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장 상(張 裳) 총리 서리의 자택에 건장한 사람 2명이 찾아왔다. 그 때 집에는 93세로 치매를 앓고 있는 장 서리의 시어머니와 가정부 밖에 없었다. 이들은 "총리 서리가 되셨으니 도청 방지도 하고 필요한 설비도 해야 한다"면서 2시간 동안 아파트의 모든 방을 뒤졌다. 이런 소란으로 장 서리의 시어머니는 쇼크 상태가 됐고 가정부도 겁에 질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장 서리는 총리 비서실에 "보안 관계자를 보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총리실 직원 누구도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며칠 지나 경찰청에서 비상전화를 설치했고 장 서리 가족은 의문의 방문자들을 경찰 직원으로 믿기로 했다. 하지만 장 서리 가족으로서는 아주 불쾌하고 찜찜한 기억이었다.도청 문제가 우리 사회의 신경을 얼마나 예민하게 만들고 있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통신보안(주) 안교승 사장의 증언은 더욱 자극적이다.
"국민의 정부 때 총리실의 도청 탐지를 한 적이 있다. 처음 상담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보안 조치를 해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를 몰랐다. 광화문의 약속 장소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와 인근의 다른 장소로 오라고 했다. 거기서 만나 벤치가 있는 간이 공원으로 옮겼다. 007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기분이었다. 상담이 시작되자 상대는 이리저리 탐색을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믿음이 생겼던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총리실에 보안 조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총리가 무엇 때문에…? 숨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보안 측정 당일 청사 근처의 민간 유료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안내자가 나타났다. 안내자는 별도 차량에 우리 팀을 탑승 시켰다. 검문 없이 청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총리실 커튼을 치고 몇 시간 동안 보안 점검을 했다. 삼청동 총리 공관도 점검했다. 흔적을 없애기 위해 카펫 위의 발자국을 지우면서 철수했다. 도청 장치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정치권의 불신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총리만이 아닌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 비서실장도 도청에 민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민의 정부 실세 비서실장이었던 A씨의 수행비서는 항상 도청 감지장치를 갖고 다녔다. A씨가 비밀스런 만남을 가질 경우 대개 프라자 호텔이나 롯데 호텔 객실을 사용하는데 이 수행비서는 감지장치가 든 가방을 들고 방을 한바퀴 돌았다고 한다. 그는 "정보기관을 의식한 측면도 있고 만약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감지장치를 갖고 다녔다"면서 "그러나 한 번도 감지장치가 작동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여권의 고위 인사들마저 이렇게 조심하는 데는 과거 도청의 악몽이 워낙 짙게 남아 있고 지금도 도청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청과 감시를 가장 많이 당한 피해자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 DJ의 동교동 자택은 도청 당하는 것은 물론 이웃 안가에서 기관원들이 망원카메라로 거실의 자료까지 찍어대 완전히 노출돼 있었다. 동교동 식구들의 통화에서 '간다'는 '온다'이고, '한복이 다 됐다'는 '방문해달라'는 말일 정도로 도청을 의식한 암호가 일상 언어였다.
이런 DJ이기에 정권 출범 초 안기부장에 이종찬(李鍾贊)을 임명하면서 "정말로 중요한 기관이며 이 곳에서 우리 개혁의 성패가 판가름 날 것"이라며 '클린 정보기관'을 당부했다. 뒤이어 국정원장에 임명된 천용택(千容宅)에게도 주례보고 때마다 "사고 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도청을 경계했던 DJ의 집권 시절에 도청 논란이 다시 제기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은 "국민의 정부 들어서 법 절차를 밟지 않는 도청은 결코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항변한다. 또 "국가 정보기관의 업무를 놓고 우리처럼 노골적으로 정쟁이 벌어지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볼멘 소리도 터져 나온다.
