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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38)촉(蜀)나라의 신화: 잠총(蠶叢)과 두우(杜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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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화](38)촉(蜀)나라의 신화: 잠총(蠶叢)과 두우(杜宇)

입력
2003.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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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야기해온 다양한 내용의 동양신화도 이제 끝 무렵에 이르렀다. 이번 회에서는 각 종족의 기원 및 건국신화 중에서 누락되었던 촉(蜀)나라 신화에 대해 보충하기로 한다. 고대의 촉나라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큰 분지이다. 따라서 중원 지역과는 교통이 여의치 않아 고립된 지세에 의지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촉(蜀)'이라는 글자는 누에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촉나라의 성립이 잠업(蠶業)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촉나라를 처음 세운 영웅은 잠총(蠶叢)이라는 누에를 잘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황금빛의 좋은 누에를 수천 마리나 길러 매해 정초에 집집마다 한 마리씩 나눠주었는데 그것을 기르면 반드시 크게 번식하였다 한다. 잠총은 이러한 공로로 인해 처음 촉나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중에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세로 눈을 한 기이한 모습이었고 누에 치는 법을 가르치러 시골을 돌아다닐 때 항상 푸른 옷을 입었기에 후세에 청의신(靑衣神)이라고도 불리웠다.

잠총 다음으로는 백관(栢灌)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되었고 그 다음은 어부(魚鳧)라는 사람이 임금이 되었다는데 이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잠총, 백관, 어부 이 세 명의 임금은 각각 수백 세를 살았고 나중에는 신이 되어 죽지 않았다 하니 촉나라의 초기 임금들은 어질고 신성한 자질을 지닌 존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왕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덕있는 사람에게 양보했던 것으로 보아 요(堯) 순(舜)과 같은 중원의 초기 임금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세 명의 성군들 다음에 촉의 임금이 된 이는 두우(杜宇)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날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동시에 강가의 우물에서 리(利)라고 하는 여인이 솟아나와 둘은 부부가 되었다. 백성들은 두우를 곧 네번째 임금으로 맞이하였으니 그가 곧 망제(望帝)이다. 망제가 다스린 지 백 여년쯤 되었을 때였다. 촉나라의 동남쪽 형(荊) 땅에 별령(鱉靈)이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시체는 강물을 거슬러 촉나라까지 흘러와서 소생하였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망제는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때 옥산(玉山)이라는 산이 물길을 막아 큰 홍수가 났다. 그것은 마치 요 임금때 중원 전체를 휩쓸었던 대홍수와 같은 재난이었다. 백여 년 동안 잘 다스려왔던 망제도 이러한 사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별령이 물에 익숙했던 사람임을 생각해내고 그로 하여금 옥산을 뚫어 물길을 터놓도록 하였다. 별령이라는 이름이 자라의 혼이라는 뜻 아닌가? 별령은 망제의 명을 받고 홍수를 다스리러 떠났다.

그런데 별령이 떠난 후 망제 두우는 평소 마음에 두었던 별령의 아내를 유혹하였다. 둘은 마침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알았다. 별령은 숱한 고난 끝에 옥산의 물길을 뚫어 홍수를 진정시켰다. 백성들의 환호성 속에 별령은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귀환하였다. 별령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망제는 내심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별령은 백성들을 위해 저토록 큰 일을 했는데 자신은 신하의 아내와 밀통(密通)이나 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움과 회한(悔恨) 끝에 망제는 큰 공을 세운 별령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그러나 숨어 산다고 해서 자책은 덜하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 그의 몸은 두견새로 변하였다. 새로 변해 훨훨 날아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봄에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망제의 회한을 대변하듯 구슬펐다. 촉나라의 백성들은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래도 한때는 명군이었으나 한번 실수로 모든 것을 잃고 만 망제의 신세를 생각하고 슬픔에 잠겼다 한다. 망제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별령은 이후 개명제(開明帝)라고 불리웠고 그의 후손이 대를 이어 12대까지 촉나라를 다스렸다.

