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북동쪽 해안 험준한 절벽 위. 멀리 푸른 바다에 초점을 고정시킨 카메라 파인더 속으로 육중한 호랑이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난다. 한번도 사람과 문명의 손을 탄 적 없는 야생 그대로의 시베리아 호랑이다.11일 시사회에서 먼저 만난 EBS 특집 자연 다큐멘터리 '밀림 이야기' 1편 '시베리아 호랑이 3대의 죽음'(14일 오후10시 방송)은 시베리아 호랑이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씻어낼 만큼 풍부한 영상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면 나무 뒤에서 못 본 척 슬쩍 피해간다는 시베리아 호랑이. 그만큼 영특하고 예민해 좀처럼 화면에 담기 힘들다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자연 생태 그대로를 이 다큐는 생생하게 보여준다.
해안가 모래밭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을 포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다큐는 연해주 사슴계곡에서 찾아낸 호랑이 새끼들이 한밤 중에 배를 드러낸 채 눈밭을 뒹굴고 형제끼리 살을 부벼대는 모습, 숲 속에서 사냥감을 잡아먹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반경 100㎞에 달하는 자신의 영역을 순찰하기 위해 해안가 절벽 위를 오르고, 5㎝ 크기의 몰래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예민한 습성까지 생생히 전달한다.
1997년 국내 TV 최초로 시베리아 호랑이의 모습을 전달했던 제작진은 이번에는 참호를 파고 좀 더 근접한 위치에서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NHK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세계적인 자연다큐 제작팀은 호랑이 목에 위치 추적 장치를 다는 편한 방식을 택했지만, EBS 제작진은 2년 동안 혹한의 참호 속에서 숨어 지내며 호랑이를 관찰하는 한층 적극적인 자세로 이들을 촬영했다. 위치 추적에 나선 헬기 소리에 놀란 호랑이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까닭이다.
자연과 하나 되어 대상을 응시하는 촬영은 호랑이의 출현을 앞둔 '숲속의 파문'을 묘사한 화면에 잘 드러난다. 스라소니, 너구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독수리도 먹이를 버리고 자리를 떠난다. 딱따구리는 나무 쪼는 소리를 멈춘다. 바로 호랑이가 찾아온 것이다. 이처럼 제작진은 시베리아 호랑이를 둘러싸고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미세한 변화까지 현장감 넘치게 전달한다. 연해주 북쪽 해안을 항공에서 훑듯이 찍어 내려간 풍경 화면도 아름답다.
그러나 연해주 타이가 숲의 생태계는 더 이상 밀림으로 불리지 않는다. 어미 호랑이는 밀렵꾼의 총에 맞아 죽었고, 수컷 새끼는 올무에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다. 남은 암컷 새끼 두 마리는 다시 새끼 두 마리씩을 낳지만 그들이 파괴된 먹이사슬 구조에서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150여 마리로 추정되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언제 멸종될지 모른다.
'밀림 이야기'는 사슴계곡을 다시 찾은 2대 어미 호랑이와 3대 새끼 호랑이 두 마리가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끝난다. 특별한 줄거리 없이 절제된 내레이션으로 호랑이의 생태를 그대로 전해줄 따름이지만, 제작진의 고충이 실감되는 논픽션의 사실감은 보는 이의 가슴에 자연의 숭고함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15일 방송하는 2편 '침묵의 추적자'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여진족의 후예인 우데게족 이야기를 다룬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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