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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주 의학전문기자의 여자는 왜?]<43> 화병에 더 잘 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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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주 의학전문기자의 여자는 왜?]<43> 화병에 더 잘 걸리나

입력
2004.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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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는 40∼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불청객 갱년기가 시작되고, 남편은 야근이다 접대다 사회적으로 더 바빠지고, 자녀는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만 지켜왔던 중년의 여성은 자신이 '불쌍하게도' 가족에게 소외당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그러다 갑자기 꾹꾹 눌러왔던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를 화병(火病)이란 형태로 폭발한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고, 목이나 가슴에 덩어리 같은 게 느껴질만큼 강렬하게 치미는 증상이다. 연세대 신경정신과 민성길 교수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오랫동안 억제한 결과"라면서 '한(恨)'이 쌓이고 쌓여 몸과 마음의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화병"이라고 말했다.

왜 여성에게 주로 나타날까

고려대 간호대 박영주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41∼65세 여성을 대상으로 총 전체 2087명 가운데 4.96%가 화병으로 분류됐다.

왜 남자는 여성보다 화병이 적을까. 여성이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여성에 비해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상당히 많다. 민교수는 "남성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직장동료와 회식이나 술자리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설사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집에 오면 가정에서 쉴 수 있으므로 화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구나 남성들은 자신이 스트레스로 두통이나 신경질 짜증이 나더라도 되도록이면 외부에 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행동은 사회의 패배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싶은 병

여성들에게 화병은 숨기고 싶은 병이 아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당신 우울증이요' 라고 진단 내리면 대부분 환자는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면서도 의사로부터 화병이라고 들었을 때는 스스럼 없이 주위에 자신의 병을 알린다. 민교수는 "환자들은 억울하고 분한 일이 내게 너무 많이 쌓여 이렇게 된 것이라며 스스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화병의 원인은 한(恨)

경희대 한의과대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교수는 "한은 약하고 선한 자가 강하고 약한 자에게서 느끼는 열등의식이나 갈등으로 볼 수 있는데,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남편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한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고 진단했다.

그럼 여성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는 만큼, 한도 줄어들고 있지는 않을까. 전문가들은 현대사회의 한은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전한다. 민 교수는 "과거 시어머니나 남편으로부터 구박 받던 며느리가 주로 화병을 나타냈다면 최근엔 며느리에게 핍박받는 시어머니의 화병이 더 심하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20∼30년 전에는 시어머니에게 당하고 요즘엔 며느리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니 요즘 50, 60대들이 과연 화병이 안 걸리겠느냐"고 말한다.

화병의 원인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녀 차별이나 시집살이가 원인이 돼 폭발했다면, 요즘엔 강남 집값 상승을 바라보며 갖는 상대적 허탈감, 잘못된 주식투자로 빈털터리가 된 데 대한 분노, 능력개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은 채 가사의 의무만 무겁게 짊어지게 된 데 대한 분노 등이 화병의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증상

세대 차라고 할 만큼, 화병환자들은 나이에 따라 상태를 다르게 호소한다. 민 교수는 "60, 70대는 갑자기 열이 솟고 가슴에 무언가 치밀어 오르거나 응어리 같은 게 느껴진다는 식의 신체 증상을 주로 호소하는데 비해 40, 50대는 화가 나서 못살겠다는 식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화의 영향이 화병의 표현까지 달라지게 하고 있다.

화병, 질병이라고 볼 수 있나

화병은 아직까지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에 포함돼 있지는 않다. 미국정신의학회 진단편람에는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문화관련 증후군이라고 언급돼 있을 뿐이다. 국내 정신과학회에서도 아직까지는 이를 정식 질병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

국내 학자간에 화병을 질병으로 분류할 것이냐를 놓고선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질병이라기보다는 한국 전통 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종의 신드롬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학자는 화병은 우울증 혹은 우울증 전단계 정도의 정신장애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화병에 관심을 가진 국내 의료진들은 현재 어디까지가 화병이고 어디까지가 우울증인가 진단 기준을 마련해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이미 화병 진단을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진단 면접지'는 완성된 상태.

민교수는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화병을 질병으로 인정하는데 반대하고 있으나, 화병을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었을 경우 뇌졸중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등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점에서 반드시 질병으로 올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과 다른 화병

민 교수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화병 환자와 우울증 환자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한다. 우울증 환자는 맥이 풀려 있는데, 화병 환자는 생동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화병 환자들도 무력감 의욕저하 눈물 같은 우울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불면증이나 식욕상실 같은 '식물학적' 증상이 화병환자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는 '죽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하나, 화병 환자들은 이런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민 교수는 "환자 스스로 자신이 화병이라고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지만, 의사가 '당신 화병 아니오?' 라고 일단 물으면,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게 특징"이라면서 "자신을 화나고 억울한 처지에 몰아넣은 대상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의사에게 솔직하게 보이며, 현재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진료도중 많은 환자들은 의사를 앞에 두고 웃었다, 울었다 하며 변화무쌍한 감정을 드러낸다.

화병 재발 막으려면 예방이 중요

화병은 다양한 감정과 신체 증상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질환으로 보통 전문의들의 치료도 종합적으로 시도된다. 양방에서는 신경안정제 항우울제 등 약물요법과 함께 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가족치료 등의 기법을 동원한다.

한방에서는 화가 올라간 것을 식혀주는 약물과 함께 침, 뜸, 부항 등으로 꽉 막힌 기(氣)를 순환시키는 방법이 동원된다. 기공이나 명상등 정신 요법도 권장한다.

민교수는 "살면서 화병에 누구나 노출될 수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통해 화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화가 난다고 바로 화를 폭발하는 것은 또 다른 화를 만들 뿐이다.

송영주 편집위원 yjsong@hk.co.kr

화병 예방법

● 화가 난다고 화를 바로 폭발해서는 안 된다.

● 긍정적이고 낙천적 사고를 가지고 산다.

● 갱년기 신체 변화에 건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한다.

● 화를 폭발시킨 후에는 전신을 이완시킨다.

● 화를 쌓아두지 말고 적절히 표현하도록 한다.

●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 남편, 자녀와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진다.

● 가정은 스트레스가 쌓이는 곳이 아니라 푸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 화를 가지고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한다.

● 기공, 명상을 통해 딱딱한 몸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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