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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5> 부침과 파란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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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5> 부침과 파란의 어린 시절

입력
2003.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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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38년 1월4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시대의 이발업이란 피부학, 두피영양학 등 관련 과목을 떼야 허가가 날 만큼 전문직에 드는 일이었다. 아버지 신익균은 어린 내게 아주 큰 인물로 각인돼 있다.내가 너댓살 무렵, 아버지는 일본인의 잦은 간섭을 피해 사업을 크게 할 계획으로 식구를 데리고 당시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만주 신찡(新京·현 장춘)시로 이사했다. 만주서 아버지는 4층짜리 이발소를 세울 만큼 돈을 벌었다. 덕분에 나는 당시 그렇게도 귀했던 '미루꾸'(캐러멜)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구경도 하기 힘들었던 어린이용 '리쿠사쿠'(배낭)에 '미루꾸'가 잔뜩 들어있다는 걸 아는 동네 꼬마들이 늘 나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유치원을 다니던 나는 8·15 광복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결정을 따라 서울로 왔다. 실은 중국인과 소련인들이 앞 다투어 우리 집을 털어 갔던 연유가 컸다. 중국인은 물건을 구걸해 갔지만, 처음 보는 소련인은 따발총을 앞세우고 들어와 곧장 장롱을 뒤지더니 값나는 물건은 싹 쓸어 갔다. 날이 갈수록 소련군이 늘어 가자 우리 가족은 금붙이만 챙겨 열차에 올랐다. 서울로 오는 길은 바로 지옥이었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참상이다.

보통보다 두 세배는 더 걸린 길이었다. 한 역에서 너댓 시간씩 정차했는데 그것은 곧 그들에게 약탈당하는 시간이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건을 뺏어 가거나 아귀처럼 창에 매달려 물건을 뺏어 갔다. 벌판의 레일에 바윗돌을 얹어 억지로 기차를 세운 뒤 안으로 몰려 와 물건을 강탈해 가기도 했다. 배에다 금붙이를 두르고 있던 어머니는 죽어도 못 준다고 하고, 아버지가 억지로 뺏어 소련군에게 주면 겨우 차가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집 재산은 거덜났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 빨리 삶의 어두움을 알아 버렸다. 열흘이나 걸린 귀국길의 악몽은 또 있었다. 터널을 한 번 지나면 객차 지붕 위에 붙어 가던 사람들이 마구 떨어져 나갔다.

지옥행 끝에 당도한 서울은 너무나도 평화스러웠다. 미군들은 일체 빼앗지 않았다. 대신 껌과 초콜렛을 주었다. 상도동에 정착한 아버지는 다시 이발소를 차리고 한 3년 열심히 일했다. 강남 국민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당시 불안한 정국을 감지하고 있던 아버지가 1년 전에 식구를 데리고 고향(충북 진천)으로 내려 가 땅을 사 놓은 덕에 우리 식구는 맨 처음에는 그리 고생 하지 않았다. 어머니(이순자), 남동생(수현)과 여동생(현자) 등 모두 다섯 식구였다.

낮에는 미군기가 인민군 진지에 폭탄을 퍼부었고, 밤이면 인민군들이 움직였다. 만주에서 경험한 소련군과 중국군 천지가 인민군과 국군 세상으로 바뀐 형국이었다. 하필이면 그곳이 바로 양측의 대치선상이었던 까닭에 폭음과 총소리 속에서 하루 하루를 지샜다. 낮에는 미군 폭격기가 급강하해 인민군 진지를 부수는 것을, 폭격이 없는 날 밤에는 산에 올라가 전쟁을 구경했다. 그 때 너무도 기막힌 일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재산을 맡고 있던 고모가 낯을 싹 바꿔 쌀 한 톨 내 놓지 않는 것이었다. 맡겼던 살림도 모두 차지하고는 나 몰라라 했다. 우리 다섯 식구는 거의 매일 굶어야 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도 그렇게 모른 척 하다니, 어린 나이에도 괘씸하기만 했다. 부모는 자존심이 센 분이라 두 분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집 밖에서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물을 한 사발 들이키고는 빻다 남은 밀겨를 목에 쑤셔 넣어 허기를 삭였다.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목이 컥컥 막힌다. 그나마도 바로 집 앞이 물방앗간이어서 가능했다. 그러나 겨는 하나도 흡수가 되지 않아 그대로 변으로 나오는 통에 항문은 성할 날이 없었다. 쑥을 캐서 함께 쪄먹으면 그나마 좀 나았다. 부모는 모두 기력을 잃어 갔고 두 동생들은 눈만 퀭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기적 같았던 것은 나였다. 그런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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