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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3) 추억속의 명곡 "비속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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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3) 추억속의 명곡 "비속의 여인"

입력
2003.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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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10년 넘게 새 곡을 쓰고 있지 않다. 더 써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나오긴 했겠지만, 나 스스로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음악성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껏 500여 곡을 썼으나, 뭉뚱그리면 모두 평범한 인간의 얘기일 뿐이었다. '새로움'이 채워지기까지 공백이 필요한 것이다.노장 사상에의 도취와 컴퓨터 음악 시도 등 공백 기간에 내가 보여 준 몇몇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나의 대표작들을 한 번 짚고 넘어 가는 게 순서일 듯 싶다. 이를테면 나의 작품론이다.

나의 첫 음반은 1958년, 내 나이 22세 때 도레미 레코드 회사에서 나왔던 '히키-신 기타 솔로집'이다. '달맞이', '봄 처녀', '아리랑' 등 온 국민이 아는 동요와 민요 12곡을 록풍으로 바꾼 경음악집이다. '히키 신'이란 내가 스스로 붙인 나의 예명 '재키 신'을 미 8군 사람들이 바꿔 부르던 이름이었다. 취입은 현재 서울 스튜디오 회장 최성락씨가 운영하던 장충 녹음실에서 이뤄졌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갔던 녹음실이었다.

미 8군 무대에서 일하던 선배 연예인 4명(베이스, 드럼, 알토 색소폰, 세컨드 기타)을 설득한 뒤 내가 최씨한테 제의했던 것이다. 내가 파트별로 편곡한 악보를 앞에 펼쳐 놓고 취입했는데, 실수 없이 단 한 번만에 녹음이 끝났다. 요즘 말로 하자면 모두 '퍼스트 테이크'였다. 사실 취입 장비라고 이름 붙이기도 민망스런 수준의 기기였다. 마이크가 하나 달린 미군의 휴대용 수동 녹음기를 중간에 두고 쭉 둘러서서 한 녹음이었다. 이듬해에는 한 단계 발전시켜 '히키-신 기타 멜로듸 경음악 선곡집'이 나왔다. 역시 동요와 민요를 재즈 풍으로 연주했던 비슷한 음반이었다.

당시 그 음반에 대한 반응은 전무했다. 일반인들은 그 음반이 나온 지 안 나온 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2002년 가을 클럽 '우드스탁'에서 공연할 때, 일본에서 온 '올드 팬'이라며 바로 그 판을 꺼내 사인을 부탁해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는 중견 애니메이션 제작자인 요코미조란 사람이었다. 40대 초반이었던 그는 그 판을 단돈 몇 백원에 구입했는데, 무대가 끝난 뒤 이렇게 귀한 음반인 줄 몰랐다고 말해 추억 속에 잠겼던 일이 생각난다.

나의 출세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64년에 나온 '비속의 여인'이다. 그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5년은 이교숙 선생님으로부터 화성학 등 음악에 대해 가르침을 받던 세월이었다. 그러므로 그 곡은 경음악곡집을 발표한 뒤 한국적 록에 대한 갈증 아래, 말하자면 문제 의식을 갖고 씌어진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비속의 여인'은 서정길(노래), 한영현(베이스), 권순조(드럼) 등 제 2기 에드훠의 작품이었다. 동두천 7사단 내의 '야미(暗) 쇼'(비공식 무대)로 가까스로 버티다 사라진 제 1기 에드훠의 뒤를 이은, 그룹다운 그룹이 만든 곡이다. 당시 나는 거기서 "마스터"로 불렸다.

언론들은 우리를 비틀스의 아류로서, 60년대 후반 국내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생긴 보컬 그룹 중 하나로 보도하곤 했지만, 그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우리는 비틀스보다 2년 앞섰던 그룹 사운드다. 당시 우리가 따라 했던 외국의 예라면 '킹스턴 트리오'나 '플래터스'였다.

'노오란 레인 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 하네/다정하게 미소 지며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그것은 감각적 단어만 던지면서 바로 바로 분위기를 전달하는 내 작사법의 시초였다.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표현이 가요 가사의 전부인 양 인식되던 때, 참으로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 곡이 일반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앨범 발표 후 가졌던 시민회관 극장쇼 무대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겐 낯설기만 했던 모양이었다. 트로트, 라틴, 민요 등 당시 유행하던 양식들을 한 데 뭉뚱그려서 보여 주던 버라이어티 쇼를 통해 대중과 처음 만났던 '비속의 여인'은 호기심의 대상 이상은 되지 못 했다. 눈길을 끌지 못해 그대로 사장되는가 싶었다.

다시 관심을 끌게 된 첫 계기는 70년 조영남이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를 만들 때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였다. 이어 박진영, 김건모 등 요즘 가수들이 나름의 색깔을 살려 꾸준히 리메이크하고 있는 그 곡은 복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맨 처음 나왔던 곡이 가장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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