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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남원 노봉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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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남원 노봉마을

입력
2002.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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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에 가면 어디서든, '춘향전'의 흔적을 만난다. 지명이 됐든, 길·터널 이름이 됐든, 하다못해 식당 간판에서라도 그 영향권에 들어섰음을 깨닫도록 하는 곳이 남원이다. 처음엔 그 장승도 그저 그런 것인줄 알았다.남원 시내까지 들어섰다가 전주 쪽으로 되짚어 10여분. '꽃심을 지닌 땅' '아소님하(아아, 님이여)' 를 새긴 장승 앞에 섰다.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입구다. 400여년 전 풍악산 줄기 노적봉 아래 터를 잡은 한 양반가(삭령(朔寧) 최씨 집성촌)가 노복들과 정착해 아랫마을 타성바지, 천민들과 경계를 이뤄 살던 유별나달 것 없는 전형적인 마을이다. 하지만 50여 가구 160명 주민들이 농사짓고 사는 이 마을이 최근 6년 새 150만 권이나 팔린 고(故) 최명희 소설 '혼불(전 10권)'의 배경 마을이고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1996년 말 완간된 혼불은 30년대 쇠락해가는 향반 종가 3대의 일대기를 골간으로, 더불어 살던 민초들의 생활상과 전통관습 등을 순우리말로 넘치게 묘사한 대하소설. 작가 최씨의 고향이 노봉마을인 데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이나 고샅 구비구비가 실제 지명과 지형 그대로다. 그래서 주민들은 몇 년째 마을 이름을 아예 '혼불 마을'로 부르며 어렵사리 작가의 혼불 정서와 눈높이를 맞추려 하고 있다. 노봉마을의 '혼불 문학마을' 조성사업이다.

지난 해 이맘땐가, 마을 주민들이 가을걷이도 '거시기(끝나고)'해서 경상도 어디로 '거시기(관광)'에 나섰다고 했다. "아, 거기 사람들이 노봉마을은 고사하고 남원도 잘 모르는 거여. 혼불 야그(이야기)를 꺼냈더니 댐방에 알아묵데." 혼불 마을 조성사업은 99년 그래서 시작됐다. 작가의 1주기 추모행사에 모인 문인 등이 현장을 답사하며 운을 뗀 뒤, 이듬해 시에서 사업비 3,000만원을 들여 장승과 표석, 문학비를 건립했다. 하지만 성에 안찼다. 소설 속 이야기의 주 무대인 원뜸과 중뜸 일가 마을, 타성바지들이 살던 아랫몰 마을이 있고, 실개천, 대숲, 저수지도 온전히 보존돼 있어 소설의 감동을 눈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 마을 전체를 문학공원으로 꾸미자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이 목청을 돋웠다고 했다. "누가 우리 마을을 알아줄 거여, 공원 헐라면 제대로 혀야제." 지역 문인·학자들도 거들었다. 국비와 도비까지 투입된 총 사업비 49억원의 문학마을 조성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남원시는 내년 말까지 마을 곳곳의 소설 이야기 주요 배경지 12곳에 안내 표석을 설치키로 했다. 종부 3대(청암부인, 율촌댁, 효원)가 살던 원뜸 종가집과 막내 종부 효원이 시댁 마을 땅을 처음 밟던 서도역, 민초들의 마을이 있던 고리배미와 당골네와 백정네 등 천민이 살던 거멍골(무산) 등이다. 5,000평 부지에 문학관을 꾸며 소설 속 양반가의 전통 혼례식, 장례식 등 10여 개 장면을 디오라마(축소모형 등)로 재현하고, 등장 인물들이 거닐던 소로, 방죽길 등 마을 길도 단장해 살구나무와 각시복숭아를 심을 계획이다.

주민들은 이 사업에 대대로 갈아오던 문전옥답을 적게는 300평 많게는 1,500평씩 헐값에 내놨다. 시 관계자는 "지방 사업 가운데 가장 힘든 게 토지 확보인데 이번 사업은 아무런 잡음 없이 3개월 만에 마무리됐다"고 했다. 마을 길 곁의 실개천을 복개하면 경운기 두 대가 마주쳐도 비껴 지날 수 있지만, 그 역시 주민 스스로 포기했다. 이장 박기섭(朴祺燮)씨는 "다른 마을은 해마다 도로 확포장이다, 간이상수도 개보수다 해서 조금씩 나아지는디 여그는 마을회의에서 그대로 있기로 혔어. 혼불마을 다워야제"라고 했다.