소모적인 정쟁을 막고 도청 공포를 없애기 위해 아예 법 절차를 밟는 감청마저 금지하면 어떻게 될까. 국정원 검찰 경찰 군의 정보 관계자들은 "감청 포기는 나라를 망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군 정보관계자 D씨의 증언. "우리는 북의 야포 배치, 전쟁 발발 시 침투로, 함선의 이동경로 등을 파악하고 있다. 폐쇄되고 엄혹한 평양에서도 정보가 오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통신 감청이 큰 역할을 한다. 지난해 10월 4일 5679부대장 한철용(韓哲鏞)이 '블랙 북'(대북 첩보 일일보고서)을 공개하는 바람에 북이 통신의 암호체계를 바꿨다. 이를 알아내려면 상당한 시일과 비용이 소요된다.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북의 동향 파악이 안 된다는 점이 문제다. 북 핵 문제로 정보 하나라도 중요한 시기인데…."
지난해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 선수단을 담당했던 국정원의 한 직원도 감청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북한 선수를 제외한 행정 요원은 거의 정보맨들이다. 이들은 관광할 때면 어김없이 산에 올라가자고 한다. 항만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그러면 우리는 '입산통제 시즌'이라며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정보 요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들의 통화나 정보 활동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다."
감청에는 공세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방어적 측면이 더 많다. 국정원의 전직 고위간부 C씨의 견해. "서울은 스파이의 천국이다. 북한 간첩이 적지 않고 외국 정보기관원도 활동 중이며 산업 스파이도 암약하고 있다. 서울 주재 미 CIA 요원은 70여명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훨씬 더 될 것으로 본다. 러시아 KGB, 중국의 국가안전부 요원도 적지 않다. 그만큼 한반도, 특히 서울의 전략적 중요성과 역동성이 크다고 보면 된다. 그들의 동태를 알기 위해 감청하는 것은 국가 안보, 국익을 위해 기초적이자 필수적인 일이다"
국정원 간부 O씨의 증언. "미 CIA는 다른 나라들이 개발하지 못한 감청 기술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남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2월에 알려졌지만 미국은 지난해에 이미 알고 있었다. 김정남이 중국 체류 중 고모인 김경희 경공업부장에게 전화로 '나는 밀려났다. 괴롭다'고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을 감청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이 주시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감청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도 미국이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성립하게 한다. 유신 시절 박동선 사건 때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했다는 오랜 얘기에서부터, 문민 정부 때 야당 의원들이 청와대 본관 보수비가 너무 많다고 따지다 반(反) 도청 설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공세를 접었다는 비화(秘話)는 미국의 감청 영역을 짐작케 한다.
정보업무를 주로 하는 외교관 T씨의 얘기도 비슷하다.
"1년 전쯤 유럽의 한 국가를 방문했을 때 그 곳 정보기관이 자국 주재 북한 외교관들의 동향을 담은 상세한 자료를 주더라. 대부분 감청 자료였다. 우리도 감시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보안 조치에 더욱 신경을 쓰도록 했다."
국정원이 해외에 파견하는 정보 요원들은 어떨까. 해외 파트 요원이 전하는 최근의 무용담 하나. "9·11 테러에 이어 워싱턴 정가에 탄저균 테러가 시도됐을 때 우리에게는 백신이 없었다. 시급했다. 우방국이라고 무작정 백신을 주지 않는다. 결국 동구권 국가에서 백신을 구해 보건복지부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 도청도 불사했다고 보면 된다. 정부는 지금도 백신 보유 여부에 대해 노코멘트다."
이처럼 '엿듣기'는 생생한 정보를 얻고 정보 확보, 목표 달성을 위한 시간과 노력을 크게 줄여준다. 이런 점 때문에 권력자나 정보기관은 국내 문제에도 감청의 어두운 면, 즉 불법적인 도청을 활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정국이 어려울수록 도청 욕구는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또 언론 자유의 확대, 인터넷 등으로 열린 사회로 갈수록 정보기관의 정보 능력은 약해지기 때문에 더 깊은 정보를 얻기 위해 도청을 악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전직 안기부 간부의 얘기. "과거에는 도청을 통해 야당의 동향 분석을 하고 대책을 마련한 게 사실이다. 그 정도면 그나마 괜찮다. 그러나 도청을 하다 보면 성 추문, 비리 등 약점들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 약점을 이용하게 되며, 더 나아가 도청 대상을 넓히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정보기관의 숙명적인 정보욕구가 어두운 관행에서 벗어나는데 걸림돌이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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