쓴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꽃’부분)
‘꽃이 되었다’란 무엇이뇨. 시가 씌어졌음을 가리킴인 것. 그가 도달한 최고의 꽃의 이미지는 어떠할까.
"주어를 있게 할 한 개의 동사는/ 내 밖에 있다/ 어간은 아스럼하고/ 어미만이 몹시도 가까이 있다"(‘어법’부분)
이른바 서양 형이상학의 고질인 주어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이는 곧 술어적 사고의 단계가 아닐 것인가. 그런데 동사(어간)까지도 벗어나기란 무엇인가. 놀랍게도 그는 이 술어적 사고까지 넘어서고자 했다. ‘어미’만이 있는 세계. 여기가 순수 이미지의 김춘수식 도달점이다.
둘째, 이 점이 소중한데, 한 순간도 시적 실험을 게을리하거나 손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 한 순간도 주저앉지 않았음이 그것. 미당이 지어준 아호 대여(大餘)를 완강히 물리치고 아호 없음을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삼가 명복을.
김 윤 식 (문학평론가ㆍ명지대 석좌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