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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8> 세 번의 "궁즉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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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8> 세 번의 "궁즉통"

입력
2003.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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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의 '개다리 폼'이 그대로 나왔다. 라틴 록을 하던 김광수 밴드 사무실에 찾아가 즉석 오디션이랍시고 보고 난 두어 시간 뒤 밴드의 정규 무대에 선 것이다. 그 첫 무대 모습은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 기타를 메고 마이크 앞에 섰는데, 쭉 앉은 객석을 보니 기에 질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집에서 늘 연습했던 '개다리 폼'이 나왔고, 뜻하지 않게 대성공을 거뒀다.서라벌고 2학년 어느 일요일, 까까머리에 남방을 걸치고 신세계 백화점 건물 밖의 소방 사다리를 타고 5층에 있는 밴드 사무실까지 살금살금 올라 갔다. 그리고 김 선생님에게 즉석 테스트를 받고, 그렇게 데뷔했다. 150평의 홀을 채운 손님들은 열광적으로 신인 가수를 맞아 주었다. 한국에서 통기타(당시 표기로는 '키-타')의 역사가 막 시작되던 때여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귀한 구경감이 아닐 수 없었다. 기타는 당시 유일한 대중 문화였다. 프레슬리는 물론 팻 분, 폴 앙카 등 내가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는 대단한 인기였다.

얼마 안 돼 나는 학교도 때려 치웠다. 한동안은 다시 잡혀 들어가는 꿈에 놀라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고등학교 친구나 선배 집을 1개월 동안 전전하다 찾은 곳이 신당동의 먼 친척댁이었다. 거기서 아침에 보리밥만 한끼 얻어 먹고 뱃속의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꾀죄죄한 교복 차림으로 종로의 기타 학원 밀집 지역을 돌아 다녔다. 기타 학원 선생 시절이었다. 그 바닥에서 내 소문이 제법 퍼졌다.

어느날 한 빌딩 주인이 "2층을 음악 학원으로 하자"며 동업을 제의했다. 쭉 지켜 봤다며 나더러 기타 선생이 돼 달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지푸라기도 아쉬웠던 나는 당장 그리로 옮겨 뽕짝, 스탠더드 재즈, 샹송, 칸소네, 탱고 등 원하는 것들은 뭐든 다 가르쳐 줬다. 그러나 월급은커녕 전기세, 밥값, 사무실 임대료마저 빼먹는 바람에 나는 곧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됐다. 그러나 '궁즉통(窮卽通)'인가. 내 연주를 유심히 살펴 보던 한 아저씨가 "내가 실은 미 8군 쇼단 남자 무용수인데 길을 터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용산의 미 8군 밴드 마스터한테 가서 몇 곡 쳐 줬더니 "내일부터 연습하자"며 "전자 기타를 갖고 오라"는 것이었다. 탈락될까봐 "(전자 기타가) 있다"고 대답해 놓고 고민에 빠졌는데, 역시 '궁즉통'이었다. 종로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같이 제약 회사에 다니다가 독립해서 성공한 동료가 마침 나를 알아 보는 것 아닌가. 그 친구는 옛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파고다 공원 건너편 악기상가로 나를 데려 가 "출세하면 갚으라"며 곧 바로 일제 '테스고' 전자 기타를 안겨 주었다.

바로 다음날 이태원 클럽 'NX-1'로 오디션을 보러 갔다. 미국인 심사위원 8명이 장막 뒤에서 심사를 보고 있었다. 할리우드 등지에서 파견된 그들은, 말하자면 미 8군 쇼 납품 업자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앰프가 먹통이었다. "탈락이다. 다음 기회에 보자"는 밴드 마스터의 말이 벽력 같았다. 나는 화가 치솟아 발로 앰프를 세게 걷어 찼다. 그러자 장난 같이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시험관들은 내게 고난도의 코드를 쭉 불렀고 나는 줄줄이 쳤다. 'B'였다. 다 좋았는데 준비가 덜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B급이 일감은 가장 많았다. 잘 나갈 때는 한 달에 25일간이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플로어 쇼(floor show)'. 당시 국내에는 20여개의 '플로어 쇼'단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임진강 일대 2사단, 의정부·동두천의 7사단, 오산·군산 공군 기지, 부산 8군 등 한국내 미군 주둔지는 다 내 무대가 되는 셈이었다. 스태프까지 포함, 나는 20여명이 한 식구로 움직이는 쇼단 '스프링 버라이어티(Spring Variety)' 소속이 됐다. 재즈 클래식 라틴 팝 등을 잘 엮어 고급 쇼 무대로 꾸민 뒤,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쇼단이었다. 나는 두 번째 테스트에서는 물론 A 플러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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