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발표된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한국의 책 100' 번역사업 추진계획은 과거 군사정권의 밀어붙이기나 북한의 '속도전'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문화의 전반적인 모습을 담은 100종의 책을 1년 안에 6개 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가히 기네스 북에 오를 만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젓고 있다. 오죽했으면 황지우 선정위원장조차 "문화의 삼풍백화점이 될까 두렵다"고 했을까.지난해 10월 한국이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으로 결정되면서 본격화한 이 사업의 발상과 진행과정, 그 결과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당초 문화관광부 간부들과 출판계 인사로 구성된 준비기획단의 구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저 100종을 뽑아 현지 진출에 적합한 언어로 번역하겠다는 것이었다. 영문 이름도 '한국 최고의 책 100'(Korea best and highest 100 books)이라고 근사하게 붙였다. 행사까지는 2년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만 이루어지면 최고 1,000만 달러의 저작권 수출 효과를 올리고, 주빈국 참가 직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나온 일본 포르투갈 헝가리의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도 가능할 것처럼 홍보했다. 23억 9,000만원의 예산도 확보했다.
'명저'의 개념 자체와 기준이 모호하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지적이 잇따랐지만 기획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막상 선정위원회 구성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선정위원으로 위촉받은 문화계, 학계, 출판계 인사들이 명저 100선이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한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의 책 100'이라는 두루뭉실한 이름에 24명으로 어렵게 선정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사업은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기존 번역본까지 포함할 것이라는 당초 계획이 뒤집혔고,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발표했다가 갑자기 영어로 쓴 책까지 포함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한국의 책 100권 목록은 죽도 밥도 안된 꼴이다. 짧은 기간에 현실적으로 번역이 가능할 것인지는 오히려 부차적 문제였다. 선정된 '한국의 책 100'이 한국을 대표하는 저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을 홍보하는 책자로도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대표적인 작품과 '삼국유사' 등 고전이 이미 외국어로 번역출간됐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예술'이나 '니체의 철학 100년' 등 한국과 별 관련성이 없는 책이 포함됐다. 이 책들이 해당 주제에 대한 한국 학자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이유만으로 국제도서전에서 관심을 끌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차라리 한국의 공학 수준을 보여줄 반도체나 세계 최강인 바둑과 태권도, 한국을 즐기기 위한 관광안내 책자를 소개하는 게 외국인들이 우리 문화의 문지방을 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인사까지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 소개된 국내 대표적인 문인들의 작품 중 상당수가 해외서점에서 푸대접 받고 있는 현실에서 문학작품 22종을 새롭게 현지 출판하겠다는 계획은 만용에 가깝다. 그렇게 해외 출판되기도 어렵지만 책이 나오더라도 서점에 진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사업이 처음 발표됐을 때 기자가 선정 방향, 졸속 번역 등의 우려를 제기하자 문화관광부 담당자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항의한 바 있다. 실제로 한국문화를 제대로 소개하는 홍보책자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제발 그러기 위해서라도 100권이라는 상징성에 너무 매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최진환 문화부 차장대우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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