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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프롬 헤븐'/동성애 남편… 흑인을 사랑하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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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프롬 헤븐'/동성애 남편… 흑인을 사랑하는 아내

입력
2003.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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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주의 작은 도시. 남편은 가전 회사 사장이고, 아들 딸 하나 씩이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 아내는 사교계의 중요한 인물이며, 여성 잡지에 내조 이야기가 실리는 등 한마디로 부러울 게 없는 여자다. 그러나 작은 결핍만 있어도 쉽게 균열이 생긴다는 점에서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란 오히려 불안하다.'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은 이처럼 천국 같은 가정을 꾸리던 한 아내가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는 순간부터 겪게 되는 내적 방황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녀의 방황은 흑인 정원사가 스카프를 집어 주던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벨벳 골드마인'으로 동성애 영화의 기준을 높인 토드 헤인즈(42) 감독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편의 삶과 사랑에 대한 멋진 드라마를 엮었다. 60년대 식 할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구도를 통해 그는 동성애가 어느 시대의 조류에 영합한 감정의 낭비가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 욕망임을 귀납적으로 보여준다.

야근하던 남편에게 저녁 도시락을 준비해 간 캐시(줄리앤 무어)는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편은 "오래 전 그 일이 있은 후부터…"라고 고백을 하고, 캐시와 프랭크는 병원을 찾는다. 그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건 병이라고,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고 둘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병도 아니었고, 그래서 치료되지 않았으며 남편은 또 다른 남자에게 매혹됐다.

남편의 동성애를 고민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계몽 영화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해 흔히 흑인이 맡는 일의 하나인 정원사로 만족해야 했던 레이몬드(데니스 헤이스버트)가 캐시와 나누는 은밀한 사랑은 영화를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축이다. 캐시 남편의 동성애 문제를 눈물 흘리며 이해했던 친구가 "그와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캐시의 말을 듣고 돌아서는 대목은 50년대의 숨막힐 것 같은 백인주의의 실체를 실감케 한다. 하긴 "당신은 나의 유일한 남자"라고 울먹이는 캐시를 외면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레이몬드의 슬픔을 상기해 보면 사랑이 세상을 설득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 흑인과 사랑에 빠진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에서는 상대방의 '선을 넘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인간의 심성이 드러난다.

쌉싸래한 숲의 향기가 맡을 수 있을 듯한 아름다운 자연과 목을 죄는 듯한 실내 풍경이 대조를 이루며 50년대의 인간 내면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임신 중 영화를 촬영,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줄리앤 무어의 연기는 품격과 열정을 겸비해 왜 그녀가 할리우드 작가·감독들의 뜨거운 손짓을 받는지 알게 한다. 박제된 행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가슴 속의 뜨거운 사랑을 따라가는 역할로 그녀 이상의 배우를 찾기는 힘들 것 같다.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원작인 더글러스 서크의 1955년 작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s Allow)에서 시대상과 캐릭터를 따와 애정어린 오마주를 바쳤다. 23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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