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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 한국의 장인들]<6> 유리화 작가 최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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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손끝 한국의 장인들]<6> 유리화 작가 최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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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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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장인이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작품을 오롯이 제 손으로 완성하는 이를 일컫는다. 반면 유럽에서는 디자인 개념이 있으면 작가이고 작가의 지시대로 제작만 맡는 이를 장인으로 부른다. 유리화 작가인 최영심(58)씨는 그런 점에서 한국 기준으로는 장인이지만 유럽 기준으로는 작가이다. 그도 한때는 유럽의 유리화 공방에서 유리를 자르고 납선에 끼워 붙이는 일을 했던 장인이었다. 하지만 미술 대학을 나온 그의 예술정신은 남의 작품을 만들어주는 장인으로 남기에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그는 장인을 접고 유리화 작가가 되었다.유리화는 우리가 흔히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부르는 유리그림을 말한다. 중세 유럽에서 시작되어 교회 장식물로 많이 쓰인다. 요즘은 가톨릭의 절기로 사순절이다. 예수가 로마 관헌에 체포되고 고난을 받은 후 죽음을 당하고 마침내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전 여정을 가톨릭 신도들이 함께 체험하는 시기이다. 사순절의 분위기 탓인지 최씨의 작품을 본 순간 아릿한 슬픔이 배어왔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먹먹한 느낌.

"내가 쉰 살이 되고부터는 작품이 무척 밝아졌다. 옛날엔 정말 말도 못하게 어두웠다. 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유리화는 지금 봐도 너무 어두워서 돈 벌면 갈아드려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다"고 최씨는 웃었다. 그러면서 "안틱글라스(유리화의 재료인, 전통방식으로 만든 유리)가 원래 색깔이 좀 가라앉는 느낌이 있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동아대 회화과를 나오고 로마에서 프레스코화를, 오스트리아에서 유리화를 배웠다. 85년부터 오스트리아 인체르스도르프에서 살며 유럽과 한국에서 활동중이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는 물론 우리나라 전역의 40여개 성당과 수도원에 그의 유리화가 있다. 현재도 경북 왜관 분도 수도원의 유리원 공방에서 경북 안동시 목성동 안동 주교좌성당의 유리화를 만들고 있다.

유리화는 유리화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 그걸 토대로 유리화 장인이 유리를 골라 납선으로 이어붙여 작품이 완성된다. 물론 유리끼리 붙이거나 에칭 기법으로 유리를 녹여 색깔을 내고, 유리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유리화의 생명은 유리로 색채가 얼마나 잘 표현되느냐에 달려있다. 수채화인 원화와 빛이 완성하는 유리의 색감이 꼭 일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리화의 완성도는 유리화가가 유리의 색감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와 장인이 얼마나 그 색감을 잘 찾아주느냐에 달려있다.

최씨는 1년 동안 유리화 장인으로 일했고 유럽 최고의 장인을 동반자로 선택해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유리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그림을 완성시켜주는 루카스 훔멜브루너(71)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유리화 장인이자 그의 남편이다. 훔멜브루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화가인 마르그레트 빌거(1904∼1971) 리디아 로폴트(1922∼1995)와의 공동작업으로 2차대전 때 무너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오래된 성당 유리를 새롭게 복원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두 사람은 처음 수녀와 수사로, 제자와 스승으로 만났다.

최씨가 수녀원에 간 것은 66년. 대구여고를 나온 그는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그토록 꿈꾸던 미술대학을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죽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명상을 즐기던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인간이 마지막에 닿게 되는 그 점 하나'가 과연 무얼까 하는 철학적 문제는 풀고 죽겠다는 생각에 성당을 찾았다가 '양로원 고아원에 봉사도 하는 수녀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돌렸다. 더구나 수녀원에 가면 미술공부를 다시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가 지원한 부산 예수성심전교수녀원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너무 어두워보인다"며 그를 받아들이길 반대했지만 에델깃 수녀원장만은 미술성적이 탁월한 점을 들어 그를 받아들였고 장학금을 주며 미술대학에 보냈다. "원장님은 처음부터 나를 교회미술을 할 사람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나중에 내가 파계한 뒤 다른 사람이 화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처음부터 우리집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더라. 성직자로는 맞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내 재능을 살려주려 한 그 분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최씨는 말한다.

최씨가 70년 대학을 졸업하자 수녀원장은 다시 그를 로마로 유학보낸다. 그는 로마의 본원에서 수녀로 서원을 하고 72년부터 4년간 로마의 벨라아르티아카데미아에서 회화를 배웠다. 이 시기 그는 인생을 바꿔놓는 두번째 성직자를 만난다.