주민들의 혼불 읽기 열기도 뜨거웠다. 사매면사무소가 연초 혼불 25질을 구입, 19개 부락과 관공서 등에 배포하면서 마을마다 혼불 독서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나(나이)가 들어 책을 읽어도 제대로 알아묵긴 어렵제. 하지만 여그가 혼불마을인디 내가 안 읽었다믄 쓰것능가." 3권째 읽고 있다는 마을 주민 허무신(64)씨는 이번 농한기 때 다 읽어 볼 참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모이면 읽은 이들끼리 화제를 삼기도 한다. "아 거그 말이여, 춘복이가 거시기(강실이)를 거시기 헝게(욕보인 게) 중뜸 대숲잉가…." "내 기억으론 거시기 뭐여…." 9월 면민의 날 행사 때는 혼불 독후감대회를 열기도 했다.

관에서 하는 일이 주민들의 욕심에는 못 미치기 마련. 서도역만 해도 그렇다. 1931년 지어진 판자 건물인 서도역사를 남원시가 사들인 것은 다행이지만 선로와 침목도 샀어야 한다는 게 주민들 생각. 문학탐사 관광객이 오더라도 역사에서 300m 남짓 좌측의 거멍굴 '근심바우' 까지 철길을 따라 걸으며 천민들의 한이 서린 삶의 터전을 구경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예산 탓이다. 시에서는 대신 선로 일부만 남기고 목탄 증기 동차와 객차 2량을 구입해 전시할 계획이다. 지난 해부터 작가의 생가와 묘택이 있는 전주시가 15억원을 들여 별도로 '혼불문학관'을 짓겠다고 나선 것도 어이가 없다. "거그가 남원보담 심도 쎄고, 서울서 가찹기는 허지만 그래도 여그 혼불마을이 있는디." 주민들은 작가의 웃대 조상 묘택도 노봉에 있어 장지까지 만들어 뒀었는데 전주시에 밀린 게 천추의 한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에서는 '혼불'을 '사람이 죽을 때 몸에서 나간다는 불덩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혼불이, 작가가 그랬듯이, 꽃의 가슴에 희망의 꽃씨가 여물 듯 서러운 세월을 이겨 나가게 하는 삶의 원동력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혼불마을이라니께 무식헌 것들이 '귀신마을'로 착각허는디, 그 뜻이 그게 아니랑게." 꽃심을 지닌 땅, 노봉마을 주민들은 소설 '혼불'을 얻어 가슴에 묻어 뒀던 꽃심을 힘차게 피워내고 있었다.

/남원= 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조영호기자 voldo@hk.co.kr

● 마을 가이드 황영순씨

황영순(黃永順·52·여·사진)씨는 자타공인 '혼불 마니아'. 현장 답사 온 문인·교수 등이 가장 즐겨 모시는 마을 탐방 가이드이기도 하다. 황씨 역시 어릴 적 고리배미(상민촌)나 거멍골(천민촌)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어른들의 불호령을 들으며 자란 마을 토박이. '혼불에 혼이 나가' 책 구절을 머리 속에 새기다시피 했고, 그래서 마을 구석구석과 소설의 줄거리를 이어주는 데 그 만한 이가 없다.

소설 배경과 관련, 허구적인 부분과 사실적인 부분을 추려 이해를 돕기도 한다. 소설 속의 어린 주인공들이 살구나무 아래에서 소꿉놀이하는 풍경 등은 인근 마을의 모습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 "탐방 오시는 분들이 강실이(소설속 인물)의 살구나무집이 어디냐고 묻곤 하죠. 하지만 어르신들께 여쭤봐도 마을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대요"

농사꾼이면서 혼불을, 다시 쓰듯 4차례나 통독했다는 황씨. 그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렁각시'로 불릴 만큼 마실 다니는 걸 꺼렸지만 요즘은 전주나 남원 시내로 문학회 행사나 강연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남편에게 차비나 밥값 타 쓰기가 미안해 최근에는 인근 농공단지 공장 식사준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혼불이 먼저라는 건 공장에서도 잘 안다. "식사 준비 중이라도 연락이 오면 달려 나가죠. 어떨 땐 사장님이 제 운전기사 역할도 해 주십니다."

그는 남원시 문학마을 조성사업의 최고 응원군이자 비공식 자문위원이고, 때로는 매서운 시어머니이기도 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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