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로 온 나라가 전면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직을 내걸고 폐지 저지를 선언하고 나섰고 전직 국무총리 등 냉전세대의 원로들도 이에 가세했다. 개혁과 역사 발전을 위해 한 번은 치러야 하는 홍역이지만 이 같은 사생결단의 방식으로밖에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그런데 온 나라가 국가보안법 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엉뚱한 곳에서 사단이 터지고 말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열린우리당이 최근 국회 행자위에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상정했는데 이 안이 기절초풍할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안은 조사대상을 군의 경우 중좌 이상에서 소위 이상으로, 문관은 군수 이상으로 확대한 반면 유독 경찰, 헌병은 조사대상을 기존의 헌병 분대장 이상에서 경찰서장인 경시(현재의 총경급) 이상으로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통과된 친일진상규명법이 너무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개정을 주장해 온 열린우리당이 유독 경찰과 헌병은 조사대상을 축소하려한다니, 국민을 우롱해도 정도가 있지 이럴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분노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누가 뭐라고 변명을 해도 대상 축소의 이유는 뻔하다. 신기남 의원의 부친이 일제 헌병이었던 것이 밝혀져 당 의장직을 내놓아야 했고 또 다른 중견의원인 이미경씨의 부친도 일제 헌병이었던 것이 밝혀지는 등 당내 핵심인물 부친들의 경찰, 헌병 경력이 문제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7월 27일자 이 난(‘박정희와 JP’)에서 지적했듯이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신세력인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연대하고 공동정권을 꾸릴 때, 또 친일과 유신을 이유로 많은 사회단체들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기념관을 국고 보조로 짓겠다고 나섰을때 김대중 정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친일과 유신 청산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박근혜 대표를 겨냥한 정략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DJP와 박정희기념관 문제는 과거의 일로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이 정략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 마음을 잡고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것이라고 좋게 봐 줄 수도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번 개정안은 열린우리당의 과거사 청산은 민족정기와는 거리가 먼 정략적 캠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말았다. 박 대표와 관련된 친일 문제는 조사대상을 확대하고 자신들과 관련된 문제는 조사대상을 축소하자면서 어떻게 국민들이 자신들의 친일청산이 정략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어주기를 바란단 말인가?
한나라당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현재 한나라당은 독자적인 개정안을 마련하고 있는 바, 경찰과 헌병의 경우 계급 제한 없이 조사를 하자는 방침이다. 경찰과 헌병의 경우 직급이 낮을수록 민중수탈의 정도가 극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침은 줄곧 친일진상규명에 소극적이었고 올 봄에 이 법이 제정될 당시 소위 이상으로 되어 있던 원안을 중좌 이상으로 변경시켜 박정희를 조사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데 앞장섰던 그간의 한나라당 행적과 너무도 모순된다.
결국,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부친들이 경찰, 헌병 출신이 많다는 사실과 관련해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 정확히 동일한 정략적 목적에 의해 이 분야에 대한 무한조사를 주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정략에 눈이 멀어 민족정기와 관련된 친일청산 문제를 한 편의 코미디로 비하시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민들로부터 정략성을 의심받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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