'사막에서 온 편지'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성수도자 까를로 까레또(1910∼1988)는 당시 아시시에서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씨는 74년 이곳으로 피정을 왔다가 "마음에 빛이 들어오는" 체험을 했다. "돈도 명예도 중요치 않고 오로지 영적인 일만을 최고로 여기던" 최씨는 가톨릭의 총본산인 로마에서 오히려 권력을 향유하는 성직자들을 보며 악몽과 변비에 시달리고 있던 터였다. 그는 "이때 나는 가톨릭에 묶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고 했다.

공부를 마치고 75년에 귀국했고 79년에는 부산에서 전시회도 가졌다. 그런데 전시회 작품을 본 미술가가 "어떤 작품은 좋은데 어떤 작품은 좋지 않다"고 평을 했는데, 로마에서 그린 것만을 좋은 작품으로 꼽는 것이 신기했다. 그 스스로도 한국으로 오면서 영혼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수녀원장은 80년 다시 그를 로마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로마 본원에서는 "4년이나 공부했으면 됐지 뭐하러 또 오느냐"고 했다. 그래서 1년간 산타쟈코모아카데미아에서 프레스코화를 배운 뒤 그는 유리화의 본산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공방으로 옮겼다. 시토 수도회에 딸린 이 공방은 1884년 생겨난 이래 유럽의 독일어권에서 가장 권위있는 유리화 제작소였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유학한 장 익 주교가 주선을 해주었다. 장 주교는 그 후로도 최씨가 힘들 때마다 그의 예술활동을 도와주었다.

그 때 유리화 공방의 스승이 바로 현재의 남편인 훔멜브루너이다. "수도원 원장 신부님이 독일어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공부를 하러 왔느냐고 화를 버럭버럭 내는데 가운데서 말을 좋게 옮겨주는 그를 보며 참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씨도 처음에는 장인으로 훈련을 받았다. 슐리어바흐 공방에는 7,000여가지 색깔의 유리가 있었는데 그는 "따로 할 일이 없어 매일 일만 하다보니 나중에는 저 수녀가 우리집 좋은 유리 다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1년쯤 하다보니 장인은 할 바가 못되었다. 유럽에서 장인이란 유리화가를 떠받쳐주는 역할에만 그치고 있었다. 그는 장기를 살려서 유리화가로 나섰다. 루카스 수사는 그의 작품을 유리로 재현해주었다. 두 사람은 85년 결혼했다.

훔멜브루너는 아내의 작업에 대해 "장인이 감히 화가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유리를 알고 쓰며 색감이 부드럽고 미묘하면서도 힘이 있어서 전원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최씨는 81년 서울 정릉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성당을 시작으로 매년 한 두개의 유리화를 한국에서 제작한다. "초기 작품은 너무 어두워서 돌아보기 싫을 정도"라고 솔직히 말하는 그는 87년 첫 딸 산드라를, 88년 둘째 딸 잉그리드를 낳으면서 작품세계가 달라졌다. 특히 잉그리드는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는 "엄마가 찡그리고 있을 때마다 툭 치고 지나가며 '웃어'라고 말하는 잉그리드는 우리집의 천사"라고 말한다. 예술에 재능이 있는 큰딸은 그림을 통해 그의 유리화를 바꿔놓았다. 92년 서울 대치 2동 성당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사람 얼굴의 동그란 눈은 바로 어린 산드라의 밝은 그림에서 배운 것이다.

그는 "유럽에서는 건축가가 성당 건물을 설계하는 순간부터 유리화가와 의논을 한다. 다 만들어 놓은 건물에 유리화만 넣으라는 한국은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꼭 들러보세요

서울 수서 성당

"건물 전체와 밝은 유리화가 아주 잘 어울린다."

서울 전농동 성당

"최근 경향을 볼 수 있다."

서울 태능 육사 새성당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푸른 색조로 되어있다."

서울 혜화동 가톨릭 신학교 성당

"성서의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했다."

경기 부천 심곡동 성당

"비구상으로 나의 모든 기량이 다 녹아있다."

경기 안양 중앙 성당

"대작이며 색을 대범하게 썼다."

벽제 애덕의 집 성당

"위로하는 이들과 위로를 받는 이들이 모이는 집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부산 중앙 주교좌 성당과 춘천 죽림동 주교좌 성당, 대전 궁동 성당, 경기 소래 피정의 집, 서울의 압구정동과 신천동 성당 등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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