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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대보름 달집 태우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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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대보름 달집 태우기의 추억

입력
2003.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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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오르는 불꽃 보기를 매우 좋아한다. 시골 부엌의 군불이나, 군에서 많이 쓰던 벽난로의 장작불이나, 캠핑 때 타오르는 통나무의 불처럼 절제된 공간에서 붉게, 푸르게 또는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이 좋다. 내가 이렇게 불꽃을 좋아하게 된 데는 옛 추억이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궁벽한 산골인 무주, 진안, 장수 즉 무진장지역의 한 자락인 장수, 그 중에도 덕유산 기슭인 장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철들기 전 서울로 이사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초등학교 4학년에 다시 장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 시골 삶의 추억은 대부분 이때 이후인데, 그 다음해 정월 대보름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장계는 고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마주하고 여러 마을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 설부터 대보름까지 마을 사람들은 이 양안을 두고 돌팔매며 줄다리기를 마치 패싸움하듯 하였고, 농악패들은 집집을 돌며 음식과 볏짚을 얻고 자기편의 사기도 살려가며 이 행사를 이끌곤 하였다. 그 해 이 놀이싸움에서 돌에 맞은 머슴 하나가 유혈 낭자한 모습으로 돌아와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보름이 지나면 편싸움이 언제였는가 싶게 일상으로 돌아가 다정하게 지내곤 했다.

보름날 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불깡통을 만들어 휘돌리며 밤을 밝히고, 아버지는 논둑에다 쥐불을 놓았다. 동네 어른들은 그간에 모은 짚과 나무로 넓은 논 가운데 커다랗게 달집을 짓고 그 안에 여러 가지 형상이며 그간에 지은 잘못과 소원을 적은 글을 넣고는 신명 나는 한판 놀이를 하였다. 마지막에 이 달집을 훨훨 태웠는데 짚이 타는 그 세찬 불에 나는 내 모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달집이 다 타고난 후에도 오랫동안 멍하게 있었다. 그 후로 소죽 데우는 불이나 사랑채의 군불은 내가 도맡다시피 하였다.

대보름 행사는 농촌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극적으로 봉합하고, 더불어 사는 것의 좋은 점을 되뇌이며, 더불어 살기 위해 과거의 허물을 버리고 새로운 새해를 다짐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문제해결방식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중에도 달집 태우기는 인간의 삶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잘못을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소멸하기 바라는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을 삼키는 불꽃은 모든 허물을 용서하는 자연의 응답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즘처럼 나만을 위한 끝없는 사회적 갈등과 다툼이 계속될 때면 대보름 달집의 불꽃이 생각난다. 영화 '뷰티풀마인드'에서 소개된 내쉬 박사의 주장처럼 '전체의 최대 이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의 차선의 선택이 소수의 최선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이미 우리 농경문화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 재 서울대학교 생물자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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