촉나라의 건국신화는 특색이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중원의 성군신화와 많이 닮아 있다. 우선 선양(禪讓)이라는 양보의 방식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그러하고 홍수를 평정한 영웅으로부터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는 점도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망제 두우는 순(舜) 임금과 닮아 있고 별령은 우(禹) 임금과 비슷하다. 특히 망제와 순은 그 최후가 비극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수많은 고대 작품에서 통한의 울음을 우는 봄새로 출현하는 두견새의 신화적 기원은 망제 두우에 있었다. 두견새는 두우조(杜宇鳥), 자규(子規), 불여귀(不如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군들의 시대 이후 촉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명제의 12대손이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무렵 촉나라의 이웃에는 강국 진(秦)나라가 있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촉 땅이 험준하여 쉽게 침범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진의 혜왕(惠王)은 계략을 쓰기로 했다. 그는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게 하고 아침마다 소의 꽁무니에 황금을 쏟아놓고는 돌소가 황금똥을 눈다고 소문을 내었다. 촉 왕은 이 소문을 듣고 탐이 나서 사신을 보내 한번 그 돌소를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청하였다. 혜왕이 허락하자 촉 왕은 다섯 명의 유명한 장사인 오정역사(五丁力士)를 시켜 길을 닦고 다섯 마리의 돌소를 운반해 오게 했다. 그러나 돌소는 황금똥을 누지 않았고 속은 것을 안 촉 왕은 대노하여 그것들을 도로 진나라에 돌려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진 혜왕은 촉나라로 가는 안전한 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혜왕은 다음 계략을 시행하였다. 촉 왕이 여자를 밝히는 것을 알고 그에게 다섯 명의 미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촉 왕은 기뻐하며 오정역사를 시켜 그녀들을 데려오게 했다. 일행이 재동(梓潼)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큰 뱀 한 마리가 동굴 속으로 막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한 장사가 뱀의 꼬리를 잡았으나 힘이 못 미쳐 딸려 들어가자 다섯 명이 전부 소리를 지르며 뱀을 잡아 당기는 순간 산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오정역사와 다섯 명의 미인 모두가 깔려죽었고 산은 다섯 개의 언덕으로 변하였다. 비보를 듣고 촉 왕은 미인들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곳을 오부총(五婦塚)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곳을 오정역사를 기념하여 오정총(五丁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로부터 얼마후 진 혜왕은 앞서 돌소들이 지나갔던 길을 통해 촉나라를 침공하였다. 촉 왕은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고 무양(武陽) 땅까지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살해됨으로써 개명제의 나라는 마침내 망하였다.

이태백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촉나라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는 일보다 더 험난하다고 노래한 바 있다.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고사성어 역시 촉나라의 지세가 험준함을 표현한 것이다. 촉나라는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처럼 해가 제대로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해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성어는 견문이 좁아서 편협한 견해를 지닌 사람을 비유할 때에도 쓰인다. 그러나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고 천혜의 방어 여건을 갖춘 촉 땅은 중원에서 패배한 영웅들이 휴식하면서 힘을 기르는 지역으로 자주 활용된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게 일시 패한 후 촉 땅으로 통하는 외나무 다리를 불태우고 들어가 역전의 기회를 노렸고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이곳에서 한실중흥(漢室中興)의 대업을 도모하였다. 또 자연환경이 수려한 촉 땅은 상상력과 감성이 뛰어난 시인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소동파(蘇東坡) 등 대시인들이 이곳 출신이거나 이곳을 바탕으로 불후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중원과 떨어져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해온 촉 땅은 1980년대 이후 집중 발굴된 삼성퇴(三星堆) 지역의 유물들을 통하여 그 존재를 입증한 바 있다. 근대에 발굴된 종목인면상(縱目人面像)은 세로 눈을 했다는 잠총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어 흥미롭다.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그림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 삼성퇴 유적

사천성 광한시(廣漢市) 교외에 위치한 고대 촉국(蜀國)의 유적지로 1980∼90년대에 걸쳐 집중적으로 발굴이 시행되었다. 발굴물로는 금(金) 동(銅) 옥(玉) 석(石) 도(陶) 상아(象牙) 등의 재료에 의한 대량의 기물들이 있는데, 돌출한 눈을 한 구리 신상(神像)과 물고기 표지가 있는 황금 지팡이 등은 촉 신화에 나오는 잠총(蠶叢) 어부(魚鳧) 등의 제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발굴물은 은대(殷代)의 청동기 문명의 바탕 위에 현지의 지역적 특색을 충분히 표출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초기 촉 문명에 해당된다. 특히 제사갱(祭祀坑)에서의 발굴물들로 미루어 조상, 자연신, 정령 숭배 등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은 근대에 이루어진 중국